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86화 (186/275)

복원 (2)

***

“……염화의 숨이 끊어졌다.”

청노가 음울한 목소리로 되뇌었다.

반드시 살아야 할 축, 대업을 성공으로 이끌 성화교의 존재가 스스로 자멸에 빠졌단 사실이 비애를 불렀다.

“수백 년을 기다려 왔거늘, 어찌 이런 식으로 망가진단 말인가!”

쿵!

청노의 주먹이 암벽을 후려쳤다. 산 전체가 흔들리는 충격에 새 떼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떠나갔다.

그 광경을 지그시 바라보던 칠성교주, 괴성이 침착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아직은 포기하기에 이르지, 성화교 말고도 그만한 열양공을 지닌 무인이 어딘가 있을 테니까.”

“그걸 어디서 찾는단 말이오!”

청노의 오갈 곳 없는 분노가 애꿎은 괴성에게 향했다.

“마를 되살리기 위한 불! 그것을 위해 성화교의 후인을 찾고, 지금까지 보살피고, 성지의 영기를 취할 기회까지 마련했소! 그런데 실패하는 것으로 모자라 죽어 버렸으니……!”

“화를 낸다고 달라지는 것이 있던가? 난 그렇게 생각지 않아.”

그 말과 함께 괴성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러자 저 멀리 떠나가던 새 떼가 저절로 목을 꺾으며 죽어 나갔다.

투둑, 투두두둑.

새들의 사체가 비처럼 떨어지는 모습에 청노가 입을 다물었다.

분노로 인해 좁아졌던 시야가 넓어지니 괴성의 표정이 보였다.

‘내가 저놈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오직 대업만을 위해 칠성교의 삼존을 버리는 패로 쓴 당사자가 눈앞에 있다.

그런 괴성의 표정은 자신 못지않게 일그러져 있었다.

“내가 염화를 대체할 무인을 찾을 테니, 자네는…….”

“알고 있네.”

대업을 위하여.

두 마인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

잠에서 깬 백무량은 자연스레 눈을 비볐다.

얼마나 깊게 잔 것인지 시간을 가늠하는 감각이 불분명했다.

‘이렇게 밝으니 낮이겠지.’

태평한 생각으로 상반신을 일으키니 그리운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아주 혼자서 모든 걸 다 하려고 들더구나.]

‘후배의 성장을 그런 식으로 매도해서야 추해 보일 뿐입니다.’

[뭣!]

맞장구를 치는 심천검의 목소리에 대견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 걱정스러움도 같이 자리했다.

[자칫 잘못하면 네가 무너질 뻔했다. 사문의 무공도 완성하지 못했는데 어딜 화산파의 검공을 흉내 내느냐?]

‘아니, 그게…….’

[하물며 상단전의 무리는 어떠하고? 여기가 매화비원이 아니고 적진이었다면 수백 번은 죽었을 것이다.]

‘그건 그렇지만…….’

[천운과 기적이 동시에 있었다. 하나라도 없었다면…….]

‘잔소리를 미리 준비라도 하신 겁니까?’

[예끼, 이놈!]

까마득한 선배에게 대체 어디까지 맞먹으려고 드는 건가!

심천검이 진노를 담아 외치자, 백무량도 장난기를 쏙 뺐다.

‘뭐, 저도 용태를 회복하면 복기하려고 했습니다. 실제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고요.’

화산파를 너무 믿은 실수.

그 실수를 떠올리자니 입맛이 썼다.

낙매신검에게 영단을 먹이기 전에 주변을 경계한다고 했지만, 곧바로 뒤따라와서 방해할 줄은 몰랐다.

‘아까운 사람이 죽었지요.’

진자충.

그는 죽어 가는 몸으로 자기가 맡은 책무를 다했다.

사실상 낙매신검의 목숨은 진자충이 지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후회는 언제나 뒤늦게 찾아오는 법.

백무량은 하늘을 가득 메운 매화의 비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내심…… 그를 전력에서 제외하고 있었습니다.”

무리도 아니다. 사실은 당연하게 여겼다.

벽을 넘어선 것도 아니며, 마교와 대적할 특출 난 무공을 지닌 것도 아니다.

무림맹에 묶여 있는 점 또한 발목을 붙잡으리라 여겼다.

언젠가 반목할지도 모를 무인.

내심 그렇게 여기고 있었으나, 진자충은 행동으로 증명했다.

‘빚을 졌습니다. 제 무리에 그대로 따라 준 겁니다.’

