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94화 (194/275)

만남 (5)

이화접목의 극한.

허공을 접거나 굽힐 수 있다면 어찌 베고 찌르는 것으로 이길 수 있겠는가?

모든 초식이 무위로 돌아간다.

실로 무쌍이란 말이 어울린다.

다른 구파일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은 무당이 남존(南尊)으로 불리는 이유가 있었다.

“……하하.”

백무량은 무극진인이 자아내는 생경한 감각에 개운한 웃음을 흘렸다.

어린아이가 처음 두 발로 대지에 섰을 때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미처 몰랐던 영역을 향한 개안.

무극진인의 혜검, 굴공(屈空)의 초식은 때때로 백무량의 이목을 속인 채 들어왔다.

태청신공의 청운이 종잇장처럼 잘리거나 찌그러지는 현상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래서 웃음이 터졌다.

‘청운은, 완벽하지 않다.’

무극진인과의 비무에서 발전시킬 가능성을 보았다.

무인으로서 기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백무량의 운해가 파도를 일으켰다.

수십 갈래의 파도 속에 각기 다른 무학이 침습했다.

공동파의 경파, 화산파의 화검, 보타문의 금강…….

아미복호검에 이르기까지, 운해는 출렁이는 때마다 수백의 변화를 일으켰다. 아무리 뛰어난 기감을 가지고 있다 한들 따라갈 수 없는 변화량이었다.

태극혜검을 펼치는 무극진인의 눈에 놀라움이 일어났다.

“선배는 대체…….”

얼마나 많은 무학을 눈에 담고 체화시켰단 말인가?

하물며 어릴 때부터 저런 내공을 지니지는 않았다고 들었다.

주연호에게 들은 것이 맞는다면, 처음부터 다시 쌓았다는 소리였다.

“괴물이오?”

무극진인이 저도 모르게 내뱉은 물음에 백무량은 의념을 일으키는 것으로 답했다.

촤아아!

수십 갈래의 파도가 찰나에 공간을 점했다.

무극진인의 전신 높이로 치솟은 무학이 서로 맞물리며 조화를 이루었다.

분심조화결.

그 현묘함에 무극진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비범함으로 따지자면 태극혜검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았다.

‘무당파가 여러 대에 걸쳐 완성한 것을, 구천검 선배는 일대(一代). 혼자서 만들어 냈단 말인가?’

이 무슨 터무니없는 재주인가!

무극진인은 수십 년 만에 부아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젊음의 피였고, 감정이었다.

“하!”

숨을 내뱉은 무극진인이 오른손을 유연하게 비틀었다.

태극의 외태(外態)를 그리는 듯한 모습에 백무량도 근육을 긴장시켰다.

[온다!]

심천검의 외침과 육감의 경고가 동시에 찾아왔다.

수십 갈래의 파도가 무너지는 현상과 함께 무극진인의 검첨이 앞으로 내질러졌다.

그것을 피한 건 단순히 감각이 아니라, 예지의 영역.

운룡대팔식의 한 걸음이 공간을 뛰어넘었다.

소리는 그 뒤에 찾아왔다.

꽈드드득!

무극진인이 검을 휘두른 장소.

조금 전까지 백무량이 서 있던 곳이 굽어졌다. 그 순간에 백무량은 무극진인의 등 뒤에 있었다.

운해의 파도 소리를 들은 무극진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몸을 돌리며 검을 크게 휘둘렀다.

무극진인이 휘두른 검이 공간을 찢고 접었다.

백무량의 가슴팍을 향한 검기가 찢어진 공간 사이에 숨겨져 있었다.

‘알고 있다면.’

구태여 검을 휘두를 필요도 없다. 벽처럼 치솟은 파도가 검기를 막아 냄과 동시에 무극진인을 향해 돌진했다.

아미복호검의 수경(水經).

공력으로 빚어진 운해가 물처럼 출렁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무형의 칼날, 팔첨(八尖)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무극진인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고서 기수식을 취했다.

“과연.”

단 두 음절에 감탄과 흠모가 잔뜩 배어 있었다.

어딜 봐도 절벽에 몰린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뜻.

백무량이 재차 공세를 취하기 위해 의념을 일으키는 가운데, 무극진인의 검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스으윽.

오(㐅) 자를 그린 검로.

그것이 완전한 형상을 그렸을 때, 시야가 일그러졌다.

운해로 이루어진 벽이 무너지며 백무량의 몸이 앞으로 이끌렸다.

“……!”

