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2)
타닥, 타다닥…….
마른 가지가 서로 엉겨 붙어 화마에 타들어 갔다.
따뜻한 온기가 주변을 덥혔지만, 두 남자 사이에 얼어붙은 분위기를 녹이지는 못했다.
백무량은 하늘을, 이름 모를 노인은 땅을.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나 의념과 기감이 마주한 사람을 탐색했다.
가끔 노인이 흘리는 잔웃음이 고요를 흩뜨렸다.
모닥불이 가장 환한 불빛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
노인이 ‘흐’ 하는 소리를 흘리며 백무량에게 말을 걸었다.
“뭐가 그리 두려운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힘없는 노인을 너무 신경 쓰고 있는 게 아닌가 해서 하는 말일세.”
‘힘없는 노인이라. 초장부터 헛소리를.’
백무량은 입술을 씰룩였다.
“수십 년의 공력이 담긴 외침이 무용하였는데, 왜 힘을 숨기려고 하십니까?”
“드러내 봐야 무에 소용이겠는가. 피 끓은 무림인의 도전을 받아들이기엔 요새 관절이 성치 않아서 말이야.”
에구구, 노인이 앓는 소리를 하며 허리를 두드렸다.
백무량은 그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모닥불의 열기와 불빛이 덜할 만큼, 노인의 안색이 훤했다.
관절이 성치 않다는 말과는 전혀 동떨어진 모습.
“제가 보기에는 웬만한 젊은이보다 노인장이 더 건강해 보입니다.”
“그런가? 그렇게 보았다면 다행이네만.”
노인이 빙긋 웃으며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찔러 댔다.
단순한 행동이었으나 백무량이 보기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손으로 무언가를 행하는 데 망설임이 없는 자로다.]
심천검이 낮은 목소리로 진언했다.
백무량은 고개를 작게 끄덕여 긍정했다.
찰나의 침묵이 지난 뒤.
이번에는 백무량이 노인에게 물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헤매신 것 같지는 않은데.”
백무량의 시선이 노인의 바짓단과 신으로 향했다.
아무리 이곳이 잘 닦인 길이라지만 군데군데 웅덩이가 있는 지형.
따라서 얼룩덜룩한 곳이 하나라도 보여야 하는데, 노인의 모습은 이제 막 집을 나선 것처럼 깨끗했다.
백무량은 말에 숨겨 둔 비수를 꺼냈다.
“저를 찾아오신 것은 아닙니까?”
“……의심이 많은 청년이군.”
노인이 손에서 나뭇가지를 놓았다. 모닥불 위쪽에 있는 가지가 스스로 바스러지며, 아래로 뚝 떨어졌다.
자연스레 백무량의 오른손이 검으로 기울던 그때.
노인이 좌수로 백무량을 가리켰다.
“옥석의 빛은 경장으로 가리지 못하는 법이네. 더 좋은 옷을 입을 수 있는 자가 왜 저러고 있는가 하여, 호기심이 들었네. 어찌 보면 빛에 이끌렸다고 할 수 있겠어.”
“자질구레한 말씀이 많습니다.”
백무량은 급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냈다. 어려운 말보다는 칼로 하는 대화가 익숙했다.
그 혈기를 느낀 노인이 여유로운 미소를 드러냈다.
한때는 자기도 그랬다는 듯, 팔자주름이 깊어지는 미소였다.
콰르르르…….
백무량이 공력을 끌어 올리니 주변의 공기가 흔들렸다. 환한 빛을 뿜던 모닥불이 불안정하게 껌뻑거렸다.
노인이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어허, 이보게, 야숙에서 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가?”
“후우.”
백무량은 눈을 감고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호흡은 만상을 조율하는 것.’
한 줌의 숨이 대맥을 타고 폐부를 씻어 내린다.
그 숨은 십이정경을 거치고 세맥으로, 세맥을 거친 호흡이 위로 솟구쳤다.
파스슥.
공력을 이기지 못한 모닥불이 꺼졌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고요한 어둠이 찾아왔다.
그 어둠에서 한 쌍의 시퍼런 안광이 드러났다.
백무량의 눈이었다.
“말장난을 하기에는 날이 너무 어둡습니다, 노인장.”
“허.”
노인이 헛웃음을 머금었다.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호의로 다가가, 말을 붙인 것이 전부였네. 꼭 이렇게까지 밀어내고 적의를 드러낼 필요가 있나?”
