계승 (2)
그리웠다. 보고 싶었다.
목덜미를 간질이는 말이 많았다. 그런데 막상 백무량을 마주하니 가슴이 먹먹해서 나오질 않았다.
참으로 주책이다.
나이를 그렇게 먹고도 하고자 하는 말을 못 하는 꼬락서니가 이팔청춘의 사내놈 같지 않은가.
그래도 낯짝 하나는 두꺼워져서, 주연호의 걸음은 자연스레 백무량 옆으로 향했다.
“외견을 보십시오. 조손(祖孫)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잖습니까? 젊은 사숙의 모습을 보니 약이 오를 수밖에 없지요!”
“하, 그러냐?”
백무량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언제는 나한테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근육은 어떻게 붙는 거냐 칭얼거렸지 않느냐?”
“그게…….”
“그런 일이 없었다고는 못 하겠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나이가 이래서.”
주연호가 너스레를 떨며 마주 웃었다.
그렇게 두 도사의 웃음이 고요한 호수 위를 비추었다.
그 위로 많은 이야기가 쏟아졌다.
“그땐 사숙이 얼마나 미웠는지 아십니까?”
“내가 뭐?”
“사숙이 나를 얼마나 놀렸으면 옆집에서 그걸 듣고, 골목에서 겁쟁이라고 놀림을 받았었습니다!”
“아, 그랬었나?”
옛날에 하지 못하였던 이야기.
그 이야기는 사소한 것부터 시작하여 백련교의 난 당시에 이르렀다.
“머리의 화상은 어쩌다 생긴 것이냐?”
“백련교가 본가까지 왔었지요.”
“…….”
그 말에 백무량이 잠시 침묵했다.
주연호는 그가 질문을 주저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뻔했다. 주백천의 생존과 그 당시 있었던 일에 관해서 물으려는 것이겠지.
주연호가 빙긋 웃었다.
“물으려거든 편하게 물으십시오. 사숙답지 않게 뭘 그리 주저하십니까?”
“나에겐 칠 년 전이지만, 너에게는 그 열 배가 아니더냐? 그러니…….”
“까마득하지요.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기도 합니다.”
주연호의 시선이 먼 하늘로 향했다.
그 시선에 옛 기억이 알알이 맺힌다.
씁쓸하고, 어둡고, 지저분한 광경이 별과 달에 비쳤다.
그러나 주연호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래도 괴로워하기엔 너무 먼 과거가 아닙니까? 사숙은 나이가 어려서 모르겠지만, 이만큼 늙으면 무덤덤해지는 게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냐.”
“예.”
“그러면, 물어도 되겠느냐?”
백무량의 물음에 주변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나뭇가지 위에서 지저귀던 새, 벌레, 호수에 잔잔히 일던 파문.
그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이 와중에 심천검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지금처럼 백무량에게 중요한 때가 없을 테니까.
그토록 찾아 헤매던 주백천의 행방과 백련교의 난 이후의 일을 들을 기회가 아닌가.
심천검이 숨죽이는 가운데 주연호가 입을 열었다.
***
“형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주연호가 황망한 표정으로 주백천을 보았다.
얼굴에 피가 덕지덕지 칠해진 것으로 모자라, 일부분은 말라붙었다.
새하얗게 물든 안색에서 불안감이 밀려왔다.
“설마…… 백련교가…….”
“호야.”
주백천이 주연호의 애칭을 부르며 웃었다.
얼굴이 피로 물들어 보기가 무섭고 께름칙하였으나 마음을 편하게 만들려는 의도만은 전해졌다.
한데 주백천의 목소리에 무언가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곤륜의 명맥이 너에게 달려 있다면 믿어 주겠느냐?”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장문인과 백 사숙이 있잖아요?”
“장문인은 돌아가셨다. 그리고 네 사숙은…… 내 생로(生路)를 열어 주기 위해 곤륜산에 남았지.”
“그, 그럼 곧 이곳으로 오시겠지요!”
주연호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주연호에게 있어 백무량은 항상 당당한 모습으로 자리했다. 어떠한 고수 앞에서도 고개 숙인 적 없이, 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행했다.
