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요귀 (4)
화르륵!
비도가 쪼개지면서 검은 불씨가 허공을 잠식했다. 현종휘의 낯빛이 커져 가는 불꽃에 벌겋게 변했다.
쳐 낸다, 혹은 꺼트린다.
택일의 상황 속에서 현종휘는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았다.
그저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가장 빠르게 펼칠 수 있는 일 초.’
스르릉!
백무량이 앞서 펼쳤듯, 서늘한 검명이 허공을 울렸다.
몸집을 키워 가던 암화(暗火)가 제 몸을 꿈틀거렸다.
현종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적게 호흡했다.
십이정경을 거쳐 세맥을 닦은 호흡이 위로 솟구쳤다.
시퍼런 광망이 얽힌 눈동자에 담은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이 쥔 칼끝뿐.
‘이 초식의 이름은 균천관일이라고 하니.’
현종휘의 칼끝이 암화를 향해 내질러졌다.
세맥에서 솟구친 태청신공의 공력이 칼날을 타고 흘렀다.
쩌적!
현종휘를 삼키려던 암화가 공력에 의해 쪼개졌다.
잿더미가 된 나무가 자그마한 바람에 흩어지듯, 사방팔방으로 날아가는 마기.
백무량이 보았다면 깜짝 놀랐을 터였다.
“내가 이런 검을 펼칠 수 있었을 줄이야…….”
현종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백상과의 생사투로 발아한 재능.
그것이 거듭된 위기로 인해 급격히 성장했다.
칠 년 동안의 노력과 의지를 자양분 삼은 채, 더욱더 높은 곳으로.
겨우 열일곱의 나이에 심상을 유형화할 경지에 도달했다.
그걸 모르기에 현종휘는 자신의 일 초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뭐, 나중에 사조님한테 여쭤보면 되겠지.”
탁!
검에 묻은 마기를 털어 낸 현종휘가 납검했다.
이윽고 뒤를 돌아, 동문들을 바라보니.
“역시…….”
“현 사형도 괴물이셨구나.”
“무슨 헛소리들을 하느냐! 너희도 정진하면 할 수 있는 일 초이니라!”
사제들을 다그친 현종휘가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 백무량이 펼쳤던 창천명월의 궤적을 따라가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괜찮느냐!”
대사형, 백무량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현종휘가 피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믿었다.”
백무량과 현종휘가 시선을 교환했다.
***
‘무림인은 싸우는 것밖에 모른다.’
송우현이 주판을 쥐기 시작했을 때부터 남몰래 속으로 되뇌던 욕이었다.
문제는 그걸 알면서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강호에 적을 둔 이상 무지막지한 손해를 항상 감안해야 한다는 게 늘 불만스러웠다.
‘그래도, 적어도 도사라면 뭘 부수거나 할 일은 없겠지.’
곤륜파를 밑바닥에서부터 가꾸면서 내심 기대했던 것이 있었거늘.
“…….”
송우현의 귓가에 ‘삐-’ 하는 소음이 울렸다.
여러 놈을 먹이고, 재우고, 삯을 줘 가면서 올렸던 건물이 하나같이 무너져 있었다.
허탈한 웃음과 쌍소리가 연달아서 터졌다.
더욱 우스운 점이 있다면.
“다행히도 곤륜도의 분전 덕분에 멸문하지 않았소!”
‘다행?’
현노윤의 말에 송우현이 한쪽 입술을 씰룩거렸다.
냉정하게 보자면, 맞다.
가꾼 정원이 완전히 불타 버린 것보다는 줄기가 잘린 게 낫긴 했다.
하지만 저걸 칠 년 동안 세우고 보수한 자신은 뭔가.
“……무량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제자가 금방 불러올 거요.”
송우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졌다.
어차피 일은 벌어졌다. ‘다행히’ 멸문은 하지 않았다지만 화풀이할 상대가 필요했다.
끼이익.
백무량이 방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송우현이 물었다.
“너는 대체 뭘 하고 있었느냐?”
늙은 상인의 꼬일 대로 꼬인 성미라고 해도 좋았다.
한데 젊은 도사가 상상 이상의 답을 내놓았다.
“시간이 없습니다.”
“……뭐?”
송우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평상시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백무량이 무표정했고, 말이 대범했다.
자신에게 늘 빚을 지고 있다는 듯 행동하던 백무량처럼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고 했습니다.”
