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 (3)
문파 내의 모든 제자가 모여서 외치는 함성.
그 강렬한 소리가 백무량의 가슴을 때리는 듯했다.
단순히 도움을 받았다 정도가 아니라, 마음을 다한 경의라.
백무량은 잠시 말을 잊었다.
“……허.”
저도 모르게 흘린 감탄성에 모든 제자가 귀를 기울였다.
백무량의 모든 음성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화산파 내부가 고요했다.
과거 천덕꾸러기로 불렸던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정말, 정말로.’
저잣거리에 나도는 영웅담의 주인공이 된 것이 아닌가?
백무량은 오랜만에 사형과의 대화를 반추하며 복잡한 미소를 지었다.
감동하였다기엔 무언가 부족했고, 슬픔도 조금은 섞여 있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아서겠지.’
성화교의 염화를 패퇴시켰다고 하나, 백련교주와 칠성교가 남아 있다.
하물며 천마신교로 추측되는 노인은 또 어떻던가!
마음 한구석에 숙제처럼 남아 있는 이상 감동을 순수하게 즐길 수 없었다.
그러나 표현할 수는 있었다.
백무량은 칠지검협을 포함한 화산파의 도사 모두에게 느릿한 몸짓으로 포권했다.
그 포권을 따라서 모든 도사가 고개를 숙였다.
정문에서의 소란은 빠르게 끝났다.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이쯤 합시다. 싸운 시간은 한 식경도 채 되지 않는데, 온종일 존경을 받을 순 없으니.”
그저 단순하게, 백무량이 부끄러워했을 뿐이었다.
다실로 안내한 칠지검협은 백무량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보고 빙긋 웃었다.
“금모도왕에게 들었습니다. 후배께서 사실은 곤륜파의 옛 선배시라고요.”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 건 확실한 모양이군.”
“그만한 비밀을 숨기기도 제법 어려운 법이지요. 하물며 낭인의 입이야 워낙 가볍지 않습니까!”
칠지검협은 백무량에게 차를 권하고는 향후를 물었다.
“아직은 선배의 정체나 업적을 함구하고 있습니다.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왜 그랬나?”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시원하게 말하고 다니게. 구천검이 되살아났고, 마인을 쫓아다닌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성화교의 후인을 베었다고.”
백무량은 차향을 즐기면서 하려던 말을 이었다.
“지금의 강호는 장문인이 보기에 어떠한가?”
“혼란스럽지요.”
“마인의 강함은 상궤를 넘어섰고, 웬만한 고수가 아니면 대적하기가 불가능하지. 무력하다고 느끼는 무인이 한둘이 아닐 거야.”
“……음.”
칠지검협으로선 의표를 찔린 듯했다.
당장 화산파만 하더라도 수많은 문외제자가 도움을 요청하곤 했으니까.
다른 구파일방이라고 하여 사정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마교라는 단어가 가져오는 두려움이란, 보통 그러했다.
“당장 민란이 일어날지도 모르지요.”
칠지검협의 말에 백무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때문에라도 소문을 빨리 퍼트리는 게 나아.”
“……?”
“마인은 무적이 아니고, 그놈들을 찾아서 싸우고 다니는 고수가 있다. 그게 과거에 죽은 고수이며…… 하늘의 뜻에 따라 되살아났다면 몇몇 사람에게 용기를 줄 수 있을 거야.”
그 말에 칠지검협이 침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의심하는 자가 많을 겁니다.”
“그렇겠지. 곤륜파를 두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늘어날 거고, 나를 두고 미친놈이라고 할 호사가도 적지 않겠지.”
백무량은 담담한 어조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늘어놓았다.
하나 두렵지는 않았다.
끝까지 숨기고, 도망치다가 일어날 일보다는 차라리 의심을 받는 것이 낫다.
백무량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내가 바삐 움직여서 마인을 베고 다닌다면 의심은 줄어들 거고, 믿는 자도 늘어나겠지. 그때부터 반격의 시작이 될 거고.”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겠다는 말로 들립니다.”
“정확하게 들었군.”
