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77화 (177/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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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면 빼앗을 수 있다. 뭘 그리 망설이는가?]

묘한 열기가 있는 목소리였다.

열등감, 비틀린 향상심, ‘만약’을 떠올리게 하는 열기.

진자충의 입술이 크게 열렸다. 누가 이런 장난을 치냐는 호통을 치려는 의도였다.

그때, 다시 한번.

[본심은 그게 아니지 않나!]

은밀한 전음이 다시금 귓가를 간지럽혔다.

마기와 열기가 뒤섞인 기운이 마음을 어지럽히는 듯했다.

우습게도, 그 순간에 백무량의 뒷모습이 보였다.

촉망받는 신진 고수, 재능의 차이, 곤륜산에서 있었던 비무…….

온갖 것들이 진자충의 뇌리에서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진자충은 복잡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저 영단을 취할 수 있다면, 나는…….’

대주가 아니라 조금 더 위를 바라볼 수 있는 게 아닐까?

진자충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어두워진 망막에 상상으로 이루어진 형상이 떠올랐다.

강호십대고수가 된 자신, 누구에게도 무시받지 않는 자신, 무림맹에서 나와 무가를 일구는 자신.

평소에 생각지도 않았던 욕심이 있었다. 거기에 매료되는 정신이 있었다.

‘이대로라면 죽어서도 새가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아무것도 일구지 못하고 한때 청룡대주였다는 것만이 기록에 남는다면, 그보다 더 공허한 울림이 어디 있으랴!

진자충은 백무량에게 소리 없이 다가갔다.

지척까지 다가갔음에도 접근을 모르는 눈치였다.

‘그야, 저만한 영단을 쥐고 있다면 사소한 기척 따위는 묻히겠지.’

배후에서 몰래 습격할 완벽한 기회이리라.

진자충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래, 지금이다! 같잖은 위선은 집어던지고, 힘을 쟁취할 순간이다!]

“…….”

진자충은 말없이 백무량의 등을 바라보며 번민했다.

지금까지 봐 온 모습들을 떠올렸다.

호방하고, 가끔은 선을 넘지만, 마교를 상대로 싸워 온, 협의가 있는 후배였다.

그러나 저 영단을 취한다면…… 그를 대신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낙매신검의 주화입마를 돌보려다가 기경팔맥이 뒤흔들려 함께 횡액을 당했다고 한다면,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후배에게 많은 망신을 당하지 않았던가.’

당장 비무의 문제가 아니다.

사천에서 있었던 일로 많은 문책과 질문, 비웃음을 당했었다.

겨우 후배에게 휘둘리느냔 비아냥.

후배 혼자서 일을 해결하게 했냐는 한심하단 눈초리.

모든 것이 진자충에게는 짐이었다.

곤륜산에서 그 짐이 더욱 무거워져서, 숨이 턱 막히는 순간이 있었다.

진자충의 눈동자가 불현듯 어두워졌다.

백무량이 낙매신검의 입에 영단을 쑤셔 넣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지금!]

어둡고 끈적한 목소리가 자신을 충동질하는 순간.

진자충은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후배, 그동안 고마웠네.”

“……!”

백무량의 공력이 해일처럼 일어나는 순간, 암자 바깥에서 날아드는 비검(飛劍).

진자충과 백무량을 동시에 관통하려는 기세가 남달랐다.

진자충은 낮게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

창룡비검에게 비검을 날려서 죽이겠다니, 참으로 우스운 작태가 아닌가.

그러나 비검에 실린 공력은 가볍지 않다.

백무량이 낙매신검에게 영단을 흡수시키느라 취약해진 만큼, 자신이 더욱 분전해야 했다.

‘그걸로도 부족하다면.’

진자충의 눈에 시퍼런 기광이 휘돌았다.

“나도 자네처럼, 특별했으면 했어.”

마치 유언처럼 들리는 한마디에 백무량이 고개를 쳐들었다.

등이 보였다.

진자충의 배를 관통한 칼날과 쉴 새 없이 흐르는 핏물.