“허, 이놈, 누군 시간이 많아서 여기까지 올라온 줄 알아? 곤륜파가 공격당했다고 하니, 상벽이 대신에 올라온 게다!”
송우현은 백무량의 눈치를 살폈다.
평소였다면 따끔하게 꾸짖었을 텐데, 지금은 어째 전장을 눈앞에 둔 무인처럼 보였다.
‘내가 쟤한테 실수한 적이 있던가?’
송우현이 눈동자를 굴리던 도중에, 백무량이 선뜻 말을 붙였다.
“이번 강호행에서 만금상단주를 만났습니다.”
“……조가 놈을 말이냐?”
“예, 송 노야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여전히 싸늘한 백무량의 어조.
그러나 송우현의 얼굴에는 점차 미소가 겹쳤다. 왜 저렇게 말하는지 이제야 감이 잡혔다.
“허, 여전히 날 골리는 데는 선수로구나.”
“……?”
“어쭙잖은 연기는 그만둬라!”
백무량이 가볍게 웃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웃음을 참느라 혼났습니다. 노야가 제 눈치를 보다니, 제법 값진 구경이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장문인?”
“……흘흘.”
현노윤이 곱게 기른 수염을 매만졌다.
송우현의 눈에는 두 도사 모두 얄밉게 보였다. 뺨이 저절로 부르르 떨렸다.
“저를 놀리느라 재미 좀 보신 모양입니다.”
“크흠, 흠. 나도 방금 전음으로 들었소.”
현노윤이 슬쩍 발을 빼자, 송우현의 시선이 백무량에게 향했다.
백무량은 그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 내며 웃음소릴 터트렸다.
“하하하, 이게 다 배움 아니겠습니까? 언제까지 노야한테 골림만 당할 순 없지요.”
“너……!”
“상단주께서 저한테 아주 값진 선물을 해 주셨습니다. 누구와는 다르게, 그릇이 크시더군요.”
“허, 허허!”
할 말을 잃었다는 듯 하늘을 향해 헛기침을 한 송우현이 인상을 한가득 찌푸렸다.
“그러면 그놈한테 어! 곤륜파의 보수를 맡기고 그러지 그러냐!”
“아이고, 노야, 그러다가 쓰러지십니다.”
“나를 놀려 먹으려고 부른 게냐?”
처음에는 단순히 화가 났던 송우현이었지만, 긴 세월 동안 쌓은 경험이 백무량의 언동을 이상하게 여겼다.
‘심각한 상황이 아니던가?’
칠성교도가 공격해서 수많은 곤륜도가 상처를 입었다. 건물 또한 마찬가지.
한데 대사형이라는 백무량은 자신을 놀리거나 조원양과 비교하는 둥 가벼운 태도였다.
갑자기 머리를 얻어맞은 게 아니고서야, 백무량답지 않다.
“장난은 거기까지 하여라.”
송우현은 차분한 목소리로 백무량을 압박했다.
그러자 현노윤과 백무량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빠졌다.
“제가 말하지요.”
먼저 서두를 꺼낸 백무량이 송우현에게 전음을 보냈다.
[맞습니다. 노야 말대로 웃으면서 넘길 사안이 아니지요. 제가 없었다면 변방의 문파들처럼 칠성교에게 큰 피해를 입었거나 멸문당했을 겁니다.]
“…….”
[이걸 동도에게 밝히면 어떨까요? 하물며 사문의 역사에 얽힌 주적이라고 말한다면.]
백무량의 전음을 끝까지 들은 송우현이 필담(筆談)으로 답했다.
-어디까지나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과 다르지 않다. 언젠가는 알게 될 사실이지 않느냐?
[기만이라고 하면 기만이겠지만, 다르게 말하고 싶습니다.]
백무량은 송우현의 필담 아래에 두 단어를 적었다.
용기(勇氣).
영웅심(英雄心).
현 강호에서는 옛말, 혹은 치기처럼 여겨지는 낱말들.
송우현의 시선이 잠시 고정되었다.
“……허.”
다른 무인이 그렇게 말했다면 속으로 ‘싸우는 것밖에 모르는 무림인 주제에 대의명분 하나는 기가 막힌다’며 욕했을 터였다.
수십 년 전부터 품었던 가치관이었으니까.
하지만 백무량이 저 낱말들을 적자, 무게가 실렸다. 획 하나하나에 실린 기풍이 있었다.
