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요귀 (3)
두 시선이 마주친 직후, 백상이 몸을 돌렸다.
비도를 날린다는 생각은 곧바로 지웠다. 청요귀를 죽이고도 저만한 공력을 유지하고 있다면 필패일 터였다.
“후퇴해라!”
백상의 외침에 일곱 마인이 곤륜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백무량이 움직였다. 대지를 짓밟고, 여력을 짜내듯이 앞으로 내디뎠다.
쩌억!
습기를 머금은 땅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그 광경에 칠성교도와 생사투를 벌이던 곤륜도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대사형이 승리했다!”
“대사형의 등을 좇아라! 도망치지 못하도록 붙잡아라!”
그 외침에 백무량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가장 선두에 서 있는 곤륜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훌륭한 사제를 두었어.]
‘나도 압니다.’
현종휘.
청운검협이라는 별호가 아직 어색하게 들렸지만, 백상을 상대로 물러나지 않고 끝까지 동문을 지켰다.
그 모습만으로 현종휘는 명예를 갖출 자격이 있었다.
백무량은 현종휘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냈다.
피곤함에 절어 있던 현종휘가 눈웃음 지었다.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스르릉!
내공을 머금은 백선신검에서 서슬 퍼런 검명이 울렸다.
선기로 가득한 청운이 도망치는 마인들의 뒤를 빠르게 쫓았다.
“사지 멀쩡하게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백무량의 나직한 목소리가 백상의 귓전을 간지럽혔다.
가장 먼저 등을 돌린 백상에게 들릴 정도라면, 뒤는 어떠하랴.
“크윽……!”
고통을 참지 못한 마인 하나가 신음을 흘렸다. 귀에서 선홍색 핏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백무량에게 음공의 조예는 없었지만, 수없이 마인과 싸우며 터득한 지식이 있었다.
선기는 마공과 상극이다.
운해와 운룡의 문양 또한 마인에 민감한 편이다.
이 모두 사형의 안배에서 얻은 것이니, 그것을 조화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단련한다.
그것이 바로 백무량이 사 년 동안 침묵한 이유였다.
약관이 된 백무량에게 있어 선기는 또 하나의 공력이었으며, 청운의 운용은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
따라서.
“곤륜도를 곤륜산맥에서 뿌리칠 생각을 하다니, 어리석은 놈들.”
백무량은 마인들을 차갑게 비웃었다.
뒤이어 청운을 머금은 백선신검을 강하게 휘두르니.
촤악!
후미에 있던 마인 서넛의 등이 갈라졌다.
기이한 점은 등짝에 새겨진 검흔.
좌에서 우, 혹은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진 흔적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구름의 형체를 한 무언가가 파먹은 듯한 상처였다.
하물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어째서…….”
식은땀이 마인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마기로 출혈을 막고 도망칠 생각이었을 테지만, 청운이 남긴 상처에 범접하지 못했다.
몸은 어떠한가.
선기가 전신에 가득 침범해서는, 힘줄이 제 역할을 하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관절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마인의 얼굴에 들어찬 절망과 공포.
백무량은 그것을 보지도 않고, 무심하게 검을 휘둘렀다.
스걱!
능수능란하게 펼쳐진 창천명월이 마인 서넛의 목숨을 훔쳤다.
그러는 동안에도 백무량의 신법은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어딜 도망치려고 하느냐.]
백무량의 전음이 백상의 목덜미를 훑었다.
그 모습이 마치 사신과 같았다.
무신경하게 휘두르는 일 검마다 마인들이 확실하게 죽어 가는 모습이라니.
백상은 속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여유가 된다면 두 눈을 가린 채 웃고 싶었다.
‘저렇게 어린 놈에게 두 번이나 도망치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나도 한심하구나.’
확실히, 청요귀의 죽음에 동요했다.
삼존 중에서도 가장 오래 살아온 그였기에 반드시 이길 거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백무량에게서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건 언제나 사냥꾼이어야 할 백상이 느낄 감정이 아니었다.
‘하물며 전격적인 습격이었거늘.’
어째서 이렇게 되었나.
같은 칠성교도의 목숨을 버려 가면서 연명해야 하는가.
