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 (5)
‘낙매신검이 주화입마에 빠졌다고?’
백무량의 눈동자에 깊은 파문이 일었다.
비록 백련교주에게 패했을지언정 화산파의 거목처럼 자리하고 있던 고수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자네가 백련교주와 싸우는 그때, 나 또한 자리하겠네.
앞으로 다가올 싸움에서 낙매신검의 부재는 상정하지 않았거늘.
백무량은 착잡한 심정을 얼굴에 드러냈다.
[낙매신검께서 저에게 서찰을 남겼다고요?]
[화산파에서 듣기로는 주화입마에 들기 직전에 적었다고 하더군. 칠지검협께서도 열어 보지 않았다네.]
진자충의 말에 백무량은 강한 의문을 표했다.
[아무리 그래도 제일 고수가 남긴 유일한 흔적인데, 장문인께서 확인하지 않았다고요?]
[자네도 알듯이 칠지검협의 성품이 워낙 완고해서 말일세. 낙매신검이 자네에게 남긴 이유가 있으리라 여기더군.]
“……허.”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감탄성을 흘렸다.
칠 주야 전까지만 해도 사천당가의 암투를 지켜보다가, 칠지검협의 협의(俠義)를 보니 생경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옛사람인 심천검마저도 감탄할 정도였다.
[허, 내 대에도 저런 도사는 드물었거늘.]
백무량은 심천검의 말에 무언으로 동의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곤륜산맥의 초입.
곤륜도 말고도 많은 사람이 여러 목적으로 왕래하는 곳이었다.
이들 중에 분명히, 진자충이나 자신의 동태를 살피러 온 간자가 있으리라.
백무량의 전음이 신중한 음색으로 젖었다.
[이곳은 깊은 이야기를 하기에 좋지 않으니, 본산에서 차라도 한잔하시지요.]
[허허.]
[……?]
[근래 자네의 무용담을 듣다가 실제로 마주하니, 칠 년 전과 다르지 않군. 다행일세.]
진자충이 빙긋 웃으며 백무량을 보았다.
처음 마주했을 때 백무량의 나이가 겨우 열셋, 지금은 스물.
젖살이 빠지고 어른다운 인상은 깊어졌다.
세상은 백무량을 두고 곤륜신성을 넘어 선자(仙子)나 신검(神劍)이라 칭한다.
마교와 싸워 죽인 숫자 또한 적지 않았다.
사실상 청룡대 전체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그 명성으로 인해 후기지수 사이에서 백무량은 이미 선망의 대상이요, 남몰래 품는 목표이자 이상.
그런 백무량이 택한 결정에 대해 진자충은 깊게 감명하고 있었다.
[보통 그만한 공적을 쌓고 강함을 증명하면, 오만해지기 마련이네. 당연한 일이지. 무림은 그러한 곳이니까.]
[지금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미파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들었네. 옛 비급을 돌려주었을뿐더러, 사천당가를 압박하였다지?]
[귀가 얼마나 크면 일주일 사이에 그걸 다 들으셨답니까? 당가가 필사적으로 숨겼을 텐데요.]
[다 아는 방법이 있기 마련이지.]
말을 이어 가던 진자충의 어조가 돌연 진지해졌다.
[한데, 왜 아미파를 도왔는가?]
칠성교주라는 재액(災厄)에 의해 아미파는 힘을 잃었으니, 공격하지 않고 품에 안기만 해도 욕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터였다.
사천당가의 당문천도 그럴 생각으로 백무량을 설득하려고 했다.
단지 백무량이 남들과 달랐을 뿐이다.
[마땅히 그래야 할 일이니까요.]
백무량의 대답엔 주저하는 기색이 없었다.
도리어 담백하기까지 했다.
[……으음.]
그 대답에서 진자충은 칠 년 전을 겹쳐 보았다.
홀로 청룡대를 찾아와 무공으로써 자신을 증명하겠다며 도리를 논하던 모습.
그 인상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날이 저물어 주변이 어두워지는 와중에도 찬란한 빛을 드러내는 듯했다.
[자네는 여전하군.]
