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46화 (146/275)

결정 (2)

심천검이 닦아 놓은 길을 걷지 않겠다.

가벼운 치기나 농담으로 꺼낸 말은 아니었다. 심천검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숙고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백무량이 입술을 열려던 찰나에 심천검이 먼저 물어 왔다.

[왜냐?]

뜻밖의 말에 마음이 격동한 것일까?

심천검의 목소리에는 한두 가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이 담겨 있었다.

언짢고, 당황스러우며, 의아할 터였다.

곤륜파의 실전된 무학에 그토록 감탄하던 백무량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일까?

심천검은 침묵하는 백무량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왜냐고 물었다.]

‘선배의 무학만으로 마교를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

별안간 침묵하는 심천검.

그 모습에 백무량은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내심 품고 있던 망설임과 궁금증에 대한 답이 한꺼번에 해결되는 반응이었다.

마교에 대한 증오와 인간 불신.

그것은 따로 두고 보면 당연했고, 사람마다 성격이 다른 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심천검의 말과 행동은 다소 집요한 데가 있었다.

특히 현 무림인에 대한 불만과 혹평은 초조하기까지 했다.

백무량을 오롯이 의지했다면 남의 무공이 어떻든 상관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랬다.

심천검은 과거에 마교를 막아 내지 못했다.

따라서 검해는 후대로 이어졌고, 백무량에게 인연이 닿는 결과를 낳았다.

백무량은 답을 확인한 것을 잠시 후회했다. 그러나 아예 몰랐다면 심천검의 무공에만 의지했을 터였다.

[다른 제자였다면 좋다고 허겁지겁 삼배지례부터 올렸을 것을.]

잠시간의 침묵 끝에 심천검이 입을 열었다. 기꺼운 목소리 아래에 깔린 서글프고, 씁쓸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러나 심천검은 무엇이 우선인지를 알았다.

[그래, 나의 검을 잇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더냐?]

‘발판으로 삼으려 합니다.’

[담대하도다.]

심천검이 실소를 터트렸다.

자기가 활동하던 시대.

칠성교주가 상천의 주인을 자처하던 당시에 심천검의 무학을 배우기 위해 찾아왔던 무인은 수십이 넘었다.

하나 누구도 제대로 배우지는 못했다.

심천검이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음에도 그러했다.

태어나고부터 타고난 오성과 육신.

그것이 밑바탕에 있지 않으면 배울 수조차 없었다.

하물며 곤륜의 무공은 도가였다. 재능 위에 깨달음이 수반되어야 했다.

[그 누구도 나의 무공을 발판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무량아, 너에게 그런 재주가 있다고 믿느냐?]

백무량은 입술을 우물거렸다.

무인으로서 재능이 부족하다고 여긴 적은 없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누군가의 무공을 볼 때마다 부족함을 꼬집고, 비웃기를 즐겼다.

좋지 않은 성격이라고 사형에게 늘 야단을 맞았던 백무량이었다.

하지만 그 재능이 대종사에 가깝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수백 년을 지탱할 고목의 뿌리를 만들고, 다듬는 재능.

그건 무당의 시조인 장삼봉이나 화산의 학대통 같은 천재만이 가능했다.

자신에게도 그런 재주가 있느냐고, 심천검이 물었다.

백무량의 고개가 위아래로 느릿하게 흔들렸다.

‘물론이지요.’

그렇게 말하면서 뻔뻔하게 웃었다.

백련교의 난 이래로, 백무량은 호사가들이 말하는 불가능한 역경을 계속해서 헤쳐 왔다.

사대사행이 그러했고, 백련교주와의 재회에서 위기를 느꼈다.

지금 떠올려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경험이었다.

두렵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백무량은 한 가지 확신을 얻었다.

‘아직 해 보지 않은 것을 왜 두려워한단 말입니까?’

[…….]

‘하물며 선배 땐 칠성교만 있었다고 했지요? 그러나 저는 칠성교와 백련교를 동시에 상대해야 합니다.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지요.’

심천검의 상한선과 백무량이 생각하는 상한선은 다르다.

그 사실을 깨우쳐 줌에, 심천검이 뜻밖의 웃음을 흘렸다.

[허허…….]

새로운 도전에 대한 대견함인가, 혹은 아둔한 후배를 향한 조소인가.

백무량은 침을 꿀꺽 삼켰다. 비무할 때보다 몇 배는 더 큰 긴장감이 몰려왔다.

‘만약 선배가 영단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몸을 갖추고 있었다면 대화하기가 편했을 텐데 말입니다.’