백무량의 입이 가늘게 열렸다. 칼날에 담긴 기운은 분명 익숙한 것이었다.

“자하신공……!”

오직 장문인 직전제자에게만 허락되는 화산의 절학이라.

암습자의 신분을 알아차린 백무량은 곧바로 진자충의 출혈을 막기 위해 점혈을 했다.

하지만 이미 터진 임독양맥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진 선배!”

“고민을 조금 했네. 그게, 그놈이 나한테 자네를 치라고 유혹했거든. 아예 생각이 없지는 않았어. 솔직히, 탐이 났지.”

쿨럭, 피를 한 됫박은 토해 낸 진자충이 빙긋 웃었다.

짐을 털어 낸 듯한 후련함과 일생의 자존심을 지켰다는 안도가 공존하는 미소.

백무량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진자충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지금 당장 그놈을 잡아서……!”

“안 돼. 지금은 낙매신검의 주화입마를 다스려야 하네.”

진자충의 목소리는 죽어 가는 사람 같지 않게 침착했다.

그러나 말을 읊조리는 속도에서 조급함이 느껴졌다.

“영단을 먹이기만 해서 끝이던가? 그건 아닐 걸세. 기경팔맥과 십이정경의 상태가 온전하지 않은 이상,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겠지.”

“……그건.”

“도문인 자네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이야.”

말을 마친 진자충이 공력을 끌어 올렸다.

그것만으로 피가 줄줄 흘렀다. 내출혈이 장기를 뒤덮고, 단전마저 상하여 오래가지 못할 듯했다.

곧바로 앉아서 가부좌를 틀어도 촌각을 버티기가 어려운데, 정체불명의 마인과 싸우겠다니.

백무량이 무언가 입술을 달싹이기도 전에 진자충은 강하게 호통쳤다.

“죽을 사람을 더 늘릴 생각인가? 당장 낙매신검을 구하게!”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

벽을 넘은 고수만이 보일 수 있는 기세가 진자충의 전신에서 발해졌다.

그때 바깥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로 멍청하오. 뜻이 맞았다면, 살려 둘 수도 있었을 터인데.”

다분히 의도적인 목소리였다. 일부러 목을 상하게 하여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듯했다.

진자충은 핏물을 쿨럭거리며 피식 웃었다.

“죽어 가는 무인을 상대로, 얼굴 한번 보이지 않겠다니. 참으로 무정하군.”

“현 강호에 유정(有情)할 필요가 있던가? 나는 나의 길, 내가 믿는 길을 향해 나아갈 뿐이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십 년의 공력이 담긴 비검이 날아왔다.

비검에 가공할 힘이 담겨 백무량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과거에 마주했던 칠성교도와 비교도 되지 않는 힘이었다.

[다치기 전의 몸으로도 막지 못하였는데, 어찌…….]

심천검은 진자충의 생사를 걱정했다.

이미 배를 꿰뚫렸는데 마인을 어찌 막을 것이며, 백무량을 어찌 지키겠다는 건지 의문투성이였다.

하지만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고수이며, 협의지사이니.

“커헉!”

진자충은 피를 토하면서도 정신의 끈을 놓지 않았다.

생의 마지막 심지(心志)를 태우며 떠올리는 의념과 비검.

겨우 찰나.

잔에 찻물을 따르는 시간밖에 남지 않았으나 진자충의 집중은 극한 너머에 있었다.

벽을 넘은 무인이 하늘을 올려다보니.

‘천애(天涯)에 있는 협로, 아니 계단인가?’

진자충의 시야에 어렴풋이 보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곳에 손을 뻗듯이, 의념을 일으켜서 비검을 띄웠다. 옷 전체에 숨어 있던 모든 비검이 튀어나왔다.

그것이 총 열 자루.

각각에 풍화뇌동과 적우염천의 형(形)을 새기려다가, 진자충이 고개를 내저었다.

“……부족해.”

이미 뼈아픈 패배를 경험하지 않았나.

겨우 그런 것으로는 저 비검을 막을 수 없다.

자하신공과 마기, 정체 모를 공력을 막아 내려면 더욱더 끌어내야 한다.