[대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한 가지는 달라지셨군요.]
백무량의 시선이 진자충의 밋밋한 태양혈에 머물렀다.
과거에는 거대한 벽을 앞둔 무인처럼 긴장으로 가득했지만, 지금은 평범한 사내와 다를 바 없었다.
답은 오직 하나.
[넘으셨습니까?]
[부쉈네.]
진자충의 미소에서 느껴지는 여유에 백무량은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언제 한번 견식해 보고 싶군요.]
[허, 자네는 그만한 경지에 오르고도 더 높은 곳을 원하는 건가?]
[앞으로 싸울 적을 생각하면 한참이나 부족합니다.]
[설마 그 정도일까. 자네와 나 같은 무인이 합공한다면 칠성교주라고 한들 다르지 않을 걸세.]
백무량은 진자충의 여유 안에 숨겨진 오만을 꿰뚫어 보았다.
이해는 됐다.
당장 자신만 하더라도 벽을 넘었을 때 최고수가 된 양 어깨를 으쓱거렸으니까.
하지만 상대가 백련교주나 칠성교주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비무로 깨우쳐 주는 수밖에 없겠군.’
백무량은 걸음을 재촉했다.
***
“언제 오시나 했습니다.”
항상 의젓한 모습만 보이던 철유답지 않게 목소리에 원망이 가득했다.
이에 심천검이 껄껄 웃었다.
[업보다, 이놈아. 누가 말없이 가랬느냐?]
‘아니, 그게.’
칠성교의 습격 직후인지라 은밀하게 움직여야 했었지만, 철유에게는 말없이 자리를 비운 대사형으로 보일 터였다.
백무량은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이목을 끌지 않고 몰래 나가야 했다. 그래서…….”
“압니다. 그래야 할 이유가 있으셨겠지요. 미리 말씀을 해 주셨다면 더 좋았겠지만요.”
“…….”
현노윤과 송우현에게 말하고 떠났거늘.
백무량이 할 말을 잃고 고개를 슬쩍 돌리자, 진자충이 입가를 매만지는 척하며 실소를 흘렸다.
“……흐흘.”
언제나 진중하고 강인한 모습만 보이던 백무량이었기에 철유에게 쩔쩔매는 모습이 제법 신선했다.
그 모습을 본 철유가 시선을 진자충에게 돌렸다.
“한데 이분은 누구십니까?”
“나는 무림맹의 청룡대주 진자충이라고 하네.”
“창룡비검……!”
깜짝 놀란 철유가 황급히 포권하자 진자충이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괜찮네. 선배로서 대접을 받고자 했다면 이렇게 오진 않았을 걸세.”
“아!”
확실히, 연락 없이 찾아온 행동에 이유가 있을 터였다.
철유가 예를 거두는 모습에 백무량은 자그맣게 투덜거렸다.
“아무리 섭섭하다고 그래도, 외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서야.”
백무량의 투정을 들은 진자충이 껄껄 웃었다.
“하하! 자네의 인망이 두텁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공동의 유운검룡은 근래 후배들이 자길 찾지 않는다고 투덜거린다네!”
“유운검룡이라면…… 고 선배 말입니까?”
청성파를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어졌던 유운검룡 고성진.
백련교 좌호법, 이화겸이라는 대적 앞에서 당당했던 모습이 백무량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백무량의 표정에서 반가움을 읽은 진자충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한 실력을 갖추면 찾아가겠다더니, 아직 벽을 넘지 못한 모양이군그래.”
“몸은 괜찮답니까?”
“그 후배가 보통 강골이던가? 병석에서 일어난 게 삼 년 전이네.”
그 말에 백무량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다음에 마주했을 때 그가 어떤 모습일지 기대가 되었다.
그러다 낙매신검의 일이 떠올랐다.
“일단은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지요.”
“음, 그랬지. 나이가 들면 자꾸 엉뚱한 곳으로 빠지곤 하니 이해해 주게.”
“아닙니다. 저도 고 선배의 근황을 들어서 좋았습니다.”
이야기를 마무리한 백무량은 철유를 흘낏 바라보았다.
“너는 나중에 따로 보자꾸나.”
