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79화 (179/275)

조력자 (1)

……갑작스러운 이야기지만.

금모도왕 남천은 무림과는 거리가 먼 남자였다.

어렸을 때 재기(才氣)가 넘치고, 예의를 아는 아이로 유명했다.

약관이 넘은 파락호를 상대로 일장 훈계를 할 정도로 담대하기까지 했다.

무공?

그런 야만적인 것은 평생 배우지 않으리라, 치정(治定)으로써 민생을 돌보리라. 아이의 꿈치고는 제법 컸다.

때론 생각했다.

‘내가 바르게 살아서 다행이다, 모두가 나를 인정하는구나.’라며.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유명한 학자이자 아버지인 청백림(靑白林)의 부고.

그때부터 많은 것이 달라졌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배경이 달라졌음을 깨닫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감히 그동안 나한테 훈계질을 했겠다?”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했던 파락호가 자신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모두가 침묵했다.

파락호의 행동을 손가락질하던 사람들과, 심지어 다리가 부러진 자신조차도.

무력감은 늪과 같았다. 허우적거리면 더더욱 가라앉기만 했다.

그렇게 아이의 눈에서 총기가 사라질 때쯤.

“앉아서 죽을 참이냐?”

“……예?”

“집이 망한 거지, 네가 뒈졌어?”

삿갓과 까슬까슬한 수염이 인상적인 낭인이 자신의 몸을 덥석 들었다.

그러고는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리며 주절거렸다.

“나 때는 독기가 넘쳐서 뒈지란 저주도 버티면서 살았는데 말이야, 응? 요즘 애들은 참 포기가 빨라.”

“악!”

“아프긴 하냐? 반쯤 뒈진 눈으로 ‘난 인생 포기했소.’라고 주절거리던데.”

“제, 제가 언제…….”

“어른이 보기에 그랬다면 그런 거지, 어디서 토를 달아?”

히죽 웃은 낭인의 이름은 남천이었다.

그 낭인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정신머리를 바꿔 주겠다며, 그를 이곳저곳에 데리고 다녔다.

그런데 도통 이름을 묻지 않았다.

그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보니…….

“네가 말하고 싶을 때 말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이, 시팔. 내가 남자 이름을 궁금해해야 돼?”

낭인, 남천은 동정심이나 이해심과는 거리가 먼 낭인이었다.

걸핏하면 뭐가 마음에 안 든다며 투덜거렸고, 상대가 약하다 싶으면 도를 뽑았다.

그건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땅바닥에서 자기 싫어? 그럼 나한테 죽든가.”

“하, 하지만 바깥에서 자는 건 처음인 데다…… 벌레가 있잖아요.”

“벌레가 문다고 안 죽어.”

“예? 하지만 책에서는.”

“남만도 아니고, 중원에서 사람 죽일 벌레가 어디 있냐?”

“…….”

참으로 여러 말이 하고 싶었지만, 남천은 성질머리가 더러웠다.

무식하다고 투덜거리는 순간 도부터 뽑아 들 사람이니.

“휴우.”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 누우니, 남천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여간 쓴소리를 들어야 알아듣지?”

“됐어요. 진짜 성질머리 더럽기는.”

“오! 드디어 배운 자식의 입에 걸레가 들어가기 시작했구만!”

킬킬거린 남천이 모닥불을 피우며 말을 이었다.

“누구든 너를 무시하게 두지 마. 무림인의 허례? 구파의 배분? 좆 까라 그래. 아예 무식하게 구는 것도 방법이지. ‘저 새낀 원래 그런 병신, 머저리구나!’ 할 테니까.”

“그게 왜 방법이에요?”

“나도 나름 먹물 좀 묻힌 놈인데 이러고 있잖으냐.”

남천의 목소리가 잠시 무거워지는 듯해, 고개를 흘낏 돌렸다.

그러니 언제 그랬냐는 듯.

남천이 등을 돌린 채 누워 있었다.

“뭐예요. 옛날이야기 해 주려는 거 아니었어요?”

“네가 그럴 만큼 애새끼야?”

“…….”

평소 같은 폭언과 억지.

그 안에 온기가 있었음을 이날 처음 깨달았다.

‘……나를 데리고 다니는 것만으로 사실, 부담일 텐데.’

