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력자 (5)
진무월의 걸음은 느렸다.
매화비원에서 일어난 격전, 화산파의 위험을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달라졌구나, 많이.”
시선이 익숙한 것을 찾아 헤맸다.
장문인 몰래 동굴을 뚫어서 지냈던 추억, 하늘이 매화로 물들었던 찬란함과 매화비원을 빽빽이 채우던 제자들.
백여 년 전, 시야를 가득 채우던 과거가 이제는 없었다.
그 무정함에 진무월은 씩 웃고 말았다.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었구나. 그토록 시간이 흘렀거늘, 달라지지 않았을 거라고 여기다니.”
하지만 지금처럼 매화비원이 망가지고 마인의 침입을 허용해서야, 당대의 장문인을 꾸짖고 싶어진다.
‘하나, 그 이전에.’
진무월의 눈동자가 매화비원 전체를 담았다.
사실, 많은 의문이 있었다.
어째서 죽은 자신이 이 시대에 현현했는가, 매화비원은 왜 망가지고 말았는가.
이 상황에 어떻게 연루되었는가, 하는 의문들.
평범한 사람이라면 발걸음을 망설였을 터였다. 제자리에 멈춰 서고 번민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진무월은 달랐다. 과거의 향취를 찾아보려는 미련함은 있었지만, 걸음에 담긴 확신은 굳건했다.
매화동인 진무월은 고민 한 점 품지 않았다.
“저놈이 나를 불렀구나.”
천이통의 이능이 속삭인다.
백무량이라는 무인, 도사가 가진 강함과 과거. 그의 손등에 새겨진 운룡의 정체까지.
그 모든 것을 한차례 곱씹고는, 진무월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는 크게 웃었다.
“그래, 좋다! 죽어서도 내 할 일이 남아 있다니, 하늘이 날 인정한 것 같구나.”
매화비원의 지맥, 영기가 기억하는 최강의 무인.
진무월이 한 걸음을 느긋하게 내디뎠다. 그러자 대지에 내리깔린 매화가 하늘로 솟구쳤다.
촤르르르…….
매화의 향 또한 위로 솟구쳤다. 잠시나마 매화비원이 제 영기를 되찾은 듯, 천하가 자하의 색으로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
두 남자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거리가 수십 보 넘게 떨어져 있었으나, 진무월이 발한 의념은 그만큼 강했다.
비처럼 쏟아지는 매화, 그 아래를 가득 메운 매화의 향…….
천하가 진분홍색으로 물드는 가운데, 매화잎은 진무월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않고 아래로 떨어졌다.
“산……신령인가?”
백무량이 순간적으로 멍청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의 시선에선 어찌 보면 당연한 판단이었다.
영기로 이루어진 사람이며 의념의 고수.
그것이 매화비원 전체를 마음대로 주무를 정도라면, 도저히 인간으로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생존해 온 염화는 놀라움에 어쩔 줄을 몰랐다.
“진……무월……!”
그 말에 진무월은 입술을 달싹였다.
“현시대에 나를 알아보는 이가 있어서 기껍다만, 그것이 마인이어서야 순수하게 기뻐할 수가 없다.”
그들과 거리가 무려 수십 보 이상.
육성으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을 정도이건만, 진무월의 말은 쉬운 어조로 똑똑히 틀어박혔다.
“나를 안다면, 응당 이름을 밝혀라. 한때라곤 하나, 강호제일검에게 경의를 보여라.”
“………으, 네놈.”
염화가 움츠러드는 모습에 백무량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여태껏 성신을 이루었다며 오만의 극치를 보이던 놈이 저렇게까지 약한 모습을 보일 정도라.
백무량은 공력으로 목소리를 돋웠다.
“화산파에 은둔 고수가 있으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허, 은둔 고수라.”
진무월이 피식 웃었다.
자기가 영기로 이루어졌음을 앎에도 저렇게 모르는 체하는 모습이 귀엽고 우습기만 했다.
“하늘의 뜻을 이은 자치고는 말과 행동이 잔망스럽다. 어차피 현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으니, 편하게 대해라.”
그 말에 백무량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진무월의 시선이 다시 염화에게 향했다.
“자, 그러면 이제 토해 낼 시간이다.”
“……!”
