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 (6)
선풍도골이라.
만년에 접어든 나이임에도 현노윤의 체격은 중년 못지않게 투박하고 단단했다.
‘이 사람이 바로 곤륜신성 백무량과 청운검협 현종휘의 스승인가……!’
진자충의 눈동자가 심유한 빛을 머금었다.
존장 앞이기에 내공은 운용할 수 없지만, 오랫동안 청룡대주로 활동하면서 기른 안목과 경험이 있었다.
‘보이지 않아.’
두꺼운 암벽.
세월을 머금은 얼굴에 한 치의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는가?”
현노윤의 무감정한 눈빛이 진자충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진자충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자연스레 의자에 착석했다.
“아닙니다. 그저, 조금 긴장을 했을 뿐입니다.”
“무림맹의 사람답지 않게 소탈한 말이군.”
말 속에 숨겨진 가시라.
진자충은 현노윤이 무림맹에게 그리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유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오래전에 벌어졌던 백련교의 난.
그 이후 무림맹은 곤륜산에서 죽은 협의지사를 기렸다. 시신을 수습하고, 묘소를 다듬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무림은 약자에게 잔인한 법이었다.
진자충의 음색에 신중함이 더해졌다.
“청룡대주 진자충이라고 합니다. 산을 오르는 도중, 옆에 있는 백 소협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용무는 나에게 있는가, 아니면 무량이에게 있는가?”
현노윤이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진자충을 압박했다.
전자라면 백무량을 동석시킬 것이고, 후자라면 진자충을 내쫓을 요량이었다.
진자충은 그 의도를 오랜 경험으로 알아차리고는 백무량을 흘낏 곁눈질했다.
“백 소협뿐만 아니라 장문인께서도 아셔야 할 내용입니다.”
“그러한가?”
현노윤의 시선이 백무량에게 향했다.
이로써 두 시선이 한곳에 모인 셈이니, 백무량의 미간이 좁혀졌다.
“공통된 적을 두고도 왜 이러시는 겁니까. 실랑이하시려거든, 모든 일이 끝나고 하시지요.”
백무량의 한마디에 살얼음판 같던 분위기가 단숨에 녹았다.
진자충은 고맙다는 뜻을 전음으로 전했다.
[고맙네. 말 한마디 꺼내기가 어려웠다네.]
[보시다시피 장문인께서 무림맹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해해 주어 감사합니다.]
백무량은 현노윤에게 자중하란 의미의 수신호를 보내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세 남자가 다실에 앉으니, 현노윤이 찻주전자를 들었다.
“무량아, 사천성에서의 일은 잘 마무리하였느냐?”
“앞으로 아미파의 봉문은 유지하되 연락은 이어질 것이고, 사천당가도 자중할 겁니다. 그보다…….”
백무량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지는가 싶더니 상반신이 앞으로 쏠렸다.
이목을 집중시키는 듯한 행동에 현노윤도 찻주전자를 내려놓았다.
“사천성으로 향하는 길에 칠성교주와 천마신교의 교인으로 의심되는 마인을 마주했습니다.”
“그게 사실인가?”
진자충이 깜짝 놀라서는 탁자를 내리쳤다.
당연한 일이었다.
현재 무림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칠성교.
그들의 수장을 마주했다는 뜻이니, 진자충의 반응이 격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마주했나! 얼마나 강했는지도 말해 줄 수 있겠는가?”
“청해성과 사천성 사이, 관도 바깥의 산등성이였습니다. 강함은 강호십대고수가 나서도 필패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허튼소리!”
진자충은 고개를 강하게 내저었다.
“그만큼 강하다면 진즉 모습을 보였을 걸세!”
“대주께서 잊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낙매신검께서도 백련교주에게 패하여 긴 시간 정양하셨던 걸로 압니다. 칠성교주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백무량의 말에 진자충은 탈력감에 빠졌는지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래,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화산파에서 실제로 백련교주를 목도한 자네라면, 옳겠지.”
솔직하게 말해서 인정하기 싫은 사실이었다.
백련교주만 해도 낙매신검을 압도하였는데 칠성교주까지 그와 비슷한 경지라면, 전 무림이 뭉칠 필요가 있었다.