진자충은 무의식중에 무공을 잊었다. 비검의 존재 또한 마찬가지였다.

진정한 망아(忘我).

순백의 정신에서 단 하나,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비검을 보았다.

“후우.”

마지막 일 초가 되리란 생각에, 진자충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벽을 넘고서 일찍 하늘을 보았다면, 좋았을 것을.’

백무량에게 품은 열등감이나 그런 것 따위, 저 하늘 앞에서는 부스러기만도 못한 것이 아닌가.

진자충은 희미하게 웃으며 손을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열 자루의 비검이 각자 다른 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카가강!

비검과 비검이 부딪쳤다.

공력의 강력함과 양 모두 압도적이다. 힘의 논리라면 당연히 진자충이 밀려야 했다.

그랬을 터인데.

그그긍……!

다섯 자루의 비검만으로 상대를 밀어 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다섯 자루는 암자 바깥에 있는 적을 향해 날았다.

진자충은 그 결과를 확인하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하리란 걸 알았다.

“이 선배의 마지막 절초는 어떠했는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백무량에게 물었다. 곧 죽을 때가 다가오는데도, 묘하게 초조함이 들었다.

‘형편없었다는 소리를 들으면 어떡하나, 우연히 펼쳐진 행운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을 텐데.’

온갖 걱정이 드는 그때에 백무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단하였습니다. 이 후배도 감히 따라 하지 못할 초식이었습니다.”

남의 몸에 손을 대고도 말하다니, 역시나 엄청난 경지에 도달한 후배다웠다.

진자충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낙매신검의 등에 손을 대고서 영단의 기운을 녹이고 있을 텐데, 어찌 내 절초를 보았단 말인가? 하하.”

“저 대신 봐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뭐?”

“그분께서 말했습니다. 천하에 온갖 비검술을 보았는데, 선배보다 뛰어나지 않았다고요.”

백무량의 목소리가 몹시 진지했기에 진자충도 곧바로 부정하지 못했다.

사실, 깊은 안도감이 들었다.

“그것참, 다행이구만…….”

진자충은 끌끌 웃고는 제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난 잠시 쉬고 있겠네. 피곤하니, 모든 일이 정리되거든 깨워 주게.”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백무량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직후, 진자충의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강호에 몸을 담은 자라면 모두가 알았다.

[대인이 갔구나.]

심천검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착잡함과 무력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낙매신검의 기경팔맥에 영단의 기운을 녹이는 건 끝났다. 이대로 두면 십이정경으로 자연스럽게 흐르겠지.’

태청신공과 운룡의 문양이 도운 덕분이다.

그제야 백무량은 진자충의 얼굴을 보았다.

모든 짐을 벗어던진 후련함이 있었다. 눈을 감은 미소에서 마지막 절초에 대한 만족감이 드러났다.

그 순간, 백무량의 전신에서 해일과 같은 공력이 일어났다.

“살아 있느냐?”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다. 걷잡을 수 없는 화를 풀 대상이 필요하니.

백무량은 시퍼런 광망이 흐르는 눈으로 좌우를 둘러보았다.

극에 이른 기감이 주변 열 장을 훑었다.

쓰러진 무인과 암자에서 도주하는 놈 둘.

칠지검협이 당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속단할 순 없었다.

백무량은 진자충의 모습을 흘낏 눈에 담고는 암자 바깥으로 나갔다.

“……역시.”

언제 당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칠지검협이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백무량은 곧바로 칠지검협의 몸에 손을 대었다.

뒤이어 한 가지 특별한 점을 깨달았다.

‘흡성대법?’

자하신공으로 쌓아 왔을 공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이었다.

백무량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면 비검에서 느껴졌던 자하신공의 기운은…… 장문인한테서 빼앗은 거였나?’

확실한 것은 도망치는 놈들을 추격하면 알 수 있을 터.

백무량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저곳은…… 기이한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예, 성지가 있었던 곳이지요.’

매화비원.

백련교주에 의해 무너진 성지가 있던 자리로 두 놈이 도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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