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82화 (182/275)

조력자 (4)

심천검과 백무량, 두 고수의 분심(分心).

백선신검과 운검으로 펼쳐지는 두 섬광.

호천풍연의 검경에 주천암성의 암경이 조화를 이루니.

각 초식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뛰어넘는다. 서로 부족한 곳을 채우고 더욱 강력해진다.

콰르르……!

검의 간격을 아득히 뛰어넘는 거대한 상흔.

거인이 내리친 듯한 일격에 땅거죽이 갈라지고 대기가 분절된다.

태청신공의 청운.

공력으로 이루어진 구름에 숨길 수 없는 괴리가 있었다.

[아직은 미숙하고, 손볼 데가 많지만……!]

누구도 도달하지 못하였던 천애(天涯).

그 경지에 가까워질 실마리를 잡았음을 심천검과 백무량은 직감했다.

뒤이어 가슴 한구석에 강한 성취감을 끌어안았다.

그러나 그 성취감은 옷이 폭우에 젖어 들듯, 금세 쓸모없는 것으로 변모했다.

“대단하다. 실로, 실로 깨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조금씩 내려앉는 먼지 안쪽에서 피어오르는 검붉은 안광.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오른 손목을 주무르다가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잠시나마 고개를 들이밀었던 석양이 금세 어둡게 변했다.

백무량의 마음 또한 그러했다.

‘통하지…….’

않았다.

사상 초유, 사문의 전대 고수인 심천검과 함께 펼친 조화의 일 초가 염화에게는 무용했다.

이제 더 꺼낼 수 있는 패가 있던가?

백무량은 머릿속에 새겨 두었던 방도를 하나둘씩 되새김질했다.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방금 펼친 일 초보다 강한 초식은 없었다.

그것을 상대가 모를 리가 없었다.

“모든 공력을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두 개로 나누어 조화롭게 합일하니…… 천하가 무너지는 듯했다. 강호십대고수란 놈들이 펼치는 것보다, 더 강렬했어.”

그렇게 말하는 염화의 장포에 상처가 가득했다. 특히 상반신은 완전히 찢겨져서는 반라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안쪽.

살갗이 이제 막 씻어 낸 것처럼 깨끗했다. 부옇게 피어오르던 먼지마저 침범하지 못한 듯했다.

백무량의 표정을 본 염화가 못을 박듯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 성신(聖身)의 진체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경의는 표하지, 순간 성신의 완성을 의심할 정도였으니까.”

발판 혹은 시험.

염화의 태도는 백무량을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매화비원의 지맥과 영기는 염화가 흡수하였으며, 마기와 합일을 이뤘다.

사실상 이제 마인으로 명징할 수 없는 존재로 거듭난 셈이었다.

염화가 초월자처럼 구는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시간을 더 주지. 어떤가? 그 검을 완성한다면, 성신을 부술지도 모르지 않나?”

“…….”

백무량은 대답을 유보하고서 염화의 눈을 살폈다.

그 아래, 눈두덩의 떨림과 호흡, 경맥의 흐름까지 파악했다. 상단전에 터질 듯한 압력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뒤이어 입술을 자그맣게 열고는.

“좆 까.”

상스러운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염화를 노려보는 백무량의 눈에 한가득 분노가 어렸다.

“마인 놈이 감히 곤륜도를 속이려고 드느냐!”

검해를 잇고, 운룡의 문양을 가진 백무량에게는 보였다.

심천검과 함께 펼친 일 초를 얻어맞고 분리된 영기과 마기가 서로 상충하고 있음이.

이미 성신의 진체를 완성했다느니, 통하지 않았다는 것은 단순한 허세에 불과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도자기.

그것이 염화의 현 상태이니.

백무량의 눈썹이 팔자로 휘자 염화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천명을 이은 도사라더니, 쉽게 놓아주질 않아. 하지만 네 몸을 보아라. 이미 그 일 초로 한계에 달하지 않았느냐?”

염화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방금 펼친 일 초로 상단전이 깨질 듯이 아팠고, 무한할 것만 같던 공력은 바닥을 드러냈다.

상황이 이러하니 심천검의 목소리도 백무량에게 닿지 않았다.

그저 고통이 가중될 뿐이었지만, 백무량은 말없이 검을 쥐었다.

‘정말 오래간만이군.’

언제나 심천검의 의견을 묻거나 의사를 타진하고는 했다.