염화가 순간적으로 쌍수를 모았다. 영기와 마기, 두 기운으로써 성신을 이룬 자답지 않게 볼썽사나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백무량의 착각이었을 뿐.
“눈치가 빠른 놈이로다.”
진무월의 어조가 느릿했다. 하지만 그의 의념은 누구보다도 빨랐다.
태청신공의 공력을 두른 백무량조차도 따라가지 못한다.
조금 전, 하늘로 솟구쳐 떨어졌던 매화잎이 염화를 향해 쇄도했다.
하나같이 검기를 이룬 채 천변만화(千變萬化)하니.
염화가 아무리 성신을 이루었고, 마도의 극에 이르렀다고 한들 모든 것을 쳐 낼 수 없었다.
개중에는 눈이나 백회혈을 노리는 것도 있었다.
“크윽……!”
염화의 입가에서 패색 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금강석일지라도 틈새에 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점차 금이 가듯, 성신의 진체도 반복된 충격을 이기지 못했다.
이에 진무월의 의념이 구체적인 표상(表象)을 그렸다.
“……아.”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현재 화산파를 대표하는 이십사수매화검법.
그 모든 초식의 심상이 재현되었다.
매화비원이 현재 메마르고 마기에 더럽혀졌을지언정, 진무월이 존재하는 한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 정도였다.
“검이…… 필요하지 않아.”
진무월은 검 없이 검을 다룰 줄 알았다. 실로 그러했다.
대지에 있는 매화잎 한 줌으로도 이십사수를 펼칠 줄 알았으니, 의념이 담긴 샘물이 마르지 않았다.
백무량은 그것을 눈에 담았다.
심천검과는 판이하게 다른, 하지만 극점에 이른 검법이 검해의 심상과 상단전에 알알이 새겨졌다.
바로 그때, 진무월과 눈이 마주쳤다.
[훔쳐 가려느냐?]
어딘가 짓궂은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진무월이었다.
저만한 심상과 의념을 다루고도 전음을 보낼 여유가 있음에, 백무량이 잠시 전율했다.
[아닙니다, 저는…….]
[변명하지 마라. 네 무재라면 그러할 수 있음을, 처음 보자마자 꿰뚫었다. 곤륜의 무학으로 뺏어 갈 생각도 품고 있지 않더냐?]
[…….]
백무량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속내가 완전히 읽혀 버린 것 같아서 얼굴이 붉어졌다.
그것을 본 진무월이 피식 웃고 말았다.
[솔직해서 좋다. 하면 나도 솔직하게 말하마.]
[……?]
[내 주변에 화산의 제자가 한 명도 없지 않으냐? 하면 내 무학을 담을 눈구멍이 너밖에 없다는 소리다. 전해 줄 입도 하나뿐이지.]
[……그렇다면.]
[잘 보고 훔쳐라. 어차피 남은 시간은 얼마 없으니.]
그렇게 말한 진무월의 몸이 순간 흐릿해지는 듯했다.
별수 없는 일이다. 염화에게서 샌 영기가 우연히 진무월의 형상을 그렸고, 넋을 불러들였을 뿐이니까.
하지만 세간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말한다.
기적.
화산파의 성지, 매화비원이 스스로 살아남기 위하여 일으킨 기적.
진무월은 매화잎으로 만들어진 검을 쥐었다.
염화와의 거리는 이제 두세 걸음.
검법이 닿기에는 충분한 거리이기에, 진무월이 검을 휘둘렀다.
“매영조하(梅影造河).”
매화가 만든 그림자가 강을 만들어, 염화가 백무량에게 멀어지도록 만들고.
“매향성류(梅香成流).”
매화에서 발해진 향기가 물결을 이룬다. 하나하나가 진무월이 빚어낸 검기, 서로를 맞무는 조화.
진무월의 검이 춤을 춘다.
“매인설한(梅忍雪寒).”
맞물린 매화가 서로 얽혀 일대 장관을 이루고, 눈의 차가움마저 견딜 만큼 단단해진다.
끝내, 염화의 팔뚝이 끈 떨어진 연처럼 바닥에 뒹굴었다. 성신을 이룬 그릇이 한계까지 닳아진 셈이다.
이윽고 검첨이 염화를 향했다.
“종래(從來), 매화 한 떨기의 향이 만 리를 걸으니.”
