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69화 (169/275)

재능 (1)

“보보에 담긴 무거움은 소림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으며, 발목의 비골근이 안정적인 축을 이루고 있으니 참으로 뛰어난 사부를 두었소.”

한 걸음에서 이어지는 일검 속, 검사의 체중이 제대로 실린다.

비골근에 가해진 적당한 긴장 또한 만족스러운 수준.

진자충의 안목에 백무량은 내심 감탄하면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기껏해야 보름에서 스무 날이었을 텐데.’

그사이에 일어난 변화는 산 중턱에서 정상에 오른 것과 같다.

하물며 진자충은 극찬이 메마르기로 정평이 나 있다.

백무량의 목소리에 은근한 자랑이 담겼다.

“장문인께서 가르치기는 하시지만, 사형으로서 몇 수를 봐주기도 하지요.”

“허, 그렇다면 언제 청룡대도 봐줄 수 있겠나?”

“어찌 사문의 무학을 유출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네.”

진자충이 피식 웃고서는 백무량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먼발치에서만 보았지 제대로 인사를 나눈 적이 없어서 그러네만, 사제를 소개해 줄 수 있겠나?”

“청룡대에 보내진 않을 겁니다.”

“어허! 아직 욕심을 드러내지도 않았건만!”

진자충의 우스갯소리에 백무량은 의심 섞인 눈초리로 곁눈질했다.

“솔직히 제 사제가 워낙 잘났어야지요.”

“아끼는 것도 그 정도면 병이네, 병.”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자충은 내심 현종휘를 청룡대로 낙점하고 있었다.

현종휘가 보인 일 보와 일 검.

단 한순간에 불과했지만, 진자충의 안목은 많은 것을 읽어 냈다.

용천혈에서 치솟은 공력이 비골근을 타고 기해혈로, 기해혈에서 대맥을 따라 흘러, 어깨부터 왼팔 중앙을 관통하는 경맥 수궐음심포경(手厥陰心包經)으로 향하니.

그 공력을 손목 아래의 내관혈로 응집하는 것 또한 훌륭하다.

곤륜파에 공적으로 온 게 아니었다면 곧바로 제의했을 테지만, 백무량의 시선에서 서늘한 살기가 느껴졌다.

제 발이 저렸던 진자충이 고성을 버럭 내질렀다.

“어허, 진짜 아무런 생각 없다니까 그러네!”

“비범한 기도다, 보보가 무겁다, 비골근이 축을 이룬다. 극찬을 늘어놓고 그리 말씀하셔도 믿기가 어렵습니다.”

“크흠, 흠…… 티가 많이 났나?”

“났지요. 그러니 곤륜도를 끌어들이시거든 저의 허락부터 받으시지요.”

백무량의 으름장에 진자충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전부터 만났을 때도 그렇고, 선배에 대한 예우가 참으로 없구먼…….”

[내 말이! 이런 버릇없는 후배가!]

심천검의 추임새에 백무량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그것을 본 진자충이 더더욱 시무룩해져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무공이 약한 게 죄지. 선배 취급조차 해 주질 않으니…….”

“아니, 오해십니다.”

“호광성에 돌아가면 폐관에라도 들어가야겠어, 끄으음.”

진자충이 앓는 소리를 하며 백무량을 놀리니, 심천검이 끅끅 웃었다.

[역시 우리 후배가 예의 없기로는 강호에서 제일가는…….]

‘선배까지 왜 그러십니까?’

마인과 싸울 때보다 지금이 더 피곤해지는 것 같다.

속이 슬슬 부글거리려는 찰나에 현종휘와 시선이 마주쳤다.

이에 백무량은 반색하며 현종휘에게 다가갔다.

“종휘야! 수련은 끝났느냐?”

“아, 대사형…….”

현종휘가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홱 돌리는 것이 아닌가!

백무량은 왠지 모를 배신감을 느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반갑지 않으냐?”

“아니요. 그것이 아니라…….”

“하면?”

백무량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냉기에 현종휘가 뒷걸음질 쳤다.

현종휘의 뺨에 맺힌 땀이 식은땀으로 바뀌는 듯했다.

“그게, 제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착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착각?”

“네, 그게.”

현종휘가 뒷말을 잇기 위해 백무량 옆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전음을 보내자니 감정이 드러나지 않고, 육성으로 했다간 멀리서 웃음을 참고 있는 진자충이 들을 것 같았다.