고독을 떨친 시간이 제법 길었다.

지금처럼 홀로 싸우던 때가 옛날처럼 느껴질 정도로.

“……후우.”

백무량은 호흡을 고르며 무뎌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생각은 간략하게, 그러나 얕지는 않게.

과하게 내쉬려는 호흡을 차분하고 깊게, 전신을 관조하듯이.

찰나 동안 감았다 뜬 눈에 시퍼런 안광이 자리 잡았다.

자기 자신을 속인 암시(暗示)에 불과했으나 태청신공과 운룡의 문양은 백무량의 몸을 안정화했다.

그것을 본 염화의 표정이 굳어졌다.

“천명이 있다고 한들, 겨우 수십 년을 살았을진대.”

무림에서 수백 년을 암약해 온 세 마교와 싸운다?

하물며 백련교주는 대의에서 전혀 상정하지 않았던 괴력난신.

그놈까지 적으로 돌리고도 몸을 사리지 않는다. 도리어 의지를 불태우는 모습이란, 염화에게 있어 불가해한 광경이었다.

“목숨이 아깝지 않더냐?”

멸문에 가까웠던 곤륜파를 되살릴 정도의 재능.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선망하고 질투할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저렇게까지 행동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염화가 보인 의문에 백무량은 행동으로 답했다.

퉁.

운중용형보에 뒤섞인 수경(水經).

아미복호검에 내재된 무학이 보신경에 녹아내리니 파사의 공능이 염화를 압박했다.

‘단숨에 몰아쳐야 한다.’

백무량은 이를 꽉 앙다물며 염화에게 검을 휘둘렀다.

조금이라도 주도권을 잃으면 염화의 반격이 들어올 터.

조화의 일 초를 버텨 낸 육체가 어떤 살초를 펼칠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파지직!

좌수에는 분광뇌운결로 이루어진 뇌화, 우수에는 구천화우검.

두 무학이 염화를 향해 펼쳐졌다. 극에 이른 분심조화결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그에 비해 염화는 어떠한가?

백무량의 시선이 염화의 쌍수에 꽂혔다. 척 보기에는 적수공권에 가까우나 흡성대법의 묘리가 가득했다.

그렇게 두 무인은 서로의 무기를 확인하고.

꽈과광!

백무량의 좌수가 번개를 뿌리면 염화가 성신의 육체로 버티며 전진했다.

무식하기 그지없는 전법이었으나 그만큼 무서운 것이 없었다.

백무량은 그것을 보며 침묵했다.

“…….”

갑작스러운 생각이지만.

염화에게서 ‘감사함’이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무공은 수단이었고, 차가운 날붙이였다.

자신의 절기를 갈고닦는 혼(魂)과 고민, 조예(造詣)가 없었다.

백무량은 무심한 얼굴로 염화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이런 상대가 낫다.’

운산보주처럼 내막이 있다거나, 어쭙잖게 사연이 있는 적보다는 낫다.

상대방의 연약함이나 과거를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온 힘을 다해 전력으로 부딪쳐도, 마음이 무거워지지 않는다.

백무량의 좌수에 청운이 깃들었다. 염화의 사혈을 향해 휘둘러지는 기세에 의념이 담겼다.

그렇게 의념이 담긴 쇄혼권(碎魂拳)은 평소보다도 무거웠고, 둔탁했다.

염화가 본능적으로 쌍장을 교차했다. 본능적으로 그는 성신의 진체에 생길 균열을 떠올렸다.

파아앙……!

바위가 부서지고, 흙무더기가 무너졌다.

쇄혼권과 염화의 쌍장이 부딪치며 봉우리 한쪽이 무너졌다.

하나 두 남자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백무량의 눈동자가 깊고 어둡게, 그리고 고요하고 차갑게 가라앉아 갔다.

“……큭!”

위기를 느낀 염화가 반사적으로 반보를 밟아 옆으로 휘돌았다. 본능이 막기보다는 회피를 택했다는 뜻이었다.

백무량과 같은 무인을 항상 하수로 생각했기에 내심 굴욕스러웠지만, 머리는 냉정했다.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 백무량은 이미 일 초로 성신을 이루는 균형을 부순 바가 있다.

염화의 소매가 크게 부풀었다.

성신의 진체를 이루면서 찾아온 변화.