그 백무량이라면 어떻게든 살아서 와 줄 것이다.
그렇게 막연히 품은 희망을, 주백천이 꺾었다.
“상대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이다. 백련교주는 누구도 꺾을 수 없어.”
“그걸 형님께서 어찌 아십니까?”
“나는 안다. 알기 때문에, 온 것이야.”
주백천의 웃음이 스르르 지워졌다.
사태의 중대함과 잃어버린 것에 대한 슬픔과 분노 같은 것이 그 위를 덮었다.
그러나 그보다 급한 것이 있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오래가질 못해.”
“예?”
“많은 걸 보고, 준비한 탓에 수명이 얼마 남질 않았거든.”
주백천이 다급한 어조로 오랫동안 비밀로 품어 왔던 말을 쏟아 냈다.
여태까지 천기를 읽으며 오늘 일을 대비하였으며, 곤륜의 멸문은 필연이라는 것.
그것을 위해 백선신검과 같은 보물을 챙겨 왔다는 사실.
안배를 남기기 위해 유람을 떠났던 일들.
인지를 넘어서는 이야기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믿기가 어려운 소리기도 했다.
주연호가 뒷걸음질 치며 물었다.
“농담이지요?”
“호야, 너 말고는 후일을 믿고 맡길 사람이 없구나.”
“형님께서 준비하신 일을 제가 어찌 마무리합니까?”
“너라면 할 수 있어. 왜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야, 형님은…….”
주연호가 입술을 어물거렸다.
많은 것이 떠올랐다.
은연중에 품은 열등감과 시기.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 갑자기 욱하고 올라왔다.
“형님이나 사숙이나 항상 남보다 뛰어나지 않았습니까? 저처럼 평범한 놈이 해낼 수 없는, 비범한 업적과 이야기를 남기고…….”
“호야.”
주백천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장삼을 적신 핏물이 조금씩 퍼졌다.
하지만 당시의 주연호는 몹시 아둔하여, 그 모습을 미처 보지 못했다.
“늘 그렇듯 형님이 하신 일을 저는 망칠 거고, 남의 손가락질이나 받을 겁니다. 차라리 평소 어울리시는 학도사에게 맡기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주백천이 부드럽게 웃었다.
“누가 너에게 그리 말하였느냐?”
“…….”
“내가? 아니면 네 사숙이?”
“강호에서 그리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주연호의 뺨이 부끄러움으로 붉어졌다.
그것을 본 주백천이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어째서 남의 말에 귀 기울이느냐? 네가 하고 싶은 것, 내면의 소리를 관조하며 살아도 부족한 삶이다. 못난 것을 억지로 찾아서 대면하며 살아서야 어찌 행복할 수 있겠느냐?”
주연호가 침묵하니, 주백천이 하려던 말을 이었다.
“호야, 나는 늘 네가 행복하길 바랐다. 그러나…… 지금 보니 내가 어리석었구나. 미래의 일을 훔쳐보느라 주변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였어.”
“아닙니다, 저는…….”
주연호가 갈피를 못 잡고 말끝을 흐렸다.
이에 주백천이 금강경의 유명한 구절을 읊었다.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두어라. 얽매임 없이 알기만 해라.”
스윽.
주백천이 품에서 서책 하나를 꺼냈다.
손때가 잔뜩 묻어 더러웠으나, 몹시 소중한 것을 다루는 듯했다.
그 서책은 주연호에게 내밀어졌다.
“네 안위를 위해서라도 한 번은 읽어 두어라. 서책의 무게를 짊어지기 힘들거든,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된다.”
“하지만 형님, 아까는 저에게…….”
“무량이에 이어 너까지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구나. 방금은 내 억지였다고 생각해 다오.”
“……일단은 받겠습니다.”
주연호가 서책을 조심히 받아 들자, 주백천이 밝게 웃었다.
이제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듯한 모습에 주연호는 불길한 마음이 들어서 물었다.
“형님은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아, 백련교도가 들끓으니 저와 함께 호광성 쪽으로 가심이…….”
“나는 갈 곳이 있다.”
“예?”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이다. 무량이 또한, 네가 살아만 있다면 재회할 날이 올 것이고.”