백상의 웃음이 뭉개졌다.
언제나 똑바로 쓰여 있던 가면이 조금씩 삐뚤어지며 내면의 귀호(鬼虎)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 아직은 아냐.”
백상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 가면을 부숴서 백무량을 이긴다 한들, 정신을 수습할 칠성교주가 없었다.
그 생각까지 하고 나니 도리어 의아해졌다.
‘이렇게까지 몰린 적이 있었던가?’
이제 남은 마인은 겨우 두셋.
신법이 가장 뛰어난 마인일지언정 백무량의 속도에 미치지 못했다.
그들이 죽고 나면 반드시 자신을 노릴 터였다.
‘만일 나까지 죽는다면…….’
칠성교 삼존의 절멸.
백상은 칠성교주 괴성의 반응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백무량에게 복수하겠다며 분노해도, 결국 대의를 위해 움직일 남자였다.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되어 있으니까.
“하.”
그렇게 생각하니 헛웃음이 터졌다.
죽어도 슬퍼할 놈이 없다면, 더욱 치열하게 살아남아 주리라.
그 집념이 백상의 마기를 일점으로 모았다.
‘요현처럼 얼굴을 뺏거나, 청요귀처럼 강하지 못할지언정.’
약자이기에 절실하게 강구하는 법이다.
백상의 우수가 한순간 움직였다.
강하게 내던진 비도가 백무량의 미간을 향해 쏘아졌다.
“이따위 것.”
백무량이 눈을 깜빡이자 청운이 거세게 움직였다. 그것만으로 비도는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그걸 보고 백상은 피식 웃었다.
백무량이라면 능히 피할 수 있음에도, 굳이 청운을 움직이게 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답은 뒤에 있겠지.’
일점으로 모은 마기를 하나의 비도에 담았다.
잠깐 고개를 들었던 귀호의 기운까지 억지로 밀어 넣으니,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비도가 강하게 흔들렸다.
그러다 임계점이 달한 순간, 백상이 비도를 강하게 내던졌다.
“또냐!”
이제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백무량이 청운을 제 몸처럼 휘둘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
백무량의 옆을 스친 비도가 곤륜파를 향해 쏘아졌다.
겨우 손바닥만 한 칼날에 불과하나, 억지로 밀어 넣은 기운은 언덕 하나를 멸할 정도로 컸다.
칠성교도와의 싸움으로 지친 곤륜도라면 과연 어떨까?
백상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백무량에겐 답이 하나밖에 없는 양자택일일 터였다.
“놈!”
고성을 버럭 내지른 백무량이 좌수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하늘에 부유해 있던 청운이 뇌기를 담은 채 백상에게 쏘아졌다.
꽈르르르!
수십 그루의 나무를 바싹 태워 버린 뇌전이 백상의 눈앞까지 치달았다.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극에 이른 분광뇌운결이 선기를 머금은 청운에 실린 셈이다.
찰나 동안, 백상이 입술을 뒤틀었다.
‘맞는다면 어떻게 될까?’
백무량에게 처음으로 죽은 마인 서넛처럼 사지가 마비되리라.
어쩌면 그대로 즉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상의 시선은 백무량에게 향했다.
이깟 뇌운 따위, 죽을지도 모른단 가능성에 불과하지만, 백무량의 칼날은 확실한 죽음이었다.
백상은 짐짓 여유로운 척 백무량에게 전음을 보냈다.
[나와 같이 어울리던 그 곤륜도, 비도를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으냐?]
“……!”
백무량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대로 구천화우검을 펼친다면 백상을 확실하게 죽일 수 있지만, 현종휘의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그때 심천검이 장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믿어라. 네 사제이며, 제자이지 않으냐.]
‘하지만.’
백무량은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다.
평소라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겠지만, 마인이 얽히면 서슴없이 증오를 드러내는 심천검이었다.
현종휘는 심천검에게 그다지 중요한 사람이 아니니, 저런 말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 의심이 백무량의 생각을 흐리게 만들 때, 심천검이 자신의 과거사를 드러냈다.
[나는 그러지 못해서 청요귀를 살려 보냈다. 그 일에 앙심을 품은 청요귀가 사제를 죽였지.]