합일을 이룬 공력이 성화백유장을 펼쳤다.

화르륵!

초록빛 풀 무더기가 순식간에 재가 되어 흩날릴 정도의 열기.

백무량일지라도 온전히 막지 못했다. 청운으로 전신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전신에 화상을 입었을 터였다.

‘최대한, 빨리!’

백무량의 집중과 기량이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

염화의 강맹한 열양공을 쳐 내면서 구천화우검의 절초를 끊임없이 펼쳐 냈다.

그것이 어언 삼십여 초.

분심조화결과 태청신공을 익히면서 쌓은 결실이 빛이 발하는 때였으나 백무량의 내심은 급박하기만 했다.

‘방금과 같은 장법을 저놈이 계속해서 펼치게 두어선 안 된다.’

반드시 필패한다. 가능성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운 직감이었다.

그것을 바꿀 수 있는 건 역시…….

‘심천검과 함께 펼쳤던 초식처럼, 성신이라는 그릇을 깨부술 강력한 절초.’

솔직하게 말해서 확신은 없었다. 상단전에 크게 무리가 간 이상, 의념을 제대로 끌어 올리는 것조차 버거웠다.

하지만 이대로 패배하기 위해 되살아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발버둥 칠 뿐.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꽉 쥐었다.

***

이대로라면 백무량은 패배한다.

심천검은 냉정한 시각으로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후배의 기량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다만…….’

염화가 이뤘다고 말한 성신.

그 육체의 단단함과 재생 능력이 상궤를 넘었다.

백무량이 하나의 초식을 펼칠 때마다 소모하는 힘이 너무 컸고, 그에 반해 염화가 회복할 수 있는 체력은 아직 많이 남았다.

지금 당장은 곤륜 무공의 심유함으로 버티고 있다지만, 이백 초가 넘으면 어찌하랴.

‘그나마도 처음 펼친 일 초가 아니었다면, 금세 졌겠지.’

사실상 칠성교주와 동격이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

백무량이 앞으로 저런 마도 고수를 상대로 압도하려면 천애의 경지에 오를 필요가 있었다. 지금처럼 일 초에 상단전이 무너져서는 안 됐다.

‘무량아…….’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염화가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내길 고대하며, 심천검은 ‘성신’이라는 것을 자세히 살폈다.

여기서 제거하지 못한다면 다음에 또다시 싸워야 할 테니까.

심천검의 온 신경이 백무량과 염화에게 향해 있던 그때.

휘르르…….

매화비원의 한구석에서 이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

구파의 장로라면 한 번쯤 품는 의문이 있다.

‘성지란 무엇인가?’

어쩌다가, 무슨 연유로 생긴 것일까?

하물며 모든 문파에 성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개파조사조차 우연히 찾아서 상징으로 삼은 경우도 허다했다.

하물며 검해는?

누가 만들었을뿐더러, 어떻게 그것을 계승시킨단 말인가?

하나같이 의문투성이.

누구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

영기가 자욱하고, 문파의 무학을 궁구하며 익히기 좋은 환경이라는 것이 공통점일 뿐이다.

그렇다면 매화비원은 어떠한가?

상처를 치유하는 매화, 매화검법의 진수를 비추는 심상.

이것만이 전부였을까?

쏴르르…….

염화의 마기와 합일을 이루었던 영기가 백무량의 일 검에 균형을 잃고 스러지기 시작했을 때.

과거 백련교주가 나타났던 공간에서 조금씩 유형화하는 사내가 있었다.

“……음.”

어딘가 반투명한 모습,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한 존재감.

화산파의 도사 이전에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실상 염화가 흘린 영기가 우연히 빚어낸 귀신.

겨우 그 정도인 존재일진대.

사내의 고개가 불현듯 옆으로 돌아갔다.

생전에 이루었던 천이통(天耳通)의 이능이 제대로 발휘됐다.

“마인이 사문의 성지에 발을 들이게 만들다니.”

게다가 마인을 막는 것이 화산파의 도사가 아니라, 이립도 채 되지 않은 젊은 놈이 아니던가?

복잡한 미소를 머금은 사내가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것만으로 땅바닥에 깔려 있던 수십의 매화가 검의 형상을 이루었다.

“검 없이 상대하기엔 단단한 놈이로다.”

마인의 상태를 알아차린 사내는 백무량과 염화가 있는 곳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매화동인 진무월.

사내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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