이를 매화만리향(梅花萬里香)이라고 한다.
진무월의 눈동자가 새하얗게 일변했다. 영기로 이루어진 육신에 자하신공의 대주천이 이루어졌다.
한 바퀴, 두 바퀴, 가속하여 세 바퀴.
진무월에게 있어 좌선좌공과 동공의 구분은 없었다. 그런 것쯤, 강호제일검을 칭하기 전에 완성하였다.
세 번의 대주천을 이룬 검이 염화를 향한다.
“여기서, 이렇게……!”
염화의 입가에서 애통한 감정이 너울졌다.
성신을 이뤘으나 백무량에 의해 균형을 잃었고, 매화비원이 불러들인 진무월에게 죽을 판국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마지막 초식 하나가 부족할 줄이야.”
진무월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몸과 넋을 유지하던 영기가 바닥을 보인 것이다.
염화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쌍장을 앞으로 뻗어, 진무월을 이루는 영기를 무리하게 빨아들였다.
그러나 진무월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없었다.
자신이 끝내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아니, 자신의 무학을 눈으로 보고 익힌 후인이 있기에 더더욱 든든하다는 웃음이 있었다.
[네가 해라.]
진무월의 마지막 전음이 백무량의 귓전을 간지럽혔다.
이에 백무량은 잠시 눈을 감았다.
진무월이 펼친 것, 보여 주려고 한 것, 백무량이라는 후배를 위해 펼친 의념과 초식 들.
모든 모습이 백무량의 내면에 새겨졌다. 검해의 심상과는 달리, 오직 백무량만이 익히고 배운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염화가 오해를 품었다.
뒤이어 그의 얼굴에 비웃음이 잡혔다.
“너를 도와줄 사람이 사라졌구나.”
“…….”
백무량은 말없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진무월이 나타나면서 짙어진 매향은 사라졌다. 매화잎 또한 언제 그랬냐는 듯, 대지에 안착했다.
‘겨우 일다경에 불과한 기적이었나.’
반대로 말하자면, 진무월은 일다경 만에 염화를 죽일 수 있었다.
백무량에게 자신의 무학을 보여 주려는 생각이 없었다면, 일초반식에 죽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백무량의 어깨에 무게가 더해졌다.
진무월 대신 염화를 죽이고 화산파의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내려야 한다는 책임감이었다.
“가벼워.”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멸문할 뻔한 곤륜파의 명예를 되찾고, 마교와 대적한다는 운명에 비해 진무월이 맡긴 숙제는 가볍기만 했다.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일에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
백무량의 표정에 담긴 미소에 도리어 염화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냐, 그 모습은…… 네가 진무월인 줄 아느냐?”
“아니, 다르지.”
다만, 백무량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청운을 일으켰다.
“그래도 비슷한 거라면 나도 할 수 있겠지.”
백무량은 진무월의 무학을 떠올렸다.
천변만화. 그 단어가 찰떡처럼 달라붙는 무공이었다.
매화검법의 극의, 화검의 극치.
수백의 매화잎이 이십사수의 초식을 그리며 장구한 선을 이어 가는 모습은 평생 기억에 남을 절경이었다.
그것을 보며 틀이 부서지는 듯했다.
구천화우검에 담긴 아홉 초식의 형태가 부서지는 감각.
그 감각을 느꼈을 때, 매화만리향을 펼치던 진무월이 전음을 보내왔었다.
[그것이 옳다. 네 직관이 나아가는 곳으로 향해라.]
화산파와 곤륜파.
다른 문파라는 차이가 있음에도 진무월의 전음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자기를 믿고 나아가 보라는 의지가 느껴졌다.
[내 가르침은 화산파의 가르침이나 마찬가지니, 허튼 데에 쓰지는 마라.]
진무월의 목소리엔 얄밉다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평생 연단한 무학을 홀랑, 그것도 다른 문파의 후배에게 남기는데 아무런 감정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백무량의 검은 더욱 높은 곳으로 향하니.
‘닿았다.’
백무량은 천애에 있는 계단, 맨 아래의 돌에 손끝이 닿았음을 느꼈다.
그 감각에 온전히 몸을 맡기니.
백선신검의 칼끝에서 펼쳐진 초식은 뜻밖의 것이었다.
“구천화우검의 일초, 균천관일.”
“……!”
염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