낙매신검에게 영단을 먹이기 전에 주변을 완전히 수색했으면 어땠을까?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어쩌면 진자충이 죽지 않았을지도.

그러나 백무량은 곧바로 낙매신검을 깨워 진상을 알기를 원했고, 진자충은 백무량의 뜻을 따랐다.

그 사실을 지켜보았던 심천검이 백무량을 위로하듯이, 따뜻한 어조로 말했다.

[그 또한 네 판단을 믿었기에 사력을 다한 것이다. 보아라, 네가 만들어 낸 결과가 무엇이더냐?]

‘…….’

그 말에 백무량은 몸을 완전히 일으키고는 시야를 넓게 보았다.

염화와의 전투 이후의 결과.

그것은 완전히 복원된 매화비원과…….

“깨어났나?”

평온한 음색의 목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백무량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선홍빛 안색의 낙매신검.

주화입마에 빠졌던 무인처럼 보이지 않고, 도리어 내력이 증진한 것처럼 보였다.

진자충이 목숨을 바쳐 지켜 낸 남자의 얼굴이다.

백무량은 낙매신검에게 쾌활한 웃음을 보였다.

“영단의 덕을 크게 본 모양이오?”

낙매신검이 순간 어색한 표정을 짓고는 헛기침했다.

“크흠, 흠. 자네 덕분에 주화입마에서 빠져나오고 내공도 늘어났다네. 대체 어떤 영단이었나? 내가 동등한 가치의 영약으로 보답하겠네.”

“그 영단은 천하의 어떤 영약보다 귀한 것이네.”

“소림의 대환단보다도?”

“대환단일지라도 결국 사람의 손으로 빚어진 물건. 성지의 영기를 머금은 자연물보다 귀하지는 못하지.”

이 무슨 허세인가 싶어 낙매신검이 슬쩍 웃었지만, 백무량의 표정에 웃음 한 점 없었다.

실제로 무척 귀한 것이리라.

낙매신검은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는 백무량에게 다가갔다.

“허, 그렇게 귀한 것을 취했으니…… 주화입마에서 빠져나온 것도 이상하지 않군. 보답할 것조차 구하기 어렵다니 참으로 난감해.”

“보상을 바라고 준 것은 아니니까, 괘념치 말게.”

“……으음.”

백무량의 거듭된 하대에 낙매신검이 잠시 침음했다.

‘남천과는 다르게 어색해하는 게 보이는군.’

백무량은 속으로 웃음을 참고는 짐짓 무게를 잡았다.

“높은 배분을 가진 선배가 베푸는 온정이라고 여기게.”

“아니, 그게 무슨…… 염화와 싸우다 주화입마에 빠진 건가?”

“무슨 소리를!”

백무량은 씨익 웃고는 남천에게 밝혔던 바를 말했다.

“나, 구천검 백무량일세.”

“구천검이라면…… 백련교의 난에서 돌아가신…….”

“그래, 그 사람이 바로 나다.”

자연스럽게 팔짱을 낀 백무량이 공력을 운용했다.

순청하기 그지없는 태청신공의 내공이 콰르르 소리를 내며 전신을 휘둘렀다.

숨 쉬듯 이루어진 청운의 발현.

검선(劍仙)을 화폭으로 옮겨 놓은 듯한 광경에 낙매신검이 잠시 말을 머뭇거리더니.

“아무래도 마인과 싸우다가 상단전을 다친 모양이구나. 네가 어찌 예전에 돌아가신 백무량 선배란 말이냐?”

“……?”

“네 성취가 나보다 뛰어나고, 강호에 당해 낼 자가 없다는 것은 알지만 죽은 선배의 이름을 자칭하는 것은 옳지 않아.”

뒤이어 낙매신검이 구천검 백무량에 대한 전설과 일화를 줄줄이 설명했다.

백무량으로선 매우 당황스러웠다.

‘날 미친놈으로 보는데, 내 과거를 저렇게 칭송하니…… 무슨 장단에 맞춰야 합니까?’

[나라고 모든 걸 아는 것은 아니다, 후배야.]

그렇게 말하는 심천검의 목소리에도 웃음기가 가득했다.

[당황스럽긴 해도, 내 일은 아니잖느냐?]

‘배신감이 깊게 느껴지네요.’

한숨을 내쉰 백무량은 낙매신검에게 한두 마디를 덧붙였다.

“참…… 의심이 많구나. 남천은 쉬이 믿어 주었는데 말이다.”

