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 (1)
백련교주로 인해 폐허가 되었던 매화비원.
그 대지 위에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 올랐다.
먼지로 뒤덮인 폐허, 마기로 잠식된 모래 먼지가 옆으로 밀려 난다.
자라난 싹은 순식간에 자리를 잡았다. 지나간 봄을 무색하게 만드는 생장이 경이로웠다.
폐허에 가까웠던 화원(花園)이 제 색을 되찾는 광경.
“……맙소사.”
백무량은 그 과정을 눈에 담았다. 잠시나마 염화의 죽음마저 잊힐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자라난 싹이 곧 나무가 되어 꽃을 피우니.
매화의 향취가 코끝을 스친다.
매화가 이미 지고도 남는 여름이다. 그러나 막대한 양의 영기는 매화를 영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콰르르르…….
그 와중에도 운룡의 문양은 영기를 끊임없이 쏟아 냈다.
염화가 흡수한 것을 도로 돌려놓겠다는 듯.
하늘의 알 수 없는 의지가 함께하는 듯하였다.
“……하, 이런 걸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남의 입으로 이런 광경을 듣는다면 무어라고 대답할까?
십중팔구는 허구라고 할 것이다.
더욱이 듣는 대상이 백무량이라면, 한바탕 욕지거리를 쏟아 내고도 남았다.
그러나 지금, 제 색을 되찾는 매화비원을 보라.
운룡이 건네주는 영기를 받아먹으며 재생하려는 의지는 또 어떠한가.
백무량은 그 광경이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끄으윽.”
염화와 싸우면서 줄곧 무리했던 상단전.
그 여파가 이제야 찾아왔다.
웬만한 고통엔 신음 하나 내지 않는 백무량이 스스로 움츠러들 정도였다.
‘충분히 정양하지 않고서야 움직일 수가 없겠어.’
그 생각에 백무량은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파릇파릇한 새싹의 정취, 영기를 머금고 피어난 매화의 향이 재생력을 북돋는 듯했다.
굳이 비교하자면 저번에 찾아왔던 때보다 두세 배.
바람에 따라 흩날리던 매화잎이 백무량의 정수리에 내려앉았다. 영기를 한가득 머금은 것이 백회혈을 통했다.
전신을 한차례 휘도는 청량함이라.
‘……정정해도 되겠군.’
오랫동안 정양하지 않아도 이곳에 있다 보면 금세 치유될 것 같았다.
백무량은 몸을 완전히 뒤로 누였다.
먼지 더미에 불과했던 폐허가 영기로 다시 성지로 탈바꿈하니 팔뚝 어름에서 촉촉한 물기가 느껴졌다.
치열한 싸움이 끝나고 찾아올 평화란 이런 것일까?
이 사소한 감정에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웃었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커다란 벽을 넘어선 지금.
눈을 감아도 뜬 사람보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경지가 있다. 잠깐이지만 마주했던 진무월도 이러한 경지에 도달했을 터.
“정리는 잘되셨나?”
백무량은 여유로운 음색으로 물었다.
이에 가까이 다가온 사내 하나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는 넌 싸우지도 않은 사람처럼 보이는구나.”
금모도왕 남천.
그가 백무량 옆에 털썩 주저앉고는 매화비원의 재생을 망연히 지켜보았다.
“……이런 절경을 혼자서 보다니, 비겁하기는.”
마기로 인해 폐허가 되었던 성지가 제 모습을 되찾아 가는 과정.
화산파의 도사가 아니더라도 평생 기억하고 남을 광경이다.
남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놈은?”
“베었지.”
“허, 전에는 존댓말이라도 꼬박꼬박하더니만, 이제는 그러지도 않겠다?”
“그야, 이제 숨길 이유가 없으니까.”
“……?”
남천의 시선이 백무량의 얼굴을 따갑게 두드렸다.
이게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약간의 호기심과 의심이 느껴졌다.
그러나 백무량에게 있어 지금의 순간은 칠 년이라는 기다림이 있었다.
구천검 백무량.
칠십여 년 전의 자신이 되살아났음을 알리고, 지금까지의 행적을 분명히 드러낼 자격과 강함을 갖추기까지 걸린 시간.
백무량은 남천에게 농담을 흘리듯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백련교의 난에서 싸웠던 구천검이야.”
“…….”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남천의 입술이 몇 번이고 달싹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구체적인 말을 잇진 않았다.
