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 (1)
‘여전히 밝구나.’
무려 칠 년 동안 자신과 함께 강호의 어두운 면을 보고도 저렇게 해맑을 수 있다니.
백무량은 현종휘의 심지가 굳건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어린 사제랍시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잔소리할 생각도 싹 사라졌다.
“난 이제 쉬러 갈 터이니 손님이 있거든 만남을 다음 날로 미뤄 다오.”
“사형의 무용담도 내일 들을 수 있습니까?”
현종휘의 말에 백무량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너도 무용담이냐?”
“예?”
“아니다. 그것도 내일 말해 주마.”
그 말을 끝으로 백무량은 안채로 향했다.
방금 대화를 떠올리니 자연스레 남궁진의 뻔뻔한 낯이 생각났다.
‘무림맹주에 이어 사제까지, 참.’
[네가 싸운 적이 누구인지를 생각해라. 마교다. 정파의 무인이라면 당연히 궁금해하지.]
‘물어서 싸우는 데 쓴다는 겁니까?’
[당연한 이야기를!]
심천검의 목소리에 백무량은 한쪽 입술을 씰룩였다.
보타문에서부터 느꼈지만, 심천검이 품고 있는 마교에 대한 증오는 상당히 깊고 음울했다.
그 생각을 알아차린 심천검이 은근한 어투로 물어 왔다.
[너 또한 백련교주에 대해서라면 용서가 없지 않으냐?]
‘수백 년 동안 응어리진 분노와 칠십여 년은 다르지요.’
[흘흘, 그래, 그래.]
어린 손주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에 백무량은 인상을 팍 찡그렸다.
‘뭡니까, 그 반응은.’
[어허, 하늘과도 같은 대선배이거늘, 말본새가 그래서야 쓰겠느냐!]
그렇게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뒤, 백무량은 내심 품고 있던 의문을 떠올렸다.
‘그나저나 대선배, 일이 그렇게 되셨으니 말인데, 제 무공을 더 봐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언제 묻나 기다리고 있었다.]
심천검의 목소리에 자부심이 철철 넘쳤다.
[하기야, 네가 나 말고 누구에게 배울 수 있겠느냐?]
‘…….’
백무량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
심천검의 말에 웃음소리와 장난기가 뒤섞였다.
[구천화우검의 초반부를 보고도 그렇게, 그렇게 감탄을 하다니, 후반부를 보면 까무러치겠구나.]
‘한데 지금의 선배께선 육신이 없잖습니까.’
[그렇지.]
‘어떻게 보여 주실 겁니까?’
[……음.]
심천검의 말이 뚝 끊겼다.
사실, 곤륜파로 돌아가면서 시도를 안 한 건 아니었다.
영기나 청운을 이용해서 심천검의 육신을 유형화한다거나 검해의 심상을 이용하는 둥 보름 동안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럼에도 심천검은 영단에 묶여 있을 뿐.
‘잔망스러운 목소리 말고는 답이 없다니.’
[잔망스럽다니, 놈!]
팔 대 장문인이라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말투였지만, 심천검의 무학은 백무량이 범접하지 못할 높이에 있었다.
‘일단은 쉬고, 새벽에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냐.]
백무량은 이부자리에 몸을 뉘었다.
***
“이곳이 네가 지낼 곳이란다.”
“우와……!”
유성한은 현종휘가 안내한 바깥채를 둘러보며 입을 쩍 벌렸다.
솔직하게 말하면 생식(生食)을 먹거나 다 무너져 가는 초가집에서 생활할 줄 알았는데, 곤륜파의 생활은 도가보단 무가에 가까웠다.
그것도 아주 명문인 무가.
유성한의 손가락이 잘 다듬어진 벽면을 훑었다.
“완전 새집이네요?”
“지어진 지 십 년도 채 되지 않았거든.”
하물며 관리 감독을 송우현이 하고 있으니, 곤륜산맥의 운해가 아무리 짙다고 한들 기둥이 썩어서 무너질 일은 없었다.
현종휘의 말에 유성한이 배시시 웃었다.
“저는 암자 같은 곳에서 지낼 줄 알았어요.”
“암자?”
“네, 제가 보타문에서 있었거든요.”
“아하……!”
