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색 (4)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낙매신검에게 영단을 먹이는 사이 접근한 두 마인, 칠지검협에게 펼쳐진 흡성대법.
‘진 선배가 마지막에 보여 준 망아의 일 초는 죽음을 불사한 일 초였어.’
머릿속이 무언가로 끓어오르는 듯해 백무량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은 조금씩 흐려지다가, 종국에는 멎었다.
그동안 심천검은 아무런 말도 붙이지 않았다. 사소하지만 큰 배려였다.
“일단은…….”
백무량이 메마른 목소리로 서두를 떼었다.
“수습하고 갑시다. 그놈들이 거기로 간 이상, 화산 안쪽으로 기어간 셈이니.”
[그래야지.]
상대가 도망칠 수 없는 방향으로 갔다면, 진자충의 시신을 수습할 여유는 충분하다.
심천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백무량은 암자로 되돌아갔다.
고수답지 않은 불규칙한 걸음걸이.
흔들린 마음이 그대로 묻어 나오는 듯했다.
끼이익.
암자의 문이 열리니 눈을 감은 채 웃고 있는 진자충의 얼굴과 전신에서 땀을 줄줄 흘리는 낙매신검의 모습이 보였다.
바로 그때,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일이냐?”
처소에서 쉬고 있겠다던 남천.
그의 음성에서 숨길 수 없는 동요가 드러났다.
“강대한 기운이 느껴져서 왔건만, 이게 대체.”
“낙매신검의 주화입마를 살피던 중에 적이 나타났습니다. 진 선배는 그들과 맞서 싸웠고, 이렇게 되었습니다.”
백무량은 치미는 분기를 애써 억눌렀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지만, 감정에 휘둘려서는 안 되는 때.
그때가 지금이었다.
그 모습을 본 남천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했다. 그 분노는 잘 갈무리해서, 적한테 쏟아 내야 해.”
과연 강호십대고수다운 관록인 걸까?
어째선지 저 말이 백무량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과 동시에 터질 것만 같던 머릿속을 삽시간에 비워 줬다.
그사이 남천이 낙매신검과 진자충을 살폈다.
“낙매신검은 한 식경 내에 일어날 것 같고, 이 친구는…… 몸이 굳기 전에 정돈해 두고 가지.”
스윽, 슥.
남천은 아무렇지 않게 진자충의 시신을 정돈했다.
엉거주춤했던 자세를 곧고 바르게. 관에 그대로 넣어도 될 정도였다.
일련의 과정이 너무나도 익숙하여 마치 장의사를 보는 듯했다.
그때 남천이 옛일을 입에 담았다.
“낭인으로 살다 보면, 하루의 인연으로도 백 일의 책임을 질 때가 있기 마련이지. 우습지 않나? 호광성에서 죽은 놈을 산동성의 촌구석까지 데려다준 적도 있다네. 하루에 수십 번씩 버리고 갈까, 고민했지.”
“표국에 맡기면 되지 않았습니까?”
“그게 다 사연이 있었어. 일일이 설명하면 기니까, 생략한 거야.”
거기까지 말한 남천이 피식 웃으며 백무량의 신색을 살폈다.
“이제 조금 진정이 되었냐?”
“……예.”
“내가 이야기를 푸는 게 흔치가 않아. 나름의 인연이라고 생각해.”
몸을 일으킨 남천이 시선을 돌렸다. 매화비원이 있는 방향에서 가공할 기운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를테면 영산의 기운.
백련교주에 의해 더럽혀지고 부서졌던 영기가 조금씩 되살아나는 형세였다. 갑자의 단위로도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남천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주목적은 너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저기였나 보군.”
“갑시다, 그럼.”
백무량은 분노를 차갑게 갈무리하고는 매화비원으로 향했다.
칠지검협이야 정신을 차리면 뒤따라올 거란 생각이었다.
***
“……당신이었군.”
매화비원이었던 터.
영기가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는 공터에서 백무량은 무심한 표정으로 두 남자를 노려보았다.
정체 모를 마인과 화산파의 도사.
도사의 정체를 보고 나니 낙매신검과 칠지검협이 허무하게 당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하일화.”