칠지검협의 표정이 어둡게 물드는 것에 비해 백무량은 빙긋 웃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어차피 마인을 일소하는 건 해야 할 일이었어.”
“화산파도 돕겠습니다.”
“그거야 당연한 거지! 뒷짐 지고 구경이나 할 생각이었나?”
칠지검협에게 농담을 던진 백무량은 매화비원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매화비원의 영기를 흡수했던 염화.
그 균형이 깨지자, 홀연히 나타났던 사내.
백무량의 이야기를 듣던 칠지검협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변했다.
“이야기를 들으니…… 매화동인 진무월이 아닙니까?”
“통성명할 여유는 없었어. 그냥 뒤에서 지켜봤을 뿐이지.”
지금 떠올려도 사내, 진무월의 무공은 아름다울 지경이라.
백무량의 상세한 설명에 칠지검협도 이야기에 심취한 소년처럼 이것저것 질문해 왔다.
매화검법을 펼치던 검로는 어떠하였는지.
후인에게 남기려던 말은 없었는지.
대부분은 대답하기 어려웠으나, 단 한 가지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겉핥기 정도긴 하지만, 자기 무공을 보고 화산의 제자에게 전해 달라고 했지.”
“……아직 기억하고 계십니까?”
“물론.”
그 말에 칠지검협의 안색이 환해졌다.
과거,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던 매화동인 진무월.
그가 완성한 무학을 전해 들을 생각에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듯했다.
백무량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손가락 세 개를 폈다.
“사흘.”
“……?”
“그 안에 무공을 전수하고 무당산으로 떠날 생각이네.”
삼 일이라.
촉박하게만 느껴지는 시간에 칠지검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흘로 되겠습니까?”
“나도 정확하게 본 것은 세 초식 정도밖에 되지 않아. 그래도 그거면 충분할 것 같으니…… 하루에 한 초식씩이라면 괜찮겠지.”
백무량은 자신 있게 말했다.
사실, 염화와 싸우기 전이라면 이런 말도 꺼내지 않았을 터였다.
이해는커녕 보는 것만으로 벅찬 것이 진무월의 화검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염화와의 생사결 도중에 도달한 경지.
그곳에 도달한 순간, 진무월의 무학도 어느 정도 보이는 것이 있었다.
‘그걸 설명해 주면 화산파 전체의 무공이 늘어나겠지요?’
[시간만 있었다면 홀로 성신을 부술 정도의 사내였으니, 그 일면으로도 충분할 거다.]
‘역시.’
심천검과의 대화를 마친 백무량은 칠지검협과 시선을 마주했다.
“일단은…….”
“일단은?”
“조금 더 쉬고, 정오가 지난 뒤에 가르쳐 주지.”
“…….”
칠지검협의 침묵을 뒤로하고, 백무량은 처소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
사흘 뒤.
백무량은 약속했던 시간을 끝으로 화산에서 내려갔다.
오랫동안 곤륜산을 비워 둘 수도 없을뿐더러…… 애초 계획보다 시간을 더 쓰고 말았다.
‘원래대로라면 어제 무당산에 도착해야 했는데.’
진무월의 무공을 알려 주기 위해 최소한 할애한 것이 사흘.
그동안 화산파의 도사를 가르치면서 많은 것을 복기했다.
아직 연마되지 않은 깨달음을 벅벅 문대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기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정돈하는 나날.
그렇지 않아도 현격했던 성장에 가속이 붙었다.
하루 전, 심천검이 저도 모르게 투덜댈 정도로.
[이제 마냥 갈구기만 할 수는 없겠군.]
심천검이 생전에 이루었던 경지와 백무량과의 거리가 이제 멀지 않다.
백무량은 그 사실에 만족하면서 히죽 웃었다.
‘선배한테 이제 뭐가 남습니까?’
[뭐라?]
‘정통 곤륜파의 무학 몇 가지만이 조금 앞서지 않습니까? 어린아이 곯려 먹는 노인장과 다를 게 뭡니까?’
[…….]
‘‘훈수도 이제 정도껏!’ 해 달라는 것이지요, 하하하.’