노인의 마음이 상한 것이 목소리에서 뚜렷하게 느껴졌다.
백무량은 그저 말없이 노인과 시선을 마주했다.
태청신공의 공력이 시퍼런 안광을 번뜩일 때면, 많은 것을 읽어 내고는 했다.
이를테면.
“마인이라면 이실직고하시지요.”
아무리 깊숙이 숨겼다고 한들, 시퍼런 안광 앞에서 마기를 숨길 순 없다.
백무량의 목소리가 어둠보다 낮게 깔렸다. 노인이 인내의 끈을 놓는 순간이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군! 뛰어난 무공만 가지고 있을 뿐, 저잣거리의 비렁뱅이만 못한 사람이라니!”
“최근 좋지 않은 일을 경험해서 말입니다.”
차라리 오해였으면 했다.
길 도중에 만나는 모든 사람과 어울리고 웃고 싶은 건 백무량 그 자신이 제일 간절했다.
하지만 백무량의 과거와 인연이 미혹을 귓가에 속삭였다.
심연과도 같은 의심.
혹시 저 노인마저도 가면으로 자신을 숨긴 칠성교도가 아닐까 하는 불안감, 그것을 자각하고 나면 일어나는 자괴감.
[약해지지 마라.]
심천검의 응원에 백무량의 안광이 더욱 짙은 색을 드러냈다.
이에 노인이 오른손으로 땅을 짚었다.
“출수할 겐가?”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아니라고 한다면, 믿겠나?”
“일단은 믿어야겠지요.”
신뢰 없는 대화는 불안정하게 이어졌다.
어둠 속, 한 쌍의 안광과 노인의 공력이 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싸웠다.
단순하기 그지없던 다툼은 보다 높은 곳으로 향했다.
콰르르……!
태청신공의 공력이 청운으로 유형화했다.
백무량이 품은 심상, 호천풍연이 노인 앞에서 뭉뚝한 날을 드러냈다.
노인은 얼굴에 놀람이 어리더니 빙긋 웃었다.
“좋아, 승부를 내자는 게지.”
“지는 쪽이 사실만을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마침 잘되었네.”
노인이 미소를 지우고는 대종사와 같은 위엄을 드러냈다.
“미안하지만, 내 인내가 바닥을 드러내서 말일세……!”
노인이 땅을 짚었던 손에 공력이 물밀듯이 모였다.
순간 백무량의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금세 풀렸다. 노인의 공력이 뭉클거리며 유형화하고 있었다.
무음의 논검(論劍).
노인이 승낙했음을 알아차리고 눈을 깜빡이던 순간.
쩌적!
호천풍연이 노인의 일 초에 찌그러졌다. 직접적으로 손을 댄 것은 아니었다.
[관음이…….]
심천검이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형태는 옛것, 소림사에 있을 법한 목상(木像).
백무량의 무심한 표정이 조금 풀렸다.
“소림의 고수셨습니까?”
“틀렸네.”
곧바로 대답한 노인이 턱을 매만졌다.
“하면 자네는 곤륜파의 고수가 아닌가……?”
“틀렸습니다.”
백무량의 즉답에 심천검이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양심은 잠시 접어둡시다. 선배, 저 노인의 정체가 궁금하지도 않습니까?’
[……상자의 안을 보자는 건 무시하더니 왜 저 노인은 궁금해하느냐?]
‘이상하지 않습니까. 화 소저와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찾아온 것도 그렇고, 정체를 끝까지 숨기려는 모습이요.’
[그야 그렇지만, 곤륜도의 기상은 대체 어디로 팔아먹은 게냐?]
‘생자(生者)는 저입니다. 사자는 침묵을 지켜 주시고 제 판단을 믿어 주시지요.’
그 말에 심천검이 ‘허, 허허.’ 하며 웃었다. 만일 살아 있는 몸을 가지고 있었다면 백무량을 후려쳤을 기세였다.
하지만 백무량은 한 가지를 확신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말릴 생각이었다면 욕이라도 하셨겠죠.’
[…….]
‘선배의 궁금증은 제가 대신 보여 드리겠습니다.’
[음, 그래. 욕을 내가 먹지는 않으니까.]
심천검의 어정쩡한 승복에 백무량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뒤이어 노인을 바라보았다.