“그놈이라면 네 상처엔 아랑곳하지 않고 재밌어하지 않겠느냐?”

듣고 보니 또 틀린 말은 아니다.

남천이라면 재미를 위해 미친놈과도 대화할 놈이니까.

백무량은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얼마나 긴 설명을 해야 할지 갑갑함이 몰려오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본 낙매신검이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농담입니다. 사실, 선배께서 깨어나기 전에 남천에게 들었지요.”

“남천이?”

“선배도 알다시피 그놈 성격이 워낙…… 비밀이 없지 않습니까? 얼추 듣기에 강호에 공표할 거라고 하던데.”

“……허.”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머금었다.

다음에 만나면 혼쭐을 내 주리라.

그 생각을 품은 채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어차피 세상에 말할 것이긴 했지. 며칠 먼저 안다고 해서 달라질 거야 없겠지만, 남천 그놈.”

“선배께서 일어나기 전에 도망쳤습니다.”

“썩을.”

백무량이 욕지거리를 중얼거리자 낙매신검이 유쾌한 표정을 지었다.

“농담은 여기까지입니다. 선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림맹이라도 왔느냐?”

“뭐, 직접 가시면 아실 수 있겠지요.”

그렇게 말하는 낙매신검의 표정에 무언가 후련함이 있었다.

언제나 곧은 심지로 매사를 딱딱하게 대하던 남자답지 않았다.

그 모습에 백무량은 자연히 남천의 변화를 떠올렸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사람은 큰일을 겪고 나서야 달라지는 것일까?

백무량은 자연스레 낙매신검을 앞서 걸어갔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화산파 중앙에 많은 사람이 도열해 있었다.

‘무림맹주, 그놈이 여기까지 온 건가?’

남궁진의 복잡한 심기를 떠올리자니 저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그 모습을 본 낙매신검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온후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설마 선배께 민폐를 끼치겠습니까? 농이 지나쳤다면 사죄드리지요.”

“그러면 누가 기다리고 있는 거냐?”

“그것까지 말씀드리면 재미가 없지요.”

“……남천과 조금 어울렸다고 똑같아져서는.”

백무량의 농담을 한쪽 귀로 흘린 낙매신검이 정문을 가리켰다.

도복을 가지런히 차려입은 도사.

그 위로 잘 닦인 화산파의 명패가 여름 햇빛에 번뜩였다.

백무량의 입가에 심드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누가 왔는지는 몰라도 대단한 사람이 왔나 보군. 화산파의 장로 정도 되는 고수가 문지기를 자처한 것을 보면.”

“뭐, 그렇지요.”

“끝까지 말하지 않겠다 이거지.”

백무량은 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을 내디뎌 앞으로 솟구치는데 그 기세가 아주 대단했다.

옆에서 함께 걷던 낙매신검이 순간 대응하지 못했을 정도.

정문 앞에 선 장로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 그림자 하나가 불쑥 솟구친 것과 같았다.

“……헉!”

염소수염의 장로가 놀람을 금치 못하고 숨을 한가득 들이쉬었다.

백무량이 보기에 장로의 숨이 넘어가는 게 아닌가 싶어,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뭘 그리 놀라나.”

“아니, 그것이…….”

“됐네. 누가 왔는지는 내가 확인하지.”

백무량이 손을 휘두르니 청운으로 이루어진 장력이 정문을 열어젖혔다.

끼이익…….

녹슨 경첩이 비명을 지르고, 문 너머의 시야가 조금씩 넓어졌다.

그와 동시에 많은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이한 일이었다.

정문을 향해서 화산파의 모든 도사가 기다리고 있는 듯했으니까.

백무량이 깜짝 놀라는 찰나에 뒤늦게 도착한 낙매신검이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같이 들어서지 그랬습니까.”

“이게 무슨 일이더냐?”

낙매신검은 대답하는 대신, 문 안쪽의 칠지검협과 시선을 마주했다.

이에 칠지검협이 큰 목소리로 외치니.

“화산파의 도사는 강호의 영웅이자, 매화비원을 복원한 귀인! 곤륜신성을 넘어, 청운선자(靑雲仙子)이자 곤륜검선 백무량에게 경의를 표하라!”

완전히 열린 문 사이.

화산파의 도사들이 백무량을 향해 외쳤다.

“화산의 제자가 귀인을 뵈옵니다!”

그 고함이 백무량의 귓전을 때렸다.

순간 귀가 머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큰 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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