매화비원을 관리하고 지키는 역할을 맡은 장로.
등산로에서 쓸쓸한 모습을 보였던 하일화가 지금은 마인의 곁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 모습이 과히 우습고, 슬펐으며, 화가 일어났다.
“어째서 그랬나? 대체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런 일을 벌인 거냐?”
“곤륜의 애송이에게 말할 이야기는 아니다.”
하일화가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는 표정에 후회나 고뇌 따윈 없었다.
아주 긴 시간 동안 생각하고 되뇐 결과가 이것이라는 듯.
당당하기까지 한 모습에 백무량의 속에서 불이 치밀었다.
그것은 곧 태청신공의 공력에 바람을 일으켰다.
콰르르……!
가공할 공력이 전신 기경팔맥을 통해 십이정경을 휘돌았다.
자그마한 연못에 불과했던 삼단전이 이제는 호수와 같았고, 몰아치는 기세가 폭풍이 이는 북해(北海)와 같았다.
그것을 본 마인이 입을 열었다.
“네가 곤륜신성인가?”
무심한 목소리에 작은 열기가 있었다.
호승심보다는 백무량이라는 무인에 대한 흥미처럼 보였다.
“많은 마인을 죽였다고 들었다. 백련교주와 마주하고도 살아남았다지?”
“…….”
“하나 그것이 전부라면 이곳에서 살아 나가지 못할 것이다.”
마인의 전신에서 내공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검은 머리카락이 붉게 물들고, 어깨의 선을 따라서 종아리까지 불이 옮겨붙은 것처럼 보였다.
열양지기? 아니, 그것보다는 순수한 화기에 가깝다.
백무량은 직감적으로 마인의 정체를 깨달았다.
“성화교도더냐?”
“안목이 제법이로다.”
마인이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목숨을 지켜 주지는 않는다.”
화르륵!
검붉은 공력이 백무량을 향해 날았다. 짧은 순간에 창(槍)의 형태로 유형화한 일격이었다.
이른바, 쇄천화창(碎天火槍).
하늘마저 잘게 부수는 화기의 창이었으나.
“흥!”
남천이 펼친 오악세(五嶽勢)가 화기를 잘게 부수고 흩뜨렸다.
태산검문의 무공을 이은 금모도왕다운 절초.
깔끔하기 그지없는 출수에 마인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네놈은 누구인가?”
“너 같은 잡놈에게 말할 이름은 없다!”
“태산검문의 무맥을 잇고 있음에도, 나를 모른단 말이냐?”
“어디 사는 병신이기에 내가 알아야 하느냐?”
남천의 당찬 반문에 마인이 피식 웃었다.
“과거, 태산검문의 검객도 그렇게 허세를 부리고는 하였다. 하면 네놈은 어떠냐? 겨우 일초반식, 가벼운 출수에도 네 도의 상태는……?”
그 말에 남천의 손가락 끝이 떨렸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마인의 일 초에 도가 달궈진 쇠꼬챙이처럼 뜨거워짐을 느꼈다.
내력으로 보호하지 않았다면 곧바로 날이 녹았을 터.
남천이 입술을 비틀었다.
“내 도가 녹는 것보다 네 목이 날아가는 것이 더 빠르지 않겠느냐?”
“검을 버리고 도를 택한 네 선택은 참으로 개탄스럽다. 태산검문의 철검칠식(鐵劍七式). 성화교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였던 무공은 이제 없어진 셈이니.”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은 마인이 정체를 밝혔다.
“나는 성화교의 장로, 염화(炎火)다.”
그렇게 말한 염화가 백무량을 바라보았다.
“한데 네놈은…… 과연 듣던 대로구나.”
그 말에 남천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자연스레 표정이 구겨졌다.
“너…….”
염화가 필살에 가까운 살초를 펼쳤음에도, 백무량의 표정은 무심하기만 했다.
‘진 선배를 죽인 놈이 저놈이었구나.’
진자충에게 펼쳐졌던 초식과 거기에 담긴 기운.
그것을 모두 곱씹고서 해석하고, 상대의 경지를 파악한다. 생사결에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준비를 마친다.
백무량은 그 과정을 감정을 거세한 이성으로 진행했다.