‘말뿐인 무림맹이 아니라, 진짜로 말이지…….’
그게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적어도 삼 년, 길면 오 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모든 은원을 잊고 뭉치는 데 걸릴 시간이었다.
문제는 그동안 칠성교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단 것이다.
이에 현노윤이 신중한 목소리로 백무량에게 물었다.
“다음에 상대하면 꺾을 수 있겠느냐?”
“…….”
백무량은 잠시 침묵했다.
사실, 칠성교주의 강함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심천검의 경험이나 말을 빌려서 들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기지 못할 상대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 갈 때쯤, 진자충이 조급함을 드러냈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칠성교주와 마주하고도 살아남지 않았나!”
“목표하는 성취를 이루면 이길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어디…….”
말을 이어 가던 진자충이 입을 꾹 다물었다.
백무량의 기도에서 느껴지는 웅혼한 공력과 의지.
대해(大海)와 같은 존재감이 진자충의 정신을 짓누를 듯했다.
그것만으로 진자충은 백무량이 고절한 경지에 올랐음을 알아차렸고, 경악했다.
“자네, 대해검(大海劍)보다 높은 곳으로 오르려는 건가?”
“지금은 어떠한 말을 해도 오만으로 보이겠지요.”
백무량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자, 이제 낙매신검이 남긴 서찰을 보여 주십시오.”
“아, 알겠네.”
진자충은 품에서 두세 겹으로 감싸 놓은 서찰을 꺼냈다.
화산파 특유의 매화향.
그 향기가 다실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현노윤이 우린 차향마저 짓눌렸다.
바로 그때, 조용히 있던 심천검이 중얼거렸다.
[불길하구나.]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매화향이 짙다고는 하나, 다른 향을 없앨 만큼은 아니다. 서찰을 보낸 사람이 의도적으로 키운 것이야.]
‘낙매신검이 왜 그랬겠습니까?’
[무언가를 숨기려고 한 것일지도 모르지.]
심천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자충이 서찰을 펼쳤다.
그러자 매화향 위로 다른 향기가 덮였다.
다실이 불길한 기류에 휩싸이는 순간이었다.
“피……!”
진자충의 미간이 좁혀지고, 현노윤의 눈동자가 커졌다.
오직 백무량만이 침착함을 유지한 채 서찰에 적힌 것을 보았다.
[매일 밤마다 찾아오는 영귀(靈鬼)가 있다. 아무리 쫓아도 잠에 들면 찾아와 정신을 어지럽히고, 상단전을 갉으니 소용이 없다. 하루하루 무공과 기억을 잃어 가는 자신이 싫다.
전에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구나. 미안하다. 너를 볼 낯이 없어 글줄로 남긴다.]
피로 적힌 혈서.
일필휘지로 적힌 글줄에 절망과 증오가 담겨 있었다.
백무량의 눈앞이 까마득했다. 동정심과 공감도 동시에 일어났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강호십대고수.
그런 경지에 오른 고수가 무공과 기억을 잃는다.
어떻게든 두 손으로 막아 보려고 노력해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다면…….
‘나였더라도 제정신으로 버티지 못했을 거다.’
백무량은 착잡함을 속으로 삼키고는 혈서를 자세히 살폈다.
“손끝을 물어뜯어서 쓴 것 같습니다.”
스윽.
백무량의 손가락이 혈서를 훑었다.
언뜻 보면 먼지 부스러기처럼 보이지만, 이빨로 물어뜯었을 때 생긴 손톱 조각이었다.
“진 선배, 칠지검협께 더 들은 이야기는 없습니까? 요컨대 주화입마에 빠지기 전후로 특이한 일이 있었다던가요.”
“……미안하네. 나도 특별히 들은 바가 없어서 말일세.”
진자충은 침중한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 무력함이 전신을 푹 적시는 듯했다.
낙매신검이 누구던가!
백련교주와 마주하고도 살아남았을뿐더러 온화한 성품 덕에 정파 무인의 기둥으로 불렸다.
“이 사실이 바깥에 알려진다면, 흑도와 사파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낼 것이야.”
“으음.”
백무량은 침음성을 흘렸다.
날이 가면 갈수록 과감해지는 마교, 행방을 감춘 백련교주.