‘이 논검에서 이기려면 상대의 정체를 먼저 파악하거나, 심상을 꺾는 것, 둘 중 하나.’
백무량은 노인에게 입술을 달싹였다.
“이번에는 노인장이 선(先)입니다.”
“그래도 괜찮겠나?”
노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확실히, 방금 본 관음을 보아선 불가의 무공을 펼칠 테고 금강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하지만 백무량에게 있어 불가의 무공은 그다지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소림의 절예는 한번 견식한 바가 있습니다.”
“소림이 아니라니까, 허 참.”
혀를 찬 노인이 마보세를 취하고는 오른손을 내질렀다.
겉보기엔 단순한 정권처럼 보이나, 같이 내디딘 발이 땅을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가공할 공력과 출수의 순간에 펼쳐진 진각이 가히 일절이었다.
그 힘을 따라서 유형화한 공력은 가히 금강.
백무량은 무공의 연원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대력금강장이라.’
다만 진각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는데, 노인이 단서를 흘렸다.
“소림의 것이라고 생각하니 눈이 가려질 수밖에 없을 걸세.”
“음.”
한숨을 내뱉은 백무량이 검을 꺼냈다.
노인이 진심을 보인 이상, 무인이라면 마땅히 지닌 무공을 드러내야만 했다.
단지 많은 걸 드러내지 않고 싶을 뿐.
백무량은 고요히 멈춰 선 채 공력은 운용했다. 청운이 빠르게 회전하여 심상을 분연히 빚어냈다.
호천풍연.
청운의 형상을 본 노인이 짙은 실망감을 표했다.
“또 그 초식인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나 보군.”
“다릅니다.”
백무량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호천풍연의 형세가 갑자기 사방으로 퍼졌다.
청운이 순간적으로 용솟음치고는 강한 와류를 그렸다.
“노인장이 단서를 주었으니, 나도 단서를 주고자 합니다.”
“……?”
“이 초식의 이름은 비류폭이오.”
과거, 사천당가 지하의 석두에게 펼친 호천풍연의 변초.
수십의 검기로 화한 비류폭이 노인의 심상을 분쇄했다.
노인의 표정이 자연스레 굳었다.
심상이란 곧, 무공의 심지.
무인 각자가 추구하는 극도(極度)가 남에게 부서진 셈이다.
분노하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노인의 변화는 그것이 전부였다.
“……강하군.”
“제 무공을 아시겠습니까?”
“곤륜파의 고수이지 않나.”
“틀렸습니다.”
백무량의 즉답에 노인이 옆에 있던 나무를 후려쳤다.
“허튼소리! 방금까지 펼친 무공은 구천화우검이지 않은가!”
“꽤나 자세히 아시는군요.”
“……!”
노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실수였다. 계속된 억지에 짜증을 인내하지 못했다.
백무량은 말없이 안광을 꺼트렸다.
어둠 속에서 그저 노인을 바라보았다.
“칠성교도의 상세를 지켜보러 온 마인인가?”
“곤륜의 무공을 자세히 아는 까닭은 그런 게 아니네.”
“하면……?”
“그래, 이름은 옛적에 버렸으니, 호를 밝히겠네.”
노인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청노(靑老). 자네에겐 익숙지 않은 호일 걸세.”
청노의 말이 옳았다. 백무량은 처음 듣는 별호였다.
그것이 더욱 큰 의심을 불렀다.
‘저런 무위를 가지고 무명이라니……? 혹시 선배는 들어 본 적 있습니까?’
[내 세대의 무인이 어찌 지금까지 살아 있겠느냐? 다만, 소림과 닮은 무공을 품고 있음에도 호가 이상하구나.]
청노.
확실히 불가의 무공을 익힌 무인이 가지고 있을 별호는 아니었다.
백무량은 청노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물었다.
“직접 얼굴을 만져도 되겠습니까?”
“아직 승부가 끝난 게 아니지 않던가?”
백무량과 청노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자연스럽게 불던 바람이 멈췄다.
태청신공과 이름 모를 공력이 서로를 밀어 내며 모닥불의 재를 흩날렸다.
그러다 끝내.
“됐네. 하룻밤 이야기 상대도 해 줄 생각이 없다면, 내가 먼저 떠나겠네.”
청노가 손사래를 치며 등을 돌렸다.
백무량은 청노의 모습이 사라지기 직전에 입술을 떼었다.
“잠깐.”
청노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