현종휘가 눈가에 이채를 띠었다.
백무량은 일일이 귀찮게 굴지 말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유성한이라면 궁금증을 해결해 줄 것 같았다.
“사형과 지내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줄 수 있니?”
현종휘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유성한은 고개를 흔쾌히 끄덕였다.
“물론이죠!”
뒤이어진 유성한의 말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내가 호광성에서 무인들과 교류하고 있을 때, 사조님께선 칠성교와 싸우고 계셨구나.’
백무량은 늘 그러했다.
자기는 마인과 생사투를 이어 가면서도, 현종휘는 아직 경지가 부족하다며 안전한 곳으로 미뤘다.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경험을 쌓아야 나중에 써먹을 구석이 생길 거라며, 강호에서 가장 안전한 호광성을 강권했다.
“후우…….”
현종휘가 한숨을 푹 내쉬자 유성한이 눈을 끔뻑였다.
“왜 그러세요?”
“이번에도 별다른 도움이 되질 못한 것 같아서 말이다.”
“아니…… 아직 이야기를 덜 했는데요.”
“뭐?”
현종휘가 반문하기가 무섭게 유성한은 보타암에서 나온 이후를 이야기했다.
무림맹주 남궁진.
그가 이야기한 만금상단에 관한 사건.
현종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금모도왕과 함께 칠성교를 처치했다던 고수가 바로 사조님이었구나!’
유성한의 말이 정녕 사실이라면 백무량이 바로 옆에 있었다는 소리였으니까.
현종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
하물며 금모도왕이 칭하기를, 누구보다도 빨리 마인의 침입을 알아차린 협객이라고 했다.
따라서 호사가들은 그 의문의 고수를 이렇게 불렀다.
-무명검협(無名劍俠).
이름조차 남기지 않고 곧바로 떠났다고 하여 무명, 행동이 그 어떤 협객보다 뛰어나기에 검협.
‘사조님 같지 않아서 아닐 거라고 여겼는데.’
사람을 구하면 반드시 대가를 바라고, 협보다는 마인을 증오하는 쪽에 가까운 게 바로 백무량 아니던가.
현종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성한에게 물었다.
“정말이니? 무림맹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네…….”
자꾸만 캐물으니 자신감이 떨어진 걸까?
유성한이 어눌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현종휘는 아차 싶어서 헛기침했다.
“아니, 흠. 사형답지 않아서 다시 한번 물어봤을 뿐이란다.”
“답지 않다니요? 누구보다도 훌륭하신 분인데요.”
그렇게 말하는 유성한의 눈은 존경심이 가득했다.
오랫동안 백무량을 지켜본 현종휘로서는 참으로 감탄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야 곤륜도로서 존경하는 사형이지만…… 누구보다도 훌륭하다기엔 거리가 조금 있지 않니?”
“전혀요!”
유성한이 소리를 버럭 내지르고는 옷깃을 확 잡아당겼다.
그러자 점 하나 없이 멀끔한 어깨가 드러났다.
“원래 이곳에 반점이 있었는데, 사부님께서 치유해 주셨거든요!”
“사부님?”
현종휘의 눈이 커졌다.
곤륜산에 오기 전부터 백무량이 제자로 들인 거라면 유성한의 신분은 삼십일 대 제자가 아니라 사제라고 봐도 무방했다.
‘사실이라면 제자들의 기가 막히겠구나.’
가뜩이나 백무량의 수련을 따라가기 버거워하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사숙이 뚝 떨어졌으니 고민은 배가 되리라.
현종휘가 고민에 빠진 사이 유성한이 처소 안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와, 푹신해!”
이부자리를 매만지는 유성한을 보자니 현종휘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맺혔다.
고집이 센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아이.
어떻게 가르치냐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었다.
정녕 백무량의 제자라고 한들 바른 마음가짐을 가르친다면 곤륜파에서도 무리 없이 섞일 터였다.
얼굴에서 미소를 지운 현종휘가 유성한에게 말했다.
“불편한 게 있다면 편하게 말하거라.”
“불편은요! 그럴 리가요!”
무슨 말을 하냐는 듯, 유성한이 강하게 손사래를 쳤다.