가벼운 농을 던졌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렇게 백무량이 내심 초조해질 때쯤에야 심천검이 입술을 달싹였다.

[무얼 그리 긴장하고 있느냐? 네 말에 틀린 것 하나 없거늘. 오히려 민망하구나. 내가 먼저 말해야 했을 일을 네가 먼저 알아차렸다는 사실이.]

‘……선배.’

[그래, 네 말이 옳다. 알량한 무공 하나만 믿고 마교와 대적했다가 패배했고, 제멋대로 무림인을 탓했지.]

심천검은 자신의 일생을 담백하게 요약했다.

탓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단지 칠성교주에게 패배했을 뿐이니까.

그렇기에 백무량을 걱정하는 마음이 컸다.

[너는 백련교주에 대한 증오가 가득하지만, 칠성교주 또한 좌시해서는 안 된다. 네가 싸웠던 백련교주가 괴력난신이라면 칠성교주는 실로 신에 가깝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곤륜도가 마공에 사로잡힌 마인을 신이라고 하다니요.’

백무량은 순간 욱하는 마음에 심천검의 어투를 책망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칠성교주에 대한 두려움 또한 있었다.

사자탈을 쓴 두 마인과 싸움 이후, 딱 한 번 마주쳤던 칠성교주.

그에게선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세가 있었다.

만금상단에서 마주쳤던 마인도 강하긴 했지만, 칠성교주와 비교하면 조족지혈이었다.

[자기가 말해 놓고는, 입에 담고 나서야 체감이 되는 모양이로구나.]

적은 백련교주 하나만이 아니다.

그 사실이 백무량의 마음을 졸였지만, 긴장과 부담은 잠시였다.

백무량은 그것을 뜨거운 술처럼 삼켰다.

‘제가 고통이나 어려움을 부둥켜안는 성격도 아니고…… 금방 털어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네 사형이 걸려 있다면 어떠할까?]

‘…….’

심천검이 서슴없이 역린을 건듦에, 백무량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드는 통증이 서늘했다.

그때 심천검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사형과 현 곤륜파. 양자택일의 순간이 오면 어떻게 하겠느냐?]

심천검의 어투에는 짙은 후회와 회한이 있었다.

자기가 과거에 겪은 고난과 힘겨움. 녹슨 칼로 돌을 긁어내는 듯한 어조가 백무량을 짓누르는 듯했다.

‘검해를 이은 후배에게 묻는 것입니까, 아니면 도사 백무량의 답을 듣고 싶으신 겁니까?’

양자택일에는 양자택일.

백무량의 짓궂은 반문에도 심천검은 단호했다.

[검해를 이은 도사 백무량은 어떻게 하겠느냐?]

그 질문을 던지면서 심천검은 마음이 절로 쓰려 왔다.

불로 달군 쇠꼬챙이로 백무량을 푹푹 찌르는 기분이었다.

‘어느 하나 선택하기가 어려울 텐데, 그것을 강요하는 처지가 될 줄이야.’

심천검은 하늘의 무심함이 원망스러웠다.

정도(正道)를 걷게 만들려거든 적어도 마음은 평안하게 해 주어야 할 텐데, 고난을 내던지고는 했다.

과거에는 심천검이었고, 이제는 백무량이 선택할 차례다.

심천검의 시선에 백무량이 입을 열었다.

“무인이란 불가능한 답을 답파하기 위해 무공을 궁구하고 익히는 법.”

[……!]

심천검에게 얼굴이 있었다면 인상을 찡그렸을 터였다. 그만큼 백무량의 말은 터무니없었다.

[단 하나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

무인은 뜻을 밝혔다. 백무량은 시시콜콜하게 입씨름을 이어 가고 싶지 않았다.

남은 것은 의지의 발현.

백선신검을 똑바로 든 백무량이 중검세를 취했다. 곤륜의 절벽처럼 단단함이 저절로 느껴졌다.

“스으읍.”

백무량은 호흡을 길게 가져갔다.

곤륜산맥의 쾌청한 바람이 폐부를 채우고, 전신 세맥을 휘돌았다.

번뇌로써 답을 갈망하던 정신에 차가운 물이 끼얹어진 듯했다.

중검세는 상단세로 올라간다.

천하를 벨 듯 올라간 두 손에는 개벽을 바라는 의념과 심상이 서렸다.

뒤이어 극도로 운용된 태청신공이 주변 삼 장을 잠식했다.