백무량으로선 다소 신기했다.
평소 그라면 욕지거리를 중얼거리거나 멱살이라도 잡았을 텐데, 이번 일로 무언가 달라지기라도 한 걸까?
백무량의 호기심이 질문으로 이어지기 직전에야 남천이 입술을 떼었다.
“……개소리하지 마라. 너도 무슨 마인 같은 거냐. 그럴 줄 알았다, 어쩐지 어린 나이에 너무 세더라, 죽일 놈.”
“……?”
“이런 소리를 처음에 하려고 했다. 정말이지, 누가 그런 소릴 믿어 주겠냐.”
남천이 낄낄 웃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상하지 않아. 네가, 아니 거, 선배께서 구천검이 아니면 굳이 마인을 찾아가며 싸우진 않을 테니까. 목숨을 버리고 싶지 않은 한.”
“……그랬나?”
“낭인 중엔 백무량이 언제 죽나 내기하는 놈들도 있었다고.”
“듣기 영 거지 같은 소리네. 누가 그런 내기를 했지?”
“나중에 여기서 나가면 이야기해 주리다. 직접 찾아가서 담판을 보든지, 알아서 하고.”
남천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격전을 겪지 않은 듯, 백무량의 신색에 평화로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 안에 건드리기 힘든 비범함이 있었다.
남천은 직감했다.
자신이 본 가능성, 천애의 경지에 이 남자가 도달하였음을.
남천의 시선이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우리 구천검 선배께서는…… 틀을 벗어나셨구려!”
“그게 무슨 소리야?”
“얻어맞고 싶지 않으면 대접해 줘야 될 수준에 오르셨다, 이 말이지.”
남천의 장난스러운 웃음에 백무량도 껄껄 웃었다.
“앞으로는 나대지 않겠다?”
“뭐, 그래야지. 그건 그렇고…… 그 사실을 아는 이가 몇이나 있소?”
“다섯도 채 되지 않아.”
“그것참 영광스러운 일이오! 구천검 선배의 정체를 듣는 게 이 소졸이라니!”
“솔직한 심정으로는 사문의 제자에게 먼저 말해 주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어.”
“왜 그렇소?”
“옆에 있는 후배한텐 존중이 쥐뿔도 없거든.”
“하하, 나한테 바랄 걸 바라시오! 그래도, 선배 대접은 해 드리리다!”
남천이 크게 웃으니 백무량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달라졌군.’
처음 마주했던 남천이라면 무인의 법식이나 배분 따위는 모른다며 화를 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이번 싸움에서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강호의 배분이나 존중을 지키려는 모습이 보였다.
‘단순하게, 얻어맞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지만.’
당장은 남천의 변화가 기껍기만 하다.
백무량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치유에 힘썼다.
남천의 말마저 소음으로 들릴 만큼, 깊고 정심하게.
“……후우.”
백무량의 기도가 변화했음을 느낀 남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 누구랑 대화하고 있었냐.”
묻고 싶은 점이 많았다. 아니, 철로 빚어진 사내일지라도 지금의 백무량을 보면 입을 열어 물을 것이다.
어떻게 구천검 백무량이 되살아났느냐.
마교와 무슨 연관이 있느냐, 매화비원은 어떻게 되돌아올 수 있었느냐.
수많은 질문이 목젖까지 올라왔었다. 쏟아 내지 않은 것은 오로지 남천의 성정이 그런 걸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뭐, 나 대신 강호가 묻겠지.”
구천검 백무량의 귀환과 마교와의 싸움이라.
폭풍의 중심에 선 이상, 모든 이목이 백무량에게 향하리라.
남천이 백무량 옆에 앉아 호법을 서기 시작하니, 곧 저 멀리서 화산파의 도사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허……!”
“매화비원이!”
하나같이 입을 쩍 벌리고서는 경탄하는 기색이다.
금방이라도 고함을 내지를 모습에 남천은 인상을 가득 찌푸린 채 말했다.
“기분 좋은 건 알겠으나, 지금은 닥쳐라. 여기 영웅께서 몸을 다스리고 계신다.”
“……!”
그 말에 화산파의 도사들이 귀를 의심했다.
남천이 저런 말을 할 리가 없다. 어쩌면 그의 얼굴을 빌린 마인일지라도 모른다.
