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1)
이튿날 새벽.
경장을 걸친 백무량이 처소를 나왔다.
어떠한 때라도 도복을 걸치곤 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잘 생각했다. 칠성교도가 어디서 암약하고 있을지 모르니까.]
심천검의 말에 백무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요귀를 비롯해, 만금상단을 습격했던 고수와 마인 들.
그들이 곤륜파를 공격한 지 이틀도 지나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암…….”
백무량은 졸음을 하품과 함께 몰아냈다.
시선이 자연히 위로 향했다.
한자리에 머무르는 듯하면서도 도도히 흐르는 곤륜산맥의 운해는 시간을 가리지 않았다.
곤륜파의 도사라면 누구나 눈에 담는 불멸(不滅)의 표상.
수백 년 전의 선대와 현세대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풍경.
그것은 역대 마교에 의해 멸문하고, 상처 입고, 피눈물을 흘렸을지언정 달라지지 않는다.
“…….”
B22
[…….]
항상 티격태격했던 백무량과 심천검도 말없이 그 풍경을 공유했다.
그러다 문득, 백무량이 옛 생각을 떠올렸다.
“한때는, 저 운해가 천하를 조율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리 생각했느냐?]
“곤륜산맥이 세상에서 가장 높다기에, 저 구름이 산등성이를 타고 흘러서 강호 전체를 뒤덮고 있을 줄 알았지요.”
[나이를 먹고 강호에 나가니 그게 아니지 않더냐?]
“제 상상이 빚어낸 착각이었지요.”
[흘흘…….]
심천검이 웃음소릴 흘렸다.
자기 또한 그런 생각을 품었던 적이 있노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 대답으로 충분했다.
백무량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서, 입술을 달싹였다.
“선배의 시선이 저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러하지 않더냐.]
곤륜의 운해가 만상을 조율한다.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어린 시절에 품었던 터무니없는 상상, 추억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이젠 상상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두 도사는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압!”
“하!”
이른 새벽에 일어나 수련에 매진하고 있는 도사들.
칠성교도와의 싸움에서 깨달은 부족함을 갈고닦는 모습이 백무량의 시야에 보였다.
아직은 옅지만 머지않아 짙어질 곤륜의 운해.
심천검의 나직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저들을 이끌어 갈 기둥이 셋은 보이는구나.]
심천검은 현종휘와 철유, 유성한을 꼬집는 듯했다.
하지만 백무량이 고개를 나직하게 저었다.
“잘못 보셨군요. 둘입니다.”
[……?]
“종휘는 제 옆에 따라붙을 겁니다.”
[네 사제라고 하여 너무 높게 평가하는 게 아니더냐?]
심천검의 어조에 강한 의문이 드러났다.
백무량은 그저 부드럽게 웃었다.
“두고 보십시오. 내 사제라면 반드시 가능할 테니까.”
그 웃음이 과거 주백천과 닮았음을, 백무량 자신은 알지 못했다.
그렇게 수련장을 한참 바라보던 백무량이 걸음을 옮겼다.
검과 경장, 가벼운 봇짐 하나.
그것이면 길을 나서는 데 충분했다.
***
“산적이다!”
사천성으로 향하는 길에 여자의 외침이 들렸다.
흔하지 않았다. 벽지인 청해성에서 산적이 있을뿐더러, 곤륜파의 영역 안에서 아녀자를 노리다니.
백무량은 잠시 눈을 감고 들려온 거리와 방향을 쫓았다.
[되도록 피는…….]
“그들이 선을 넘었느냐에 따라 다를 겁니다.”
백무량은 심기가 몹시 불쾌했다. 심천검이 하려던 말을 끊어 버릴 만큼.
그걸 자각한 것까지도 더해서, 더욱더.
쩌억!
용천혈에 한가득 담긴 공력이 땅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잘 닦여 있던 길이 한순간에 더러워졌다.
그 소란에 당황한 듯한 음성이 울렸다.
“뭐, 뭐냐!”
“제기랄! 여긴 아무도 없을 거라면서!”
백무량이 눈을 떴다. 한 줄기 외침으론 불분명했던 위치가 이제 선명해졌다.
‘쇳소리와 피 냄새라.’
선은 이미 넘은 모양이다.
스윽.