너는 어떠냐는 듯.
심천검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에 백무량의 흐렸던 시야가 탁 트이는 듯했다.
‘저는 사제를 화초처럼 키우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네 할 일을 해라.]
심천검의 시선이 비도가 날아간 방향으로 향했다.
[네 사제 또한, 자기가 할 일을 마땅히 행할 터이니.]
꽈악.
백무량이 백선신검을 쥐었다.
심천검과의 대화는 제법 길었으나, 흐른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이 또한 검해의 심상이 도와준 것이리라.
백무량은 속으로 많은 사람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 안에는 자신을 무인으로 키운 주자령이 있었고, 곤륜도로서 지탱해 준 주백천이 있었다.
그들이 있기에 도망치지 않고 백련교주와 싸웠었다.
되살아나서도, 멸문한 곤륜파를 외면하지 않았다.
따라서.
“네 삿된 미혹에 빠질 성싶더냐.”
백무량의 검기가 백상의 오른팔을 베었다.
검해의 심상은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횡으로, 종으로 수없이 많은 파도를 만들며 나아갔다.
순식간에 백상의 몸이 피투성이로 화했다.
“커헉!”
백상이 시꺼먼 피를 토했다.
선기가 전신으로 스며들고, 가면을 베인 탓에 정신이 혼미했다.
이에 내면의 귀호가 백상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대로 죽을 것이라면, 차라리 넘겨라.]
백상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에, 백무량이 먼저 검을 휘둘렀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이미 본 것이라면 다시 통하지 않는다.”
만금상단에서 있었던 생사투.
그 경험이 없었다면 또다시 싸워야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백무량의 검이 팔자를 그렸다.
구천화우검의 오초, 현천부휘의 연격이 백상의 가면을 깨부수고 삼단전을 남김없이 베었다.
“……끄윽.”
짧은 단말마의 비명을 남긴 채 백상이 쓰러졌다. 도망치도록 둔 마인도 하나 없었다.
그것을 본 백무량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불안하더냐?]
심천검의 물음에 백무량은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전혀요.”
그 대답에 심천검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내심 슬픔과 후회가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평생 한이 되었던 일을 후배가 반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뻐해야지, 왜 과거를 떠올린단 말인가.
‘후배에게 고약하단 말을 들어도 싸군.’
심천검의 시선이 백무량을 따라 곤륜파로 향했다.
***
“괜찮으냐?”
“저는 괜찮으니…… 사형의 안위부터 살피시지요.”
한 사제의 말에 현종휘가 웃음을 지었다.
다행히 백무량이 늦지 않은 덕에 죽은 사람은 없었다. 그저 중상자와 경상자가 많을 뿐이었다.
‘무너진 건물이 많긴 하지만, 노야께서 알아서 해 주시겠지.’
송우현이 들었다면 경을 칠 생각이었지만, 현종휘에게 있어서 그는 모든 걸 해결해 주는 상인이었다.
강호 경험이 없는 탓에 엄청난 금액이 들었다는 것조차 모르기도 했다.
“자, 그럼 모두…….”
현종휘가 손뼉을 치며 동문의 시선을 집중시키던 그때.
쐐액-!
검붉은 비도가 현종휘를 향해 쇄도했다.
어마어마한 살기와 집념에 현종휘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스릉!
한순간 빼 든 칼에 태청신공의 공력이 스몄다. 시선은 정확하게 비도에 고정했다.
‘저걸 막으려면…….’
분광뇌운결이 담긴 구천화우검의 후반초.
그걸로 비도를 단숨에 부수지 못한다면 폭발할 터였다.
여파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무너진 건물을 포함하여 중상을 입은 곤륜도 모두가 죽을 것이다.
현종휘가 숨을 깊게 내쉬었다.
“할 수 있어.”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궁구하며 수련한 무공이다.
이런 위기쯤, 이겨 내지 못한다면 백무량과 동렬에 설 수 없다.
현종휘의 의식이 고양되었다.
그렇게 비도가 지척까지 가까워진 순간.
구천화우검의 칠초, 주천암성.
검강과 동시에 펼쳐지는 암경이 비도를 찢어발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