그때 백무량의 전음이 들려왔다.
[지금도 우리의 대화를 듣기 위해 몇몇이 벽에 귀를 대고 있을 겁니다. 상황이 어떤지 궁금하겠지요.]
-그래서, 대수롭지 않은 일인 척하겠다?
백무량이 씨익 웃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선대가 마땅히 받아야 했을 갈채까지 들려줄 생각입니다.]
-백련교의 난 말이냐?
한숨을 내뱉은 송우현이 붓을 놓았다.
이제야 백무량과 현노윤의 진의가 보였다.
“그래, 건물이야 고치면 그만이지.”
“무림맹에서 많은 지원을 보낼 겁니다. 그자들이 불편을 겪지 않게 노야께서 도와주십시오.”
“하기야…… 그것도 그렇지.”
송우현은 큰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백련교에 이어 칠성교와 싸운 곤륜파야말로 구파일방의 보배일 테니!”
[티가 너무 나지 않습니까?]
송우현은 백무량의 전음을 무시했다.
“건물 몇 개쯤 무너진 거야 신경 쓰지 말게!”
[표정이 좋지 않으십니다만.]
“……오늘 일이 강호에 알려지면 모두가 갈채를 보내고 도움의 손길을 보낼 테니까!”
마교에 맞설 용기와 영웅심을 곤륜도에게 고취시킨다.
그 진의에 따라 송우현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크게 외쳤다.
한편으로는 백무량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제 막 약관이 된 녀석이 할 생각이 아니거늘.’
모름지기 일의 성패는 기세에서 시작되기 마련.
한데 백무량이 그걸 자연스럽게 끌어올릴 방도를 찾았다.
곤륜파의 실질적인 총관인 자신이 확언한다면, 무너진 건물이나 불안한 마음을 머릿속에서 지우리란 방책.
그게 먹혔는지는 밖으로 나가면 알게 될 터였다.
“이제 그만 나가 보마!”
송우현이 문을 열자, 어색한 표정의 두 곤륜도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 어서 수련이나 하세!”
“물론이지!”
수련장으로 향하는 걸음조차 자연스럽지 않고, 되레 삐걱거리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본 백무량과 현노윤이 피식 웃었다.
“허, 참.”
오늘따라 왜 이렇게 혀를 많이 차게 되는 건지.
잠시 턱을 매만지던 송우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하면 무량아, 너는 어찌할 생각이냐?”
“……예?”
“모르는 척하지 마라. 내가 무림맹과 공동파, 당가에 소식을 알리는 동안 가만히 있진 않을 거 아니냐!”
송우현의 말에 백무량이 머쓱한 웃음을 머금었다.
“너무 오래 알고 지낸 모양입니다. 제 행동이 읽히는 걸 보면.”
“어디더냐?”
“아미파로 향할 생각입니다.”
“대사형인 네가 남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지금이 아니면 갈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송우현의 시선이 현노윤에게 향했다.
“먼저 이야기가 된 겁니까, 장문인?”
“무량이가 곤륜파의 대사형으로서 아미파에 전해 줄 신물이 있소.”
“하면 어쩔 수 없겠군요.”
이번에 자신을 이용했으니, 백무량을 이것저것에 써먹을 작정이었거늘.
송우현은 알겠다는 듯 두 손을 모아 올렸다.
백무량의 태도가 얄밉기는 하지만 곤륜파의 성장을 위해서는 자신도 팔을 걷어붙일 때였다.
“다음에는 무림맹에서 온 사람과 함께 찾아오겠습니다.”
“언제든지요.”
현노윤이 가볍게 예를 표했다.
***
같은 시각.
현종휘는 수련장 중앙에서 검을 쥔 채 싸움을 회상했다.
‘나는 아직 대사형에 비하면 멀었어.’
많은 것을 얻기는 했다.
백상을 상대했던 경험과, 비도를 쪼개던 그 순간.
뒤이어 일어난 암화를 꺼트리기까지 현종휘의 정신은 평소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
손을 뻗으면 백무량의 옷자락에는 닿을 정도까지.
‘그걸 내 마음대로 펼칠 수 있다면,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거야.’
현종휘가 검을 두 손으로 쥔 그때.
칠성교도와 함께 싸웠던 사제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사형!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제 무공도 봐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사제들의 눈빛에 의지와 열의가 충만했다.
“그래, 그러자꾸나.”
현종휘는 밝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