백무량의 엄지가 칼코등이를 위로 들었다. 휘두르는 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일직선의 검로가 나무를 먼저 베고서 옆으로, 멍청한 표정의 산적들에게로 향했다.
그들에겐 한 줌의 내공조차 아까웠다.
“끄아악!”
한쪽 팔을 잃은 산적이 바닥을 뒹굴었다. 나머지도 마찬가지로 팔을 하나씩 자르며 무력화시켰다.
산적 중 하나가 무릎을 꿇고 빌기도 했지만, 백무량의 검은 무정하기만 했다.
촤르륵!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낸 백무량이 고개를 돌렸다.
“괜찮소?”
“아? 아, 예…….”
여자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에 백무량은 피가 잔뜩 묻은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도복이었으면 몰라도 경장을 걸치고 있으니 무인처럼 보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물며 이곳은 청해성의 벽지.
산적처럼 돌변할지도 모른단 불안감이 표정에서 보였다.
“사정이 있어 경장을 걸쳤으나, 이 근방의 도사요.”
“그, 그러셨군요.”
“무슨 일로 이곳까지 왕래했소?”
묻기는 했지만 내심 예상은 하고 있었다. 이곳까지 왔다면 용무는 대부분 하나.
[그냥 곤륜도라고 밝히지 그랬느냐.]
‘아직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 않습니까?’
칠성교도와의 싸움 이후 경계심이 한층 늘어난 백무량에게 여자는 뜻밖의 용무를 말해 주었다.
“다행이네요. 사실 저는 아미파의 심부름으로 왔거든요.”
“아미?”
마침 아미파로 향하던 길이 아니던가.
백무량은 무뚝뚝했던 표정을 풀고서 부드럽게 웃었다.
“곤륜파로 향하는 길이라면 나에게 먼저 말해 주지 않겠소?”
“그건…….”
“나는 곤륜신성 백무량이오.”
그 말에 여자가 혁낭에서 용모파기를 꺼냈다.
상처라곤 하나도 없는 모습에 백무량은 이상함을 느꼈다.
“그나저나 다치지는 않았소?”
“아미파의 속가제자인데, 어찌 저런 무리한테 당하겠어요?”
여자의 자신만만한 목소리.
불안함을 느낀 백무량이 산적들을 돌아보았다. 그제야 그들에게서 여자가 남긴 검상이 보였다.
심천검이 혀를 강하게 찼다.
[피 냄새가 난다고 다짜고짜…….]
‘어쨌든 산적 아닙니까? 가만히 두었다면 평범한 사람을 괴롭히거나 다치게 했을 부류입니다.’
심천검에게 변명을 쏟아 내는 사이, 여자가 용모파기를 접었다.
“확실히 백 대협이 맞군요. 저는 아미파의 속가제자, 화은열이라고 합니다. 대협의 무용담은 자주 들었어요!”
“크흠, 흠. 그나저나 아미의 심부름이 무엇이오?”
“마침 대협께 전할 쪽지긴 해요.”
“나에게?”
화은열이 손바닥만 한 쪽지를 백무량에게 건넸다.
그 안에는 짧은 몇 마디가 적혀 있었다.
[보타문주께 받은 물건을 빨리.
-정혜신니.]
백무량의 표정이 자연히 굳어졌다.
칠성교도와 싸우다 하루를 지체한 게 아미파에 큰 문제가 될지도 모른단 생각이 불쑥 들었다.
백무량은 화은열에게 가벼운 예를 표했다.
“전해 줘서 고맙소.”
“무슨 말이 적혀 있던가요?”
“말할 순 없지만, 일단 아미파로 갈 생각이오.”
백무량의 말에 화은열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당가로는 가지 않으시나요?”
“당가에도 무슨 일이 있소?”
“아니, 그건 아니고…… 대협께서 당가의 소가주와 연을 맺었다는 소문이 있어서요. 그게 사실인가 했지요.”
사천당가와 친교를 맺긴 했지만, 그 이상은 가지 않았거늘.
백무량은 본능적으로 당문영이 퍼뜨린 소문임을 직감했다. 아무래도 명성이 치솟은 자신을 여러모로 이용하려는 듯했다.
‘아미파와의 용무가 끝나면 당가로 가야겠군요.’
[독이나 쓰는 놈들이 감히 후배를 배필로 들이려고 해?]