따라서 귓가에 속삭이려고 했는데, 그 행동 자체가 백무량의 오해를 샀다.

“아직도 네가 애인 줄 아느냐?”

“……네?”

“나이를 열일곱이나 먹고서는 애교를 부려서 상황을 모면하려 드는…….”

“아니, 아니에요! 그리고 제가 언제 애교를 부렸다고 그래요!”

“흠, 아니면 되었다.”

그야말로 아니면 말고의 전형인지라.

현종휘는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백무량을 보았다가,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게, 오해하고 있었거든요. 제가 약해서 도움이 안 되니까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난 걸로요.”

“……뭐?”

백무량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언제나 얌전했던 현종휘가 떠올릴 만한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자신의 오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란 언젠가 자라기 마련인 것을.’

현종휘가 언제까지 싸우길 싫어하는 아이라고 여겼단 말인가.

강호에 초출하여 명성을 쌓고 협행을 한 이후에 현종휘는 청운검협이라는 무인이 되었다.

무림의 법식에 몸을 맞추고 눈으로 본 이상 존중해 주어야 했다.

백무량은 작은 목소리로 속마음을 고했다.

“미안하다.”

“……예?”

백무량답지 않은 대답에 현종휘가 순간 놀라서 반문했다.

그러나 백무량은 했던 말을 다시 해 줄 만큼 친절하지 않았다.

“한 번 들었으면 됐지, 뭘 더 들으려고 하느냐. 쯧, 그래서 수련의 성과가 방금 펼친 초식이었느냐?”

“아, 예.”

“겨우 보름 정도에 그만큼 늘었다고?”

“그런 셈이죠.”

그 말에 백무량은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예전에는 현종휘의 재능과 근기를 보고 기특하단 생각을 했다.

언젠가 옆에서 함께 싸워 주길 바랐고, 곤륜파의 모범이 되길 바랐다.

한데 그날이 조금씩 다가오고 암수가 보이기 시작하니…… 그 생각을 꺼리게 되는 자신이 존재했다.

자그마치 칠 년.

그동안 옆에서 지켜보니 정이 깊게 들었다.

백무량이 무언가 입술을 달싹이려는 차에, 진자충이 헛웃음을 머금은 채 현종휘에게 물었다.

“허, 보름 동안에 그런 성취를 이룰 수 있다니…… 곤륜파의 터가 좋은 건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칭찬이었네. 모두가 후배처럼 성장한다면, 마교가 두렵지 않았을 걸세.”

그 말에는 백무량도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감정이 격앙되어 딴 곳으로 흘렀지만, 현종휘가 스무 날 사이에 이룬 성취는 어느 무인과 비교해도 뛰어났다.

여러 극찬에 현종휘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어졌다.

“저는 그저 대사형과 장문인께서 가르치시는 대로 행했을 뿐입니다.”

“허허, 겸양이 과하군.”

진자충이 현종휘에게 부드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 안에는 약간의 호승심도 담겨 있었다.

무인이란 곧 무(武)를 증명하는 데 미쳐 있기 마련.

그 숱한 광인 중에서도 진자충은 정도가 심한 축에 속해, 나이나 위치를 불문하고 비무하기를 즐겼다.

“나와 잠시 어울려 줄 수 있겠나?”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서 여독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도리어 진자충의 어조에 설렘이 가득하여 현종휘의 시선이 백무량에게 향했다.

그 모습이 마치 허락을 구하는 아기 새와 같았다.

“오늘은 쉬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아니, 선배께서 저리 원한다면 받아 주는 것이 예의겠지.”

백무량의 말에 진자충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과연! 역시 백 후배는 나와 통하는 데가 있으리라 여겼네!”

“종휘가 아니라, 저와 비무하시지요.”

“……음?”

“칠성교주의 경지에 대해 궁금해하시지 않았습니까? 저와의 비무가 어느 정도 해답이 될 겁니다.”

그 말에 진자충의 표정이 굳어졌다.

벽을 넘어선 이후로 검을 대지 않아도 승부가 어찌 될지 알아차릴 때가 있었는데, 지금이 딱 그때였다.

진자충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백무량을 만류했다.

“꼭…… 그래야겠나?”

“진 선배라면 강호십대고수와의 비무를 자청한 경험이 있을 겁니다. 그것과 비교하면, 칠성교주가 얼마나 강한지 셈할 수 있겠지요.”