“대, 대사형, 그게…….”
“뭘 그리 두려워하느냐? 내가 없던 시간 동안 얼마나 수련했는지 보자는 것인데.”
“알겠습니다.”
철유가 마른 입술을 핥았다. 괜히 섭섭함을 드러냈다가 된통 혼나게 될 판국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대제자로서 행동할 때.
철유가 백무량에게 물었다.
“어디로 안내하면 되겠습니까?”
“장문인과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다.”
“다실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그 말에 백무량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자충보다 앞서 걸었다.
그렇게 다실로 향하다가, 진자충이 감탄성을 흘렸다.
“곤륜의 경치가 화산 못지않다더니 그 소문이 사실이었구려.”
백무량의 고개가 옆으로 돌았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무르익은 녹색.
꽃샘바람의 추위가 지나는 동안 많은 일이 있어선가, 계절이 흘렀음을 알지 못했다.
“그럭저럭 볼만하지요.”
백무량은 아무렇지 않은 척,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곤륜도로서의 자긍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를 알아차린 심천검이 얄미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냥 대놓고 천하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하지 그러느냐.]
‘체면이 있지 않습니까.’
백무량은 심천검과 투덕거리면서 진자충과 대화를 이어 갔다.
“운검묘에서 천하를 보면 곤륜의 운해를 볼 수 있습니다.”
“오, 그것참 궁금하구려.”
이른바 분심(分心).
처음에는 두 대화를 동시에 이어 갈 수 없었으나, 시간이 길어질수록 조금씩 익숙해졌다.
그건 무학의 발전으로도 이어졌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다 선배의 계획 아니겠느냐?]
심천검은 백무량을 놀리면서도 수련을 세심히 돕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분심조화결.
엄밀히 말하면 곤륜의 무학은 아니었다. 타문의 무공을 허락받지 않고 가르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백무량이 원하는 ‘무한’을 이루기 위해서는 필요했다.
[네가 익힌 타문의 무학이 이제는 넷이다. 그걸 모두 활용하려면 의식을 나누고, 심상을 나누고, 끝내는 검을 나눠야 하는 법이야.]
“저도 노력하지요.”
“노력하겠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진자충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척 보아도 자기 말에 집중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니, 언짢을 수밖에 없었다.
백무량은 어색하게 웃으며 방금 나눈 대화를 반추했다.
“그…… 백련교를 뒤쫓는 게 어렵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도 그것을 돕겠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허, 그런 말이었나.”
다행히 진자충이 이해하고 넘어갔다.
백무량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던 찰나에, 심천검이 히죽거렸다.
[슬슬 긴장이 풀리는구나. 분심조화결의 운용이 미흡한데, 어찌 무한을 노리려느냐?]
‘어째 조금씩 감정이 실리는 것 같습니다?’
백무량은 심천검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진자충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백련교주의 행방은 찾으셨습니까?”
“아직이네. 다만 그들을 숨겨 주고 있는 세력을 발견했다네.”
“숨겨 주다니요?”
“사파일 가능성이 크네.”
진자충은 생각만 해도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무림맹과 구파일방이 무림을 다스린 이래로, 사파는 늘 흑도의 틈바구니에서 살지 않았던가. 백련교주를 도와서 천하를 뒤집어 보겠단 게지!”
“……설마 그렇겠습니까?”
가뜩이나 칠성교와 같은 마교가 극성이거늘, 여기에 사파까지 끼어든다니!
그들이 백련교주 옆에서 날개옷처럼 자리한다면 행방을 알아내기가 전보다 훨씬 어려워질 터였다.
백무량의 걱정을 읽은 진자충이 억지로나마 미소 지었다.
“이번 일은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가 힘을 합하여 처리할 걸세. 걱정 말게.”
“한데 청성파의 빈자리를 해남파가 가진 겁니까?”
“그런 셈이지.”
“으음…….”
백무량은 침음성을 흘리며 다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곳에 이미 한 노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언제쯤 오나 했다네.”
“……곤륜의 장문인을 뵙습니다.”
진자충은 현노윤에게 진심을 다해 예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