뚱딴지같은 소리였다.
백련교주에게 죽었을 거라고 말했던 사람이 왜 재회한다고 확신한단 말인가?
주연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곧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형님, 몸이…….”
“조금 다친 것이다.”
이야기하던 와중에 주백천의 장삼은 완전히 피로 젖은 상태였다.
이미 쓰러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중상.
한데 주백천의 눈빛이 몹시 형형했다. 강호십대고수의 안광도 그 앞에서는 잔딧불만도 못하리라.
“너는 호광성으로 피해라. 나는…… 책무를 다해야 해.”
주백천은 그 말을 남긴 채 떠났다.
주연호도 처지는 다르지 않았다. 백련교의 추적을 뿌리치면서 호광성으로 도망을 쳐야 했다.
그 와중에 정수리에 심각한 화상을 입었고, 세 마교가 백련교를 합공하는 광경을 보았다.
‘무계봉신술.’
주백천의 서책에 적혀 있던 술법이자 천마신교의 비술.
그것이 백련교주의 몸을 빨아들였다. 멀리서 지켜보고도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었다.
그렇게 백련교의 난이 끝났지만, 믿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른 마교가 나타났다는 증거가 없었을뿐더러 주연호의 행색을 보고 미친 사람 취급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형님은 어디로 가셨을까?”
주연호는 주백천을 찾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전국을 헤맸다.
어쩌다 보니 서책에 적힌 숙제를 풀기도 했다.
그것은 미래에 찾아올 도사.
천의를 이은 도사에게 줄 안배이고, 인연이었다.
청성파의 성지를 몰래 출입하고, 조원양에게 빚을 입히는 과정.
미래를 상세히 적어 놓은 듯한 서책의 내용에 소름이 돋았다.
‘이런 걸 남기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천기를 보고, 서책에 누설하신 건가.’
학도사로서 대성하지 못했지만, 기본은 안다.
평범한 도사라면 애초에 천기를 읽을 수도 없겠지만, 이만한 양의 누설은 천벌을 맞고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주백천과 마지막으로 마주한 때, 그의 나이가 마흔하나.
그 나이까지 살아남은 것조차 불가사의했다.
그러나 가장 문제는 따로 있었다.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형님.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지독한 외로움.
백련교의 난에서 추하게 살아남아, 사문에 되돌아가지 못하고 서책에 적힌 천기를 풀어내는 삶.
주연호는 시시때때로 술에 취해서 울거나 웃고, 행패를 부렸다.
그러는 과정에서 무극진인을 만났다.
“이게 무슨 도사냐? 술 냄새가 진동하는구나.”
“시끄럽다.”
처음에는 악연이었다.
괜히 시비를 걸었다가 코가 부러지고, 무극진인 때문에 누군가한테 쫓기기도 했다.
그러다 친우가 되었지만, 서책이나 천기에 대해 말하지는 못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건, 백회혈이 막혀서일지도 몰라.’
예로부터 백회혈은 하늘과 통하는 혈도라 불렸다.
그곳이 손상된 주연호는 무공을 익히지 못하는 몸이 되었지만, 천기를 누설해도 목숨을 이어 갈 수 있는 것이라고.
내심 그렇게 예측하였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사람의 인생을 들쑤시고, 성지를 훼손하고도 멀쩡하게 살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연호가 무극진인에게 물었다.
“사실은 내가 형님을 찾고 있어.”
“말해 보게.”
주연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무극진인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무당산 어딘가로 안내했다.
처음에는 의아했으나 점차 가까워지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주연호는 감정이 북받친 목소리로 외쳤다.
“형님……!”
수십 년 만의 해후였다.
***
“……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숙께서 되살아나셨지요.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재회하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요.”
긴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낸 주연호가 빙긋 웃었다.
하나 백무량의 표정에는 고뇌가 가득했다.
“사형께서 무당산에 계신단 말이냐?”
“예.”
“하지만, 네 이야기로는…… 이미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중상이지 않았더냐?”
“그렇지요.”
“하면…… 어찌 수십 년 동안 살아 계셨단 말이냐?”
그 말에 주연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백무량에게 따라오라는 듯, 어딘가로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