백무량의 논리는 일견 완벽했지만, 진자충이 얼마나 얻어맞을지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패할 것을 이미 결론지어 놓고 ‘누가 더 아팠느냐’를 몸으로 측정해 보라는 꼴이다.

진자충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청룡대주까지 되어서 이런 꼴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백무량은 그 반응을 이미 예상했다.

“뭐, 감정은 좋지 않겠지만…… 저보다는 진 선배께서 무림에 알리는 것이 더 빠르지 않겠습니까?”

“그래, 알겠다.”

이럴 줄 알았다면 칠성교주의 강함을 의심하지 말 것을.

진자충은 혀를 차며 연무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백무량 또한 호흡을 가다듬으며 비무를 준비했다.

그 모습에 주변이 시끌벅적해졌다.

“저기 대사형 아니야?”

“무슨 일이래?”

“비무라도 할 모양인데…… 옆에 있는 사람은…… 창룡비검인가!”

여러 말소리가 연무장을 뒤덮으니 진자충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허세보다는 긴장에 가까웠다.

마인 수십을 학살한 백무량과 싸운다는 긴장감.

“이럴 줄 알았다면 자네가 사천성에서 벌인 일을 듣지도 말 걸 그랬네.”

“기껏해야 마인을 몇 벤 것에 불과합니다.”

백무량의 겸양에 진자충은 한쪽 뺨을 씰룩였다.

‘기껏’으로 끝날 일이라면 강호에 혼란은 왜 일어나고, 청룡대가 왜 강호 전역을 돌아다니겠는가.

일부러인지는 몰라도 백무량의 화법은 은근히 열 받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심지어.

“선배께서 여독을 풀지 못한 것이 걱정되니, 제가 삼 초식을 양보하겠습니다.”

“……뭐라?”

진자충은 귀를 의심했다.

진담이라면 자신을 진심으로 분노케 하려는 것이고, 농담이라기엔 너무나 과했다.

백무량의 의도가 훤히 보이기에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살초라도 펼치길 바라는 건가?”

“그래야 일초반식이나마 버틸 수 있을 겁니다.”

“……내가 형편없는 무인이라는 말처럼 들리는군.”

“누구든 칠성교주 앞에 서면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진자충과 칠성교주의 격차란 딱 그 정도.

일초반식조차 버틸 수 없다는 것부터다.

그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진자충이 진심으로 살초를 펼쳐야 했다.

백무량은 하단전의 공력을 그러모으며 빙긋 웃었다.

“검도 쓰지 않겠습니다.”

“나를 어디까지 끌어내릴 생각인가?”

“제가 칠성교주와 마주했을 때 그러한 마음이었습니다.”

어떠한 발악도 해 보지 못하고, 손가락질에 상단전이 짓눌렸다. 심천검이 없었다면 그곳에서 죽었을 목숨이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느낀 감정은 무력감.

그것으로 진자충이 보였던 오만함을 부숴 줄 생각이었다.

“전력을 다하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다칩니다.”

“오냐! 더는 참지 않겠다!”

노호를 터트린 진자충이 손목을 휘둘렀다. 수십의 검기가 실처럼 이어지며 기이한 검로를 그렸다.

풍화뇌동.

의념과 내공으로 이루어진 비검이 정면을 향해 쏘아졌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곤륜도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정교한 절기였다.

그것을 본 심천검이 옛일을 떠올리며 히죽 웃었다.

[저런 무공은 더 큰 힘으로 깔아뭉개는 재미가 있는 법이지.]

‘참으로 악취미십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의외로 백무량과 심천검은 같은 생각일 때가 잦았다.

극성에 이른 태청신공의 공력이 뇌운으로 화했다. 숨 쉬듯 자연스러운 운용에 진자충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콰르르!

분광뇌운결의 울부짖음이 풍화뇌동의 비검을 찢었다.

그것으로 모자라 진자충을 향해 쇄도하니.

“……!”

진자충은 보신경을 펼치며 뒤로 물러났다. 번개가 내리꽂힌 자리가 검게 물들었다.

바로 그때, 심천검이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네 사제, 생각보다 재밌는 놈이 아니더냐?]

‘그게 무슨 말입니까?’

백무량의 인상을 찡그리며 뒤를 돌아보니, 현종휘가 안광을 번뜩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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