[세상에, 화산파는 이런 놈을 귀인으로 모셨다니!]
왠지 모르게 심천검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의 불평을 들으며 낄낄거리고 있자니, 내려왔던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백무량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누구시오?”
영준하게 생긴 화산파의 어린 도사.
아직 강호에 나가 본 경험이 없는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선망과 동경이 가득했다.
“저, 그게…….”
“무슨 일이더냐?”
질문은 던졌으되, 돌아올 말은 뻔하다고 생각했다.
평소 흠모하고 있었다, 이번 가르침은 잊지 않겠다는 둥.
한데 도사의 말이 예상 밖이었다.
“선배께서는…… 화산파의 진정한 귀인이십니다!”
“아니, 그거야 이미 많이 들었는데.”
“선배께선 여느 무림인과 다르게 책임을 지셨지 않습니까!”
어린 도사는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염화와의 사투부터 무공의 연원까지.
그걸 어찌 다 알았냐고 물어보니 범인의 별호가 익숙했다.
“금모도왕께서…….”
“염병할 놈.”
백무량의 욕지거리에 웃음을 터트린 도사가 다시금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건 이겁니다. 그냥 홀연히 떠나셔도 아무도 모를 것을, 선배께서는 신의를 지키셨다고요.”
“그야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말은 이렇게 했지만, 백무량은 내심 흐뭇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협의가 그늘 아래로 사라지던가!
한데 눈앞의 도사는 내려가는 자신을 찾아와서 감사하다고 밝히니.
무당산으로 향할 활력을 얻은 것만 같다.
백무량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다.
“어서 돌아가라. 화산파의 규율이 가볍지는 않을 테니.”
“알겠습니다!”
등을 돌린 도사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자기 뜻을 밝혔다.
“저도 언젠가 선배와 같은 무인이 되겠습니다.”
“열심히 정진하게.”
[왜 하필 이런 놈을?]
심천검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차오르려는 감정을 메마르게 했다.
백무량은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고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호광성의 북쪽.
남존무당이라 불리는 무당파를 향해서.
***
무당산에서만 볼 수 있는 경치가 있다.
화산처럼 날카롭지도, 곤륜처럼 높지도, 소림처럼 만인의 존경을 받지도 못한다.
그러나 무당파의 도사는 안다.
누구에게나 쉬이 보이지 않기에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가치가 있음을.
이제는 그것을 눈에 담지 못하는 도사가 있었다.
“……날이 밝은가, 아니면 어두운가? 도무지 모르겠구나.”
무당산의 노도사(老道士)가 침침한 눈으로 하늘을 보았다.
한때 별을 헤아리고, 천하와 당당하게 맞섰던 눈동자엔 기운이 다하였다.
“이제는 때가 된 모양이로다.”
노도사가 한탄하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낱 무부(武夫)가 도를 접하여 사(士)의 길로 접어들었고, 제법 괜찮은 인생을 살았다.
그러니 낙심할 것은 없다.
남은 제자를 위한 자리를 남겨 주고 떠나면 될 일이다.
노도사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강호로 나간 일대제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라.”
무당파의 장문인, 무극진인(無極眞人)의 엄명이 여름의 열기와 함께 강호를 질주했다.
이에 수많은 속가제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극진인이 누구던가!
강호십대고수이자, 장삼봉 이래로 무당파 무공의 정수를 이루었다는 도사!
그의 건강이 장문인직을 유지하지 못할 정도라고 하니 이상히 여길 수밖에 없었다.
“설마…… 낙매신검처럼 마교가 손을 쓴 게 아닐까?”
“에이, 이 사람아! 어디서 그런 재수 없는 소리를 하는가!”
강호에 수많은 입이 조잘거렸다.
어느 입은 무극진인의 용태가 중태에 가깝다 했고, 또 다른 입은 일부러 마교를 불러들이기 위함이라고 여겼다.
이 소문은 백무량의 귀에도 흘러 들어가니.
“나는 어째 가는 곳마다 시끌벅적하냐.”
사형이 남긴 안배를 보러 가는 길이 폭풍으로 향하는 길이 될 줄이야.
백무량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