왠지 심천검은 자신과 다른 이유로 화가 난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받아야 할 삯이 있다면 본산에서 받을 수 있을 것이오. 그럼 이만…….”
“잠시만요!”
화은열이 다급한 음성으로 백무량의 발목을 붙잡고는 한마디를 툭 던졌다.
“저도 따라가도 될까요?”
“그건 안 되겠소.”
백무량은 분명한 어조로 거절했다.
보타문주와의 약속이 있을뿐더러, 처소에서 챙긴 귀중품이 있었다.
아미복호검.
사 년 동안 보관해 두고 있었던 아미의 옛 무공을 이제는 돌려줄 때.
‘속가제자가 욕심을 내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지.’
솔직하게 말해, 백무량은 속가제자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당장 곤륜파가 어땠던가?
백련교의 난 이래로 속가제자는 본체만체하며 사문을 무시했다.
하물며 운산보를 밀어낸 다음에는 무공을 배우러 자기 자식을 보내기까지 했다.
화은열에 대한 감정은 없었지만, 속가제자라는 신분이 백무량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아미파에 볼일이 있다면 따로 찾아가길 바라오.”
“으음…….”
화은열이 입술을 모은 채 백무량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런데도 백무량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마치 금강석과 같았다.
“알겠어요.”
화은열이 항복하겠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사천까지만 따라갈게요. 방금처럼 산적과 마주치면 무서우니까요.”
“아미파의 속가제자라고 하지 않았소? 어중이떠중이는 혼자서도 무찌를 수 있을 거요.”
백무량은 냉정한 어조로 화은열을 밀어냈다. 가뜩이나 바쁜데 어깨에 짐 덩어리를 얹을 순 없었다.
뜻이 굳건하다는 걸 알아차린 화은열이 등을 돌렸다.
“알겠어요. 다음에 연이 있다면 그때 뵈어요.”
“그러지요.”
그 말을 끝으로 백무량은 아미파를 향해 신법을 펼쳤다.
***
[보타문주가 준 물건이 뭔지 볼 생각은 없더냐?]
심천검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자, 백무량은 한쪽 입술을 씰룩거렸다.
‘궁금하지도 않고,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왈패나 진배없이 행동하고 말하는 놈이 쓸데없이 약속 하나는 잘 지키는구나!]
‘뭣보다, 선배 말대로 했다가 피해를 보는 건 저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 그게 본심이겠지.]
백무량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솔직히 궁금하기는 했다. 다른 때였다면 심천검의 말에 따라 슬그머니 목함을 열어 봤을 터였다.
하지만 화은열이 전해 준 편지.
그 안에 담긴 다급함이 호기심과 충동을 눌렀다.
‘아니, 근데 그걸 같이 보고도 안쪽을 보자는 말이 나옵니까?’
[크흠.]
심천검이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헛기침했다.
이제 앞으로 한 시진 동안은 조용하리라.
만족감을 느낀 백무량이 하늘을 보았다.
새벽에 출발해서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오늘은 이쯤에서 멈춰 볼까.”
백무량의 혼잣말에 멀리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예전이었다면 들리지 않았을 테지만, 태청신공의 단계가 대성에 다다르면서 생긴 조화.
백무량은 고개를 홱 돌리며 외쳤다.
“누구더냐!”
소림의 사자후를 연상케 하는 외침에 나뭇가지가 세차게 흔들렸다.
귓전을 찢어 놓을 정도로 강력하진 않았지만,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서는 못 배길 터.
백무량의 눈이 어둠 속에서 형형한 빛을 드러냈다.
태청신공으로 우화한 수십 년 공력이 시퍼런 광망을 빚어낸 것이다.
서서히 깔리기 시작하는 어둠이 무색했다.
뒤이어.
“허, 허허…….”
누더기를 골백번은 기운 듯한 남루를 걸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다네.”
“…….”
“혹시 하룻밤만 말 상대가 되어 주겠는가?”
수십 년 공력이 담긴 외침에도 아무렇지 않은 노인이라.
백무량은 노인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림에서 노인과 아이는 조심하라는 격언, 알고 있느냐?]
‘예, 알고 있기는 하지요.’
하지만 위험할 것 같다고 하여 등을 보이는 건 백무량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그러지요.”
백무량의 말에 노인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