백무량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천하에 어떤 무공이 고수의 몸을 제 마음대로 움직이게 한단 말인가?

그 이질적인 무공이 눈앞에 있었다. 그를 보는 무극진인의 두 눈이 둥글게 휘어 있었다.

[혜검은 아니나, 여러모로 요긴한 잡기요.]

[……허.]

백무량의 입가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태청신공을 운용하면 이끌리는 것을 막을 수야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당해 봐야 보이는 게 있기 마련.

백무량은 그 흐름에 순응하면서 주먹을 쥐었다.

[무당의 태극권이 일절이라지?]

[……!]

무극진인의 표정이 굳는 순간, 백무량이 검을 놓았다.

백선신검이 땅에 박히는 소리가 곧 신호가 되었다.

푹!

백무량의 오른 주먹이 무극진인의 거궐혈을 향해 내질러졌다.

한데 그 주먹에 담긴 묘리가 심상치 않았다.

굴공검에 끌려오고 있음에도 비골근에서부터 내력을 회천(回天)시켜, 수양명대장경에까지 힘을 증폭시켰다.

“참으로 놀랍소!”

백무량의 재기 넘치는 초식에 무극진인도 호승심이 들끓었다.

백무량의 회천과 태극권의 전사경.

맞붙어 보지 않고서야 무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

무극진인도 검을 놓고서 진각을 밟았다. 용천혈에서부터 들끓은 진기가 거칠게 휘돌았다.

그렇게 마주한 두 도사의 거리가 세 치에서 네 치.

손을 조금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백무량은 많은 것을 떠올리고, 지웠다.

최종적으로 남은 것은 열넷의 권로와 다섯의 각법.

쩌억!

가장 먼저 회천과 전사경이 부딪쳤다.

힘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서로 여지를 남겨 두었다.

‘어차피, 이 일격으로 이기지 못한다.’

그렇다면 다음 주먹질에서 거꾸러뜨리면 될 일.

백무량의 몸이 앞으로 파고들었다. 반사적으로 휘두른 팔꿈치가 무극진인의 옆구리를 노렸다.

쐐액!

칼바람이 무극진인의 도복을 찢었다. 풍압만으로 사람을 해하기에 충분했으나, 상대가 무극진인이었다.

“……하!”

즐겁다는 듯 크게 웃은 무극진인의 쌍수가 태극을 그렸다.

휘두른 팔꿈치가 옆으로 기울어지고, 무극진인이 슬쩍 내민 왼발이 백무량의 균형을 무너뜨리려는 듯했다.

이것을 미리 염두에 둔 것이 각법.

그것도 운중용형보를 가미한 질풍퇴(疾風腿)라.

쩌적!

백무량의 퇴법이 무극진인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으음.”

신음을 내뱉은 무극진인이 여러 초식을 펼쳤지만, 우위를 차지하는 일은 없었다.

백무량이 떠올렸던 열넷의 권로와 다섯의 각법.

그것만으로 무극진인에게 이겨 낼 수 있었다. 분심조화결과 상단전의 단련이 만들어 낸 승리였다.

이것으로 백무량은 확신할 수 있었다.

‘강호십대고수를 확실하게 능가하였구나.’

한때 동경했던 이들보다 강해졌음에도 크게 와닿는 마음은 없었다.

그저 무덤덤했다.

앞으로 향할 길.

마도 고수와의 싸움이 남은 상황에서 강호십대고수는 경쟁자가 아니라, 함께 싸울 동료였으므로.

“다시 검으로 승부를 보지.”

백무량의 말에 무극진인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이 저절로 떠올라 손아귀에 잡혔다.

백무량만큼은 아니지만, 의념을 제법 단련한 듯했다.

‘무당의 무학은 상단전과 관련이 있는 건가?’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비무가 시작되고 교환한 것이 어느덧 백여 초.

무극진인의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져 가는 것이 보였다.

그가 숨을 고르는 동안 백무량은 자신이 본 것을 정리했다.

‘태극권에 담긴 이화접목의 묘리와 혜검의 굴공이라.’

눈으로 보기도 했고, 흐름을 읽어 보기도 했지만, 실체를 알아차리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문득 백무량의 시선이 옥허봉으로 향했다.

무극진인과 마주하기 전에 보았던 흐름.

옥허봉을 중심으로 흐르는 태극의 조화 같은 것이 백무량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

틀이 깨지고 그 사이에 무언가가 치밀었다.

무당산 자체가 성지이고, 무당파 무학이 이질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면…… 이 흐름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그 의문이 백무량의 뇌리에 파고들어, 어떠한 깨달음으로 자리를 잡아 가니.