쌍욕을 하면서도 데리고 다니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고민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등 뒤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두 남자는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

‘갑자기 그 사람 생각은 왜 났을까?’

남천은 염화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오늘, 죽을지도 모른단 예감을 느낀 걸지도 모른다.

저놈 말대로 철검칠식을 도법으로 바꾼 것이 평생의 실수일지도 모른다.

남천이 여러 생각에 골몰하는 가운데, 염화가 물었다.

“후회하는가?”

“……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나와 대적하는 것을 후회한다면, 당장 떠나라. 중원이 아니라 먼 곳으로 도망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허, 지랄은.”

말은 더럽게 받아쳤지만, 남천은 염화의 존재감이 더욱 커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매화비원.

본래 화산파의 성지였던 지맥(地脈). 그 영기가 염화의 상단전을 향해 장중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모든 기운을 흡수하고 나면 염화는 얼마나 강해지는 걸까?

가히, 신(神)이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터.

‘성화교의 교주는 성신(聖身)으로 불린다 했었지.’

남천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림맹과 백무량에게 들었던 정보를 토대로, 염화의 목표를 추리하고 조립했다.

‘매화비원의 영기로써 백련교주, 칠성교주와 같은 수준에 오르려는 거구나.’

증거는 없었지만 예감이 뚜렷하게 다가왔다.

남천은 이 망상을 확신으로 받아들였다.

고수의 감각, 그것도 강호십대고수에 이른 고수라면 예지에 가까운 육감을 가지기 마련이니까.

남천은 복잡한 속내를 숨긴 채, 평소처럼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나한테 질 것 같아서 그러느냐? 엉덩이라도 두들겨 주랴?”

“자비를 걷어차는군.”

염화가 제자리에서 멈췄다.

매화비원과는 멀지 않은 곳. 백무량과 하일화의 싸움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위치였다.

‘여기에도 이유가 있다면…….’

누가 이기는지 보고 싶다. 혹은, 하일화가 배신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여러 가정이 있었지만…… 단 하나는 확실했다.

‘이 새끼, 나를 졸(卒)로 보는구나.’

얼마나 만만하게 생각하면!

남천의 한쪽 뺨이 씰룩거렸다. 화가 치밀었을 때 보이곤 하는 버릇이었다.

‘옛날 남천’처럼.

‘염병할. 저놈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곧 죽어 버릴 병아리처럼 비실비실, 옛 생각에 잠겨서야 염화를 상대로 백 초도 버틸 수 없을 터였다.

남천은 말없이 도를 들었다.

열화신공의 공력이 수양명대장경을 통하여 내관혈에 머물렀다가, 폭발적인 도강을 빚어냈다.

그걸 본 염화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겨우 그것이 전부인가?”

“……?”

“과거 태산검문의 검객은 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검경을 빚어내고는 했다. 절대 꺼지지 않는 불을 짓누르는 검. 자르고 부수는 검. 심상의 극치를 선보였지.”

염화가 실망감을 표했다.

“한데 네 모습은, 형(形)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녕 태산검문의 무맥을 이었다고 할 수 있느냐?”

“……닥쳐라!”

“패배자다운 외침이군.”

“네가 무얼 안다고 지껄이느냐!”

고함을 내지른 남천이 도강을 휘둘렀다. 염화의 천돌혈을 향해 열화신공의 공력이 폭사했다.

화르르……!

대기가 열기에 저며지니 시야가 뭉개졌다. 용광로 앞에 선 것처럼 시각에 왜곡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무인은 각자 위치에서 정점에 달한 자.

시각 하나에 의존할 만큼 녹록지 않다. 무인과 마인은 순수한 육감과 기감으로써 제 기량을 펼쳤다.

그중 염화의 무학이 가장 기이했다.

염신환허(炎神還虛).

염화의 좌수에서 빚어진 공력이 도강을 짓눌렀다. 그뿐만 아니라, 도를 녹여서 변형시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

남천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첫 초식을 교환했을 때 느꼈듯, 염화의 무공은 인세의 상식과 달랐다.

‘극양의 무공을 익혔다고 한들 강기로 보호한 병장기를 무력화시킬 수 없는 법이거늘.’

그러나 염화는 손쉽게 그것을 해냈다. 공력을 투과하고서 본질을 태우는 마공을 지닌 듯했다.

남천은 이를 꽉 앙다물었다.

