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56화 (156/275)

만남 (3)

“내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떠나겠다고 말했네.”

청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갑게 불어온 바람에 느리지만 묵직한 기파가 실려 있다.

청노의 저의는 명확했다.

다음에 이어질 대화는 말이 아니라 검이라는 것.

백무량은 한쪽 입술을 씰룩였다. 단전에 잠자고 있던 공력이 대맥을 거칠게 휘돌았다.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청노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한 번의 실수가 싸움으로 이어지기 시작하니, 좋지 않았다.

정체를 숨기고 칠성교도의 습격에 대한 성패 여부를 확인하러 왔던 발걸음이 백무량에게 붙잡혔다.

여름에 가까워지는 봄 어딘가.

숲을 쏘다니는 벌레와 새 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혔다. 백무량의 칼끝에 검강이 말없이 빚어졌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고요 속에서 문답이 시작되었다.

“청요귀를 아십니까?”

“……모르네.”

“그 옆에 있던 비도의 고수는 어떻습니까?”

“알지 못하네.”

거기까지 대답한 청노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백무량은 그 안에서 진의를 읽어 냈다.

조소.

이런 의미 없는 대화를 이어 갈 이유가 있냐는 웃음이 백무량에게는 보였다.

“한데 이상하군. 이곳은 무림, 뜻을 관철하려거든 지닌 무공을 드러내야지.”

“……!”

“가벼운 여흥은 여기서 끝일세.”

청노가 오른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바람에 스며 있던 기파가 일권에 쏠리는 듯한 감각.

백무량의 보폭이 어깨만큼 늘어났다. 숨을 고르는 순간과 전신이 기수식을 취하는 것까지 한 호흡이었다.

“자, 곤륜의 신성이여, 일 초를 받으라.”

청노의 오른 주먹이 앞으로 향하니.

“이 초식은 공진격(空震擊)이라고 한다.”

그 혼잣말은 주술을 펼치는 주문처럼 팔방으로 퍼졌다. 마치 청노를 중심으로 파문이 일어난 듯했다.

뒤이어 공력 사이에 똬리를 틀고 있던 마기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줄곧 들려오던 벌레와 새의 소리가 멈췄다. 밤하늘 아래로 많은 그림자가 비산하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까아악!

유일하게 까마귀만이 마기를 피하지 못하고 죽은 새들의 사체를 향해 날아갔다.

[주변 다섯 장 안의 새가 피하지 못하고 죽을 정도라, 참으로 지독하구나.]

방심하지 말라는 심천검의 전언.

백무량은 눈앞까지 치달은 공진격을 향해 우수를 휘둘렀다.

창천명월과 검뢰벽천이 뒤섞인 검초.

운해로 이루어진 경파(鯨波)가 공진격을 밀어 내며 찢었다.

백무량은 그 틈을 파고들며 청노에게 달려들었다.

“네놈은 백련교도더냐?”

가면을 쓰지 않은 마인이라면 당연히 백련교일 터.

백무량의 의문에 청노가 말없이 비웃었다. 모닥불 앞에서 인자한 척하던 모습과는 달랐다.

“노부와 손을 섞을 자격은 있는 놈이로다.”

청노의 진각에서 이어지는 정권.

백무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비류폭에 의해 찢어졌던 심상이었다.

[녹록지는 않을 게다. 논검이 아니라 생사투가 되었으니까.]

‘죽이지 않을 겁니다.’

[뭐라?]

‘칠성교도와 백련교. 그들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아직 미지수인데, 그걸 알려 줄 사람이 눈앞에 있지 않습니까.’

백무량의 검에 운해가 맺혔다.

수백, 수천 개의 빗줄기가 칼날을 맴돌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청노는 적임에도 순수하게 감탄했다.

“과연, 화우검(花雨劍)이라!”

저 검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 것인가, 청노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백무량이 아직 자신을 백련교로 착각하고 있는 동안 많은 것을 봐 두어야 했다.

“자, 오라!”

청노의 외침에 백무량은 검을 휘둘렀다.

수천의 빗줄기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비산하여 꽃잎으로 변화했다.

그 모습이 마치 화산파의 매화검과 같아, 청노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저건……!”

화산파의 검법이 아니던가?

그 뒷말을 백무량의 초식이 삼켰다.

구천화우검의 삼초, 호천풍연.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것은 곤륜의 무학만이 아니었다.