마인과 싸울 때보다는 작은 범위였지만 밀도가 무척 뛰어났다.

이것은 심천검과의 비무에서 깨친 무학이다.

백무량의 시선이 혁대에 묶어 둔 목함으로 향했다.

심천검의 흐뭇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거기에 보타문주 목락윤과의 비무에서 본 단단함과 공동파의 경(經)을 뒤섞으니.

쩌저적!

백무량이 검을 아래로 내리쳤다.

창천명월이라기엔 고등하지 않았고, 평범한 검술이라기엔 검로의 심도가 깊었다.

그러나 일검의 여파는 평범하지 않았다.

[……네가, 정녕.]

심천검이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침묵했다.

그에게 눈은 없었지만, 영적인 존재로서 주변이 어떤지는 알 수 있었다.

벽해(劈海).

바다가 갈라지듯, 곤륜산맥의 운해가 양옆으로 쫙 갈라져서는 장엄한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이것이 나의 길입니다.”

양옆으로 갈라진 구름의 모습은 마치 백무량을 위한 계단처럼 보였다.

그것을 본 심천검은 옛이야기를 떠올렸다.

백무량에겐 가히 천 년 전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 고사였다.

천애(天涯)의 협로.

하늘 끝에 있다던 좁다란 길.

그 끝에 도달하는 자가 천하의 혼란을 잠재우리라.

‘너였느냐.’

무려 천 년에 가까운 고사의 주인이 백무량이었다니.

심천검은 속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싸움의 끝이 조금씩 희망으로 물들었다.

어쩌면 곤륜파 무학의 최고봉을 백무량이 더 높게 쌓아 올릴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심천검은 기껍다는 듯이 웃었다.

[허허, 허허허……!]

“……?”

옛 고사를 모르는 백무량으로선 의아할 뿐이었다.

***

“장 대인의 지천명을 축하하는 바요!”

무림맹에서 왔다는 대협이 큰 목소리로 선창했다.

이에 가문의 식솔이 상석에 앉은 노인에게 허리를 숙였다.

“경하드립니다!”

“흘흘……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하오!”

장 대인, 그러니까 산서성의 유력가인 장원백은 장성한 손주들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하루하루 손쉬운 날은 없었지만, 장수를 누린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하물며 무림맹과 연줄이 닿았다는 건 산서성에선 무시할 수 없는 인연이다.

장원백은 만면에 맺힌 웃음을 유지한 채 손님들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눈이 마주친 무인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장 대인! 부족하나 재주를 하나 보여 드려도 되겠습니까?”

체구가 장대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이마의 영웅건이 어울리는 무인이었다.

저절로 호감이 가는 얼굴에 장원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좋은 날인데 어찌 안 보고 넘어갈 수 있겠소?”

“하하, 그럼 보여 드리지요!”

무인은 엽전 다섯 개를 허공에 던졌다.

그것도 한 번에 던진 것이 아니라, 순차적으로 던져서 맨 처음 던진 것은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어어……!”

하인 하나가 그것을 지적하니, 무인은 씩 웃고는 식탁에 있던 나무젓가락 하나를 집었다.

그러고는 떨어지던 엽전을 발끝으로 툭 차서 올렸다.

“자, 이제 하나!”

나무젓가락에 발로 찬 엽전을 꽂았다.

그것을 시작으로 나머지 네 개 또한 던졌던 순서대로 이어졌다.

“둘, 셋…… 아이코! 넷, 다섯!”

무인의 호쾌한 음성이 주변을 떠들썩하게 했다.

중간에 일어날 뻔한 실수가 하나 있었지만, 다른 무인들은 그가 일부러 그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흥미진진하게 본 장원백이 무인에게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오?”

“무명소졸 패운이라고 합니다.”

“자네 같은 무명소졸이 천하에 어디 있겠는가! 겸손이 과하군!”

“별말씀을.”

패운이 두 손을 모아 올리자, 장원백이 좋은 음식을 권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한가락 한다는 무인이 모두 재주를 부렸다.

개중에는 검기를 실처럼 다루는 고수도 있었다.

이 또한 장원백의 온유한 심성 덕분이라!

주변에서 구경을 온 사람들도 무인의 재주를 보며 웃고 떠들었다. 고수의 검무 또한 진귀한 볼거리였다.

바로 그때.

“나도 밥 한 끼 해도 괜찮겠소?”

얼굴 전체에 민무늬 가면을 덮어쓴 남자가 떡하니 정문을 통과했다.

“…….”

시끌벅적하던 좌중이 모두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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