‘하면 그 빌어먹을, 태산검문의 선배들은 저놈을 어떻게 상대했단 말인가?’

지금 필요한 것은 무공의 재능을 넘어서는 무언가.

어린 시절, 스스로 버렸던 총기과 재기(才氣)가 그리웠다.

그때의 자신이었다면 남겨진 것만으로 축을 쌓아 올렸을 텐데.

까앙!

도강을 두른 도가 염신환허를 애써 튕겨 냈다.

염화의 얼굴에 한심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여흥은 여기서 끝이다. 태산검문의 후예를 자처하기에는, 너는 너무 약하다.”

염정화기(染淨火氣).

염화의 얼굴이 붉게 물들더니, 주변 십 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나둘씩 말라비틀어지는 지렁이, 매미 들.

공력으로 보호하지 않으면 전신에 화상을 입을 정도였다.

‘……하.’

남천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교환한 것은 몇 초식 되지 않았지만, 압도적인 격차가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발버둥은 쳐야겠지.’

남천이 복잡한 내심을 애써 정돈하던 그때.

기억 속에 파묻어 두었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거면, 너도 무림에서 한자리 정돈 차지할 수 있지 않겠냐?”

피에 젖은 피풍의, 애써 웃어 보이는 미소.

“나 대신 뭐라도 돼 봐. 저승에서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질질 짜지 말고. 누구한테 무시당하지도 말고, 그렇게 살아.”

엉망진창으로 훼손되어 있는 태산검문의 비급을, 보물처럼 끌어안고서 죽는 낭인의 모습.

형편없는 표정으로 울고 있는 아이, 남천이라는 이름을 잇기로 한 과거.

남천은 고개를 털었다.

주마등처럼 느껴졌을뿐더러, 애써 잊고 살았던 기억이었다.

‘왜 하필, 지금.’

이제 죽을 때가 되기라도 한 건가?

남천의 손아귀에 힘이 더해졌다.

“무시당하지 말라고, 그렇게 들었는데.”

아득한 격차를 보았지만, 살의(殺意)는 줄지 않았다.

오히려 맹렬하게 행동했다. 당장 내일을 살지 못할 것처럼, 열심히 노력하고 싸웠다.

그것이 남천의 인생이었다.

‘옛날 남천’이나, 현재의 자신이나.

그 방식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남천의 열화신공이 더더욱 몸집을 키워 가다가 점차 유형화했다.

미완성이 완성으로 향하는 모습.

염화의 입술이 가늘게 벌어졌다.

“……그랬군.”

염화가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중얼거렸다.

“태산검문의 무맥이 내 눈에 안 띄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가 그거였어.”

비급을 온전히 남겼다면 진즉 염화가 태웠을 것이고, 숨겼다고 한들 배운 놈을 처리하면 그만.

하지만 그들은 비급을 온전히 남기지 않았다.

남천의 철검칠식을 보면 태산검문의 검객이 펼치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일부러 구멍투성이인 비급을 남겨서, 후인이 완성하길 바란다라. 참으로 낭만적인 발상이 아닌가?”

먼 미래에 나타날 후인을 보호하고, 태산검문의 명맥을 지킨다.

그 의도의 결정체가 염화의 눈앞에 있었다.

“도달했는가?”

염화의 물음에 남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전능감에 가까운 공력이 전신의 갑주처럼 자리했다. 강력한 힘에 취해 껄껄 웃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그 대신, 열화신공의 내공을 정련(精練)했다.

“그렇군.”

염화의 눈이 남천을 담았다.

화가 가득하고 조급하던 남천의 모습에 고요함이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다른 사람으로 변모한 것 같았다.

염화는 그러한 변화를 일찍이 경험해 본 남자였다.

“너 또한 누군가에게 빚을 진 신세인가.”

염화의 전신에서 가공할 공력이 일어났다.

인간의 몸으로 빚어진 천재지변. 열기가 가득한 돌풍이 주변의 수분을 지웠다.

남천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나에게 드러나지 않은 재능이 남아 있다면.’

원초.

태산검문의 비급을 남긴 검객을 넘어서야 한다.

남천의 눈동자가 먼 곳으로 향했다.

진자충이 죽기 전에 보았던 광경.

벽 너머, 하늘에 위치한 경지의 끝.

‘천애(天涯)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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