기수식을 취했던 무극진인도 손에 힘을 거두고서 가만히 기다렸다.

백무량이 깨달음을 수습할 때까지.

마지막 비무를 후련하게 끝낼 수 있기를 바라며.

그렇게 일다경이 흐르고 나서, 백무량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오래 기다리게 했나?”

백무량과 시선을 마주한 무극진인이 껄껄 웃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보지 못했던 현기.

무당파 도사와 같은 눈빛이 백무량에게 있었다.

사문의 가르침을 타문에게 빼앗긴 상황임에도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째 선배에겐 어울리지 않소.”

“하면 부딪쳐 보지 않겠나?”

“좋소.”

백무량의 회천과 태극권의 전사경이 부딪쳤듯.

이번에는 두 도사가 서로 마주한 채, 각자가 깨달은 태극을 칼끝에 구현했다.

한데 백무량의 운해가 심상치 않았다.

꽈르르……!

양의(兩儀)가 동심원으로 흐르듯, 두 갈래의 운해가 태극의 형상을 이룬 채 밀집하고 있었다.

한데 그 모습이 어째 어수룩한 무인이 강기를 억지로 빚어내는 것과 비슷했다.

무극진인의 표정에 황당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어찌…….”

“미안하지만 나는 장문인처럼 태극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운 게 아니라서 말이야.”

백무량은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옥허봉을 보고 태극의 흐름을 깨달았으되, 무극진인처럼 순수한 검법으로 ‘공간’을 굽히거나 접을 방법은 알지 못했다.

다만 운해는 달랐다.

태청신공으로 유형화한 구름이자 파도.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공력이라면 태극을 모르는 백무량도 굽히거나 접을 수 있었다.

“어느 쪽이 더 단단한지 볼까?”

“……후회하실 거요, 선배.”

자존심이 단단히 상하였는지 무극진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상태였다.

하지만 백무량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무당파의 무학이 원래 어떤 모습이었든 간에, 그것을 곤륜파의 무학으로 소화할 수 있다면 괜찮았다.

콰콰콰콰……!

굽히거나 접어 가며 운해를 단단하게 밀집시켰다.

형태가 일견 무식했지만, 백무량의 운용 또한 태극을 닮아 있었다.

그것이 무극진인의 마음을 더욱 상하게 했다.

“저런 것을 태극이라고……!”

“보기엔 좀 그렇지.”

백무량은 피식 웃고선 의념으로 운해를 일으켰다.

그 순간, 상단전이 뻐근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당장 쏘아 내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운해가 무너질 듯 위태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하나 더.’

분광뇌운결.

뇌기를 태극의 동심원으로 삼았다.

조금이라도 툭 건드리면 터질 것처럼, 뇌화(雷花)의 형태로 박아 넣었다.

그것을 위해 수경과 보타문의 금강, 공동파의 경파를 모두 운용해야만 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익힌 무학을 모두 집대성한 셈인데.’

과연 어떤 결과를 불러올 것인가?

백무량은 호기심을 끌어안은 채 운해를 앞으로 밀어 냈다.

콰르르르……!

뇌기를 중심에 둔 운해는 그야말로 재앙에 가까웠으니.

“……!”

무극진인의 표정이 삽시간에 진지해졌다.

전신의 내공을 모두 끌어내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태극혜검의 절초를 꺼내는 듯했다.

그 결과는…….

“맙소사.”

깊은 내상을 입은 무극진인이 허탈한 표정으로 땅을 내려다보았다.

“저런 것에…….”

태극이 깨졌다.

백무량이 중간에 운해를 수습하지 않았다면, 무당산의 지형이 바뀌고 무극진인의 목숨마저 위태로웠을 터였다.

이에 심천검이 무극진인에게 공감했다.

[선의로 보여 준 태극을 백정처럼 써먹고 있으니 통탄할 수밖에 없지.]

‘하지만 제가 무극진인의 태극을 깨지 않았습니까? 그럼 제가 우위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

심천검은 침묵했다.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깨지 못한 태극을 백무량이 깨 버리고 말았으니, 초식의 강력함만큼은 인정해야 했다.

무엇보다.

‘백련교주나 칠성교주를 죽일 만한 절초를 얻었으니, 무극진인에게 은혜를 입었군요.’

비록 태극의 현묘한 이치나 깨달음보다는 현상을 따라 한 것에 불과하나, 얻은 것은 크다.

백무량은 무당파의 태극에 가슴 깊이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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