찰나였지만 식물의 영역에 가까웠다.
“네가 장문인의 검을 빼앗아서, 진 선배에게 던졌구나.”
“약했지. 마지막엔 조금 감탄했지만, 결국 쓰레기였다.”
진자충의 죽음을 평가하는 염화의 목소리엔 한심하단 넌더리가 가득했다.
“하물며…… 수백 년 전에 만났던 호적수의 후예는 본질을 잃었다. 성화교의 장로로서는 기쁘나,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는 슬프기 그지없는 일이다.”
“별 지랄 같은 소릴!”
남천이 콧김을 흥 내뿜으며 염화에게 도를 겨눴다.
단지 그 몸짓뿐이었음에도.
쿠르릉!
남천의 공력이 주변을 짓눌렀다. 수십 관의 무게가 피아를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무공을 펼친 남천조차도 무게에 짓눌렸으나, 히죽거리는 웃음이 짙었다.
“이것이 네가 바라던 천라진(天羅鎭)이더냐?”
철검칠식의 육초, 천라진.
모든 무인의 움직임을 짓누르나 철검칠식을 펼치는 무인에게는 별다른 흠이 되지 않았다.
태산검문의 본질은 중검(重劍).
치솟은 불길마저도 풍압으로 꺼 버리는 무거움이 있으니.
“…….”
염화가 두른 불길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걸 본 남천이 염화에게 시선을 집중한 채 백무량에게 물었다.
“저놈은 내가 처리하겠다. 끼어들지 마.”
“같이 싸우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선배가 말하면, 그리 알아.”
억지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남천은 본능적으로 염화에게 평생의 고민을 풀 해답이 있다고 느꼈다.
태산검문의 후예임에도 무학의 본질을 모르는 모순.
어찌하여 제대로 된 비급을 남기지 못했느냐에 대한 답.
그것을 알게 된다면……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천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마디를 던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자충, 그놈한테 잘해 줄 것을 그랬어. 다 내 개인적인 열등감이었는데 말이야.”
“……예?”
백무량의 평정심이 순간 흐트러질 뻔했다.
강호십대고수이자 금모도왕, 낭왕으로 불리는 남천이 왜 진자충에게 열등감을 품는단 말인가?
하면 화산파에서 부린 패악이나 무례도 열등감이었단 걸까?
그 해답을 꺼내 놓지 않은 채, 남천이 염화를 노려보았다.
“어떠냐, 이제 싸울 생각이 드느냐?”
“제자나 스승이 있느냐?”
“없다.”
“하면 너만 죽이면 태산검문의 무맥이 끊기는 셈이군.”
염화가 어깨를 으쓱였다. 잠시였지만, 그의 어깨 뒤쪽에 깊은 자상이 드러났다.
남천의 눈동자에 이채가 일었다.
“운심쇄(運深鎖)에 당한 상처냐?”
“…….”
염화는 대답하지 않고 따라오라는 듯 등을 보였다.
그사이에도 매화비원의 토지에서 영기가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심천검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토해 냈다.
[저놈, 설마…….]
‘뭡니까?’
[토지의 영기가 어디로 향하는지 보이지 않느냐?]
그 말에 백무량은 표정을 구기며 기감을 극도로 끌어냈다.
그러자 실낱같은 영기가 한곳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맙소사.’
염화.
정확하게는 그의 가슴에 있는 무언가를 향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백무량은 시선을 돌려 하일화를 노려보았다.
“여기까지 협력한 이상, 저놈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텐데?”
“그게 무슨 대수냐.”
“……뭐?”
“이미 천하는 마교에 의해 쓰러질 판국이다. 보아라. 낙매신검마저도 약해진 백련교주를 이기지 못하여 쓰러졌고, 그와 동등한 놈이 둘이나 존재한다.”
하일화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산파가 살아남는 길은, 그래도 호의적인 마교에 기생하는 수밖에 없다. 성지마저 살려 준다고 하였지.”
“그것이 마교의 손에 넘어간대도 말이냐?”
“아무렴 어쩌겠느냐, 화산파의 미래를 위한 모색인 것을.”
“……하, 겨우 그런 거였군.”
복잡했던 생각이 모두 지워지는 순간.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