스각!

청노의 팔뚝에 가느다란 상처가 생겼다.

낙매분분(落梅紛紛), 떨어지는 꽃잎이 어지러이 날리듯.

본디 매화검의 초식일 무학이 호천풍연에 녹았다.

운해로 이루어진 꽃잎이 청노의 정권을 무시하고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곤륜의 검이되, 극도의 화검이란 말인가!’

청노의 눈빛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경악에 소스라칠 정도였다.

순간 백무량의 변초에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이번에는 내 초식을 받으라.”

안쪽으로 파고들던 꽃잎이 하나로 뭉쳐, 청노의 기해혈을 향해 내리꽂히니.

백무량은 검을 청노에게 겨눴다.

“천간투(天干透)라고 한다.”

쩌억!

하나로 뭉친 검강이 경파를 일으켰다. 백무량의 의념이 청노의 목숨을 취하기를 원했다.

“크헉!”

청노의 몸이 뒤로 밀려 나갔다. 경파의 힘을 이기지 못한 땅거죽이 저절로 갈라지며 나무뿌리가 드러났다.

검은 피를 한 됫박이나 토해 낸 청노가 오른발로 땅을 지르밟았다.

“큭, 이놈!”

한 발을 축으로, 바위산을 밀어 내듯이.

청노가 어깨로 경파를 연거푸 때렸다.

살이 찢어져 뼈가 드러날 정도였으나, 눈에 핏발이 서도 물러남이 없었다.

백무량은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며 물었다.

“백련교도더냐?”

“크흐, 큭!”

청노가 핏물을 왈칵거렸다. 내부가 진탕이 되고 나서야 경파가 잦아들었다.

어쩌면 백무량이 조절했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하지만 하나만은 확신했다.

‘천명은 낙매신검이 아니라, 곤륜신성에게 있었구나!’

일찍 알았다면 먼저 제거하고도 남았을 것을.

뒤늦은 후회가 들었지만, 그것보다 더욱 큰 감정이 있었다.

“과연, 다행이로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게냐?”

“곤륜파를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정말로, 무시할 필요가 없어지지 않았더냐?”

청노가 팔자주름을 드러내며 웃었다.

피로 젖은 웃음에 백무량의 눈살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

“똑바로 말해라.”

“강호에는 칠성교와 백련교만 있는 것이 아니다.”

“……!”

백무량은 순간 주백천이 남긴 서책을 떠올렸다.

그곳에 분명, 다른 마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천마신교와 성화교.

‘설마 다른 마교도 암약하고 있었단 건가?’

청노를 제압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백무량이 백선신검을 겨누던 그때, 청노 옆으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낡은 가면을 쓴 흰색 장발.

그가 백무량에게 한 가지를 제안했다.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어떻겠나?”

“네놈은 누구냐?”

“듣는다면 물러날 수가 없을 텐데.”

“그건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

남자의 느릿느릿한 어조에 심천검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이번에는 물러나라.]

‘예?’

[저 남자가 바로 칠성교주다.]

‘……!’

백무량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걸 본 남자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 그러지? 내가 누군지 알겠나?”

“성화교가 아니더냐?”

“진짜 성화교도가 듣는다면 분노를 토하겠군.”

여유롭게 웃은 남자가 청노의 어깨를 두드렸다.

“멀리서 보기만 하라고 했더니, 청노 이게 무슨 꼴이오?”

“…….”

“가끔 그쪽의 교주가 그리울 때가 있다오.”

“그만, 그만하시오. 내가 잘못했으니.”

청노의 눈이 백무량에게 향했다. 이유야 뻔했다.

‘내가 조금의 정보라도 취하는 게 싫다 이건가.’

백무량이 가만히 대화를 듣고만 있자, 남자가 시선을 돌렸다.

“물러나기 싫다면, 내가 직접 앉혀 주지.”

남자의 한마디를 들은 것으로 백무량의 숨이 갑갑해졌다.

가면 아래에 있는 무언가가 백무량을 관통하는 듯했다.

[태청신공을 전력으로 운용해라. 아직은 네 상대가 아니야.]

심천검의 조언에 따라 백무량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굴욕이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지만, 이길 수 없는 상대로 고집을 부릴 순 없었다.

[다음에 만나면 이길 수 있을 게다. 내가 옆에서 도울 터이니.]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힘들다는 것. 압니다.’