앞섶까지 흔들리는 모습에 현종휘가 눈웃음을 지었지만, 그 표정은 금세 굳었다.
“너, 그거.”
“예?”
현종휘가 유성한의 손목을 잡아채고는 옷자락을 뒤로 젖혔다.
달빛에 비친 유성한의 팔뚝에는 오래전에 입은 상처가 수두룩하게 나 있었다.
그것을 본 현종휘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언제부터 이랬느냐? 설마 사형께서 그러신 건 아니겠지?”
“아, 아니에요.”
유성한의 얼굴이 창피함으로 붉게 물들었다.
분노도 순간 치밀었지만, 단순히 창피해서였지 현종휘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러느냐.”
어쩐지 백무량이 제자들에게 질문을 자제시키더니만, 이런 과거가 있을 줄이야.
현종휘는 한탄하듯이 낮게 읊조렸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의원으로 가보자꾸나. 지금이라도 상처를 없앨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괜찮아요.”
“음?”
“지우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현종휘의 시선이 유성한에게 향했다.
유성한의 표정에 강철과 같은 견고함이 가득했다.
“앞으로는 곤륜도잖아요.”
“네 뜻이 정 그렇다면 말리지는 않으마.”
현종휘의 말에 유성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속으로는 기뻐하고 있었다.
‘다들 내 상처를 보면 외면하기 마련이었는데.’
복잡한 사연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 유씨 가문은 칠성교와 엮였으니 건드리면 안 된다.
늘 그런 소리만 들어왔던 유성한에게 목락윤과 백무량, 현종휘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유성백을 투영하는 게 아니라, 유성한 그 자체로 봐 준다.
그것만으로 유성한은 살아 있다는 실감을 느꼈다.
“감사합니다, 사형.”
“어느 문하로 들어가게 될진 모르겠으나 앞으로 좋은 인연으로 이어졌으면 좋겠구나.”
현종휘의 말에 유성한은 밝게 웃었다.
피폐하던 마음과 남을 밀어내고 깎아내리던 행동이 점차 밝게 변해 가고 있었다.
***
다음 날 새벽.
백무량은 홀로 연무장으로 나와 숨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곤륜산맥 특유의 청량한 공기가 폐부를 시원하게 긁었다.
태청신공 또한 본산의 기운과 만나서 기쁘다는 듯 강하게 맥동했다.
[깊고 정심한 호흡으로 무한을 다스리니, 이는 구름의 운행과 같다.]
백무량은 심천검이 불러 주는 구결에 따라 쉼 없이 호흡했다.
그 모습이 마치 선도(仙道)에 이른 신선과도 같아, 유형화한 청운이 백무량의 신형을 은은히 감싸고 있었다.
“……후우.”
그렇게 일다경에서 한 식경.
반쯤 무아지경에 빠진 백무량의 모습에 심천검이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곤륜의 호흡만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이어졌구나. 홍복이로다.’
사실상 가장 큰 관문이라고 생각했거늘.
몸에 익은 구결을 억지로 바꿀 필요가 없다면, 백무량에게 자신의 무학을 가르치는 건 시간과 경험의 문제였다.
심천검은 백무량의 호흡을 천천히 가라앉혔다.
[조금씩, 천천히 내쉬어라.]
“…….”
[태청신공이 완공에 다다르진 않았으나 나의 무학을 잇기에는 충분하다. 이제는 너의 의지만이 남아 있구나.]
심천검의 말에 백무량은 잠시 고민했다.
확실히, 그가 가진 무학이나 무공은 자신이 상정하던 것보다 더욱더 높은 곳에 있었다.
세간에서 말하는 강호십대고수보다 두세 수는 위.
곤륜파의 도사로서 반드시 배워야 할 숙제이기도 했다.
‘한데 왜.’
선택할 순간에 왜 망설이게 되는가.
백무량은 잠시 눈을 감았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지만, 심천검과 함께 대화하며 느꼈던 모든 것을 떠올렸다.
그 안에 자신을 망설이게 했던 것이 있으리라고 여겼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심천검이 백무량에게 물었다.
[무엇이 너를 갈등하게 했느냐?]
‘……저는.’
백무량은 심천검에게 자신만의 답을 내놓았다.
‘죄송하지만 선배의 검을 잇진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