그것만으로 모자라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사파와 흑도가 양지에 발을 들이민다니,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 와중에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영귀가 찾아온다는 소리도 그렇고, 선배가 보기엔 어떻습니까?’
[칠성교의 짓이다.]
심천검은 과거의 기억에서 칠성교가 벌인 악업을 떠올렸다.
칠성교가 민란을 일으킨 뒤에 행했던 혼란.
그 혼란 속, 주화입마에 빠지거나 매병에 걸렸던 고수가 속출했다.
처음에는 재액처럼 생각했지만, 제갈세가의 천재 덕분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칠성교의 주술을 건 것이 분명해. 화산파 내부에 간자가 있을 게다. 그것도 낙매신검에게 의심받지 않을 정도로 높은 위치에.]
‘……설마.’
[설마가 아니다. 칠성교가 침입하고자 한다면 어디든 갈 수 있음을 한번 보지 않았더냐?]
그 말에 백무량은 만금상단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남의 얼굴을 빼앗던 마인.
그들이라면 언제든 다른 무인의 신분으로 위장할 수 있었다.
‘그걸 푸는 방법은 없는 겁니까? 낙매신검이라면 마교와의 싸움에서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모산의 좌도방이 가설을 하나 내놓기는 했지.]
‘그게 뭡니까?’
[네 손등의 운룡에 선기가 있고, 내가 기거했던 영단에 엄청난 양의 영기가 있지 않느냐? 그것으로 귀신을 몰아내는 것이다.]
‘……!’
확실히, 가능성이 높은 가설이었다.
칠성교가 다루는 것은 결국 요귀나 악귀.
선기와 영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놈들이었다. 실제로 청요귀를 상대할 때도 유리하게 싸웠던 기억이 있었다.
낙매신검의 주화입마도 그것으로 막아 낼 수 있다면, 칠성교의 암계를 격파하는 셈이다.
백무량은 고민에 빠져 있는 진자충과 현노윤을 향해 물었다.
“제가 직접 만나 보면 어떻겠습니까?”
“칠성교주와 싸운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나가려느냐?”
현노윤의 어조에 걱정이 가득했다.
당연한 일이다.
아미파에 비급을 돌려준다던 일이 칠성교주와의 대면이 되었고, 마인과의 싸움으로 번졌다.
사천당가 또한 백무량을 위협으로 여기는 차였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하산하겠다니.
아무리 백무량이 엄청난 고수일지라도 장문인으로서 허락하기가 두려웠다.
“낙매신검이 주화입마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있습니다.”
“소협! 그 말이 정녕 사실이오?”
“적어도 무가치한 일은 아닐 겁니다.”
그 말에 진자충은 백무량의 두 손을 꼭 잡고 싶어졌다.
“자, 장문인! 청룡대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백 소협을 지킬 터이니, 허락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후우.”
어째서 천하는 백무량을 고생시키지 못해서 안달인가.
현노윤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백무량이 먼저 가겠다고 한 것을 억지로 말릴 수도 없었다.
다만, 날이 어두울 때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해가 졌으니 곤륜산을 하산하기 좋은 시간이 아니네. 하물며 청룡대주는 호광성에서 오지 않았나? 하루쯤 여독을 풀고 가시게.”
“장문인의 배려 감사드립니다.”
“무량이 너도 충분히 쉬어라. 철유에게 따뜻한 물을 준비하라고 일러두었다.”
“감사합니다, 장문인.”
백무량은 현노윤에게 포권을 하고는 다실에서 나갔다.
드르륵.
문을 열어젖히니 곤륜산의 하늘과 연무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노을에 누렇게 물든 구름.
이러한 시간에도 구슬땀을 흘리는 곤륜도들.
이 와중에 곡물을 찌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칠성교가 언제 쳐들어왔냐는 듯, 평화로운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머금어졌다.
바로 그때, 옆에 있던 진자충이 한 청년을 가리켰다.
“허, 언제 저리 비범한 기도를 갖춘 건가?”
백무량은 진자충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반가운 얼굴을 보니 별안간 웃음이 나왔다.
“그야, 나의 사제이니까요.”
청운검협 현종휘.
약관이 되기 전에 고수가 되겠다던 아이가 어느새 신진고수다운 무게를 갖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