백무량은 칠성교주를 노려보며 의지를 다졌다.

주먹을 꽉 쥐며 칠성교주의 가면, 체형, 목소리 따위를 머릿속에 기입했다.

다르게 보면 기회였다.

정체조차 모르던 때와 비교하면, 적이 명확해졌다. 호광성에서 지나치듯이 만났던 순간과는 달랐다.

그러나 가만히 물러가는 걸 두고 볼 순 없다.

백무량이 태청신공을 운용하는 것을 잠시 멈추고, 칠성교주의 등을 향해 외쳤다.

“네놈들, 백련교주와 동맹한 것이냐?”

칠성교주의 걸음이 멈췄다.

“내가 왜 그것을 말해야 하지?”

평온한 목소리 사이에 약간의 주저함이 느껴졌다.

백무량의 입술이 비틀렸다.

빌어먹을 마교 새끼들, 속마음이 툭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막았다.

“싫다면, 하지 마라. 어차피 나한테는 다 쳐 죽일 적일 뿐이니.”

백무량의 말에서 투박한 적의를 느낀 칠성교주가 청노를 땅에 내려놓았다.

표정은…… 가면에 가려져 있다. 유일하게 드러난 두 눈에서 무심함과 초탈함이 느껴졌다.

마인과는 거리가 너무나도 먼 시선.

칠성교의 특성을 떠올린 백무량이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잡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

[후배!]

“지금은 말리지 마십시오.”

들불 같은 분노가 일었다.

저런 무위를 가지고 있음에도 뭐가 아쉬워서, 강호를 어지럽히고 있는지, 백무량은 답답함을 금치 못했다.

“너는 대체 뭣 때문에 강호를 어지럽히느냐? 너희 또한, 백련교처럼 가증스러운 대의명분이 있느냐?”

과거, 백련교는 이렇게 말했다.

기름지고 비옥한 땅을 탐하고 싶었을 뿐이라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마공을 익힐 수밖에 없었다고.

처음에는 그것을 믿었다. 가증스러운 이유를 믿었던 대가는 두 곤륜도의 죽음이었다.

저들이라고 다를 게 없다.

백무량의 적의가 시선에서 의념으로 화했다. 운해가 고개를 쳐드니 소나무보다 높은 벽이 만들어졌다.

“……글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칠성교주가 가벼운 말을 내뱉었다. 별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듯, 턱을 매만지면서.

“하고자 하는 것을 할 뿐이다.”

“뭐라고 하였느냐?”

“아주 예전, 너희가 무공이라는 수단을 궁리하기 이전부터.”

칠성교주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칠성이 한 존자에게 뜻을 고하였다. 그 의지가 이어졌고, 그들이 바로 나다.”

칠성교주의 음성에 여러 목소리가 겹쳤다.

정확하게는, 가면 아래에서 흘러나온 것들이었다.

[물러나야 한다.]

“내가 칠성교의 역사를 토설(吐說)하길 바라는가, 감히 보잘것없는 너에게?”

하늘을 가리켰던 칠성교주의 손가락이 백무량을 향했다.

그 움직임이 계속될수록 백무량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파득, 양발이 땅에 파고들었다. 기혈이 저절로 들끓으며 턱 아래로 울혈이 들끓었다. 전신이 비명을 지르는 감각.

백련교주와는 다른 강함이 칠성교주에게 있었다.

“멀리서 들려왔다. 그래, 이곳은 무림. 뜻을 관철하려거든 마땅히 무공을 드러내라고 하였지.”

까득.

백무량은 말없이 주먹을 쥐었다. 강한 의념, 운해에서 일어난 경파가 백선신검을 타고 흘렀다.

“너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가?”

칠성교주가 가볍게 웃었다. 손가락이 점차 기울어지니 자연기가 백무량의 상단전을 짓눌렀다.

그렇게 손가락이 완전히 백무량을 향하니, 압력을 이기지 못한 백무량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역시나.”

칠성교주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백무량에게 다가갔다.

아무리 강하다고는 하나 겨우 약관, 편혼지(片魂指)에게 대항할 수 없을 터였다.

이제 목숨만 빼앗으면 되건만.

“허.”

백무량이 고개를 들었다.

칠성교주의 얼굴에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

“너, 다른 사람이군?”

“…….”

백무량, 아니 심천검은 말없이 검을 들었다.

본래의 주인을 만난 백선신검이 검명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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