그 의문이 행동으로 이어지기 전에 낙매신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명의 강호십대고수가 만들어 낸 고요 속.
“……후우.”
백무량은 밤새워 깊은 호흡으로 내상을 다스렸다.
***
어둠이 지나니 빛이 찾아왔다.
비단 하늘의 색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낙매신검은 복잡한 표정으로 매화비원을 바라보았다.
“나를 위해…… 귀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구나.”
창룡비검 진자충.
그의 행적은 밝지만은 않았다. 호협한 모습 아래에 열등감이 있었고, 비무로써 그것을 해결하려고 했다. 잡음이 없을 수가 없었다.
다만 그 끝은 광명이었으니.
이 또한 어둠이 지나니 빛이 찾아온 셈이다.
마지막 순간에 진자충이 도달한 경지는 낙매신검보다도 높았을 터였다.
하물며 매화비원은 어떠한가?
‘짙어졌구나.’
매화비원에 흩날리는 매화잎은 사 년 전보다 더더욱 짙고, 향이 강했다.
외상뿐만 아니라 내상을 다스리는 데 효과가 컸다.
마치 염화와 싸운 백무량을 위해서라는 듯…….
‘마냥 기뻐하기에는 잃은 것이 너무나도 많다.’
하일화의 변절, 칠지검협을 비롯한 도사들의 부상.
매화비원이 재생하였기에 회복은 빠르겠지만, 심적인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으리라.
낙매신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자리 잡았다.
염화는 죽었으되, 그놈이 벌인 사건은 앞으로 화산파의 치부로 남을 터였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금모도왕?”
“……흥.”
콧김을 내뿜은 남천이 간단한 답을 내놓았다.
“당연히 공표해야지. 앞으로 화산파 말고도 성지를 지닌 문파가 습격당할지도 모르니까.”
“…….”
“화산파의 명예가 그리 중한가? 천하의 낙매신검이라면 그런 것쯤, 신경 쓰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오해요, 그런 것이 아니오.”
“그러면?”
“사 년 전, 매화비원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시오?”
그 말에 남천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매화비원에서 나타났던 백련교주.
그가 벌인 행각이야 동시대의 무인이라면 당연히 아는 일이다.
남천이 입술을 달싹이기도 전에 낙매신검은 하려던 말을 내놓았다.
“그때도 백 후배가 있었소. 세간에서는 내가 백련교주를 몰아냈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다르오. 사실상 백 후배가 홀로 백련교주를 막았으니까.”
“……뭐?”
“일부러 숨긴 건 아니오. 부탁이 있었소. 자기를 빼놓고 말해 달라는 부탁이었지.”
낙매신검의 말에 남천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때는 무게를 감당할 실력이 없었던 거군.”
“나도 그렇게 짐작하고 있소만, 이번에도 똑같은 말을 할까 싶어서 기다리고 있던 참이오.”
그 말에 남천이 씩 웃었다.
“굳이?”
“……?”
“지금이라면 그 마인 놈을 홀로 잡아 족칠 정도로 뛰어나니, 소문을 은폐할 이유가 없지.”
“본인한테 들어야 하지 않겠소.”
낙매신검이 침착한 음색으로 달래는 모습에 남천은 내심 답답함을 느꼈다.
‘아, 지금 확 까발릴까?’
백무량이 사실은 칠십여 년 전 구천검이라는 진실.
그걸 알게 되면 낙매신검의 표정이 뒤집히고, 앞으로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할 게 뻔했다.
그 모습을 상상하고 있자니 남천은 저도 모르게 히죽거렸다.
“클클.”
“……무슨 생각을 그리하시오?”
“아니, 아무것도.”
남천은 서둘러 표정을 수습하고는 옆을 곁눈질했다.
평온한 모습으로 잠이 든 백무량.
내상을 완전히 치유한 듯, 얼굴의 혈색이 불그스름했다.
가히 기적적이었다.
남천이 막 보았을 때는 상단전이 무너질 것처럼 균열이 심했으니까.
“일단은 차분하게 기다리시오. 아무래도 오랜만에 든 잠인 듯하니.”
“……그러지요.”
그렇게 대답하는 낙매신검의 표정이 묘했다.
‘천하의 남천이 저렇게까지 사람을 존중한 적이 있었던가?’
하물며 자기보다 훨씬 어린 백무량에게 저런 태도라.
낙매신검은 남천과 백무량을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