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 (3)
시끌벅적하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쾌청하던 하늘에 암운이 스멀스멀 기어 오는 것만 같았다.
그만큼 민무늬 가면의 남자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저 사람은 누구야……?”
“설마 세간에서 말하는 칠성교도인가?”
추측이 횡행하는 동안 남자가 생일상으로 다가갔다.
먹음직스러운 고기와 주전부리.
그것들은 장원백의 생일에 초대된 손님들에게 주어진 음식이었지만,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허, 허억!”
남자가 가까워지자 겁을 덥석 집어먹은 하인이 제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그걸 본 남자는 피식 웃었다.
“거, 남자가 기가 그렇게 허해서야 어디에다가 쓰겠나?”
“아, 아니, 그게.”
“밥맛 떨어지게 하지 말고 저리 비키게.”
그 말에 하인이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기어갔다.
생일상에 가까이 다가간 남자가 상석에 있는 장원백을 흘낏 쳐다보았다.
“가만 보니 다들 재주를 보이시던데, 부족하나마 나도 하나 보여 주어도 괜찮겠소?”
좌중의 시선이 장원백에게 향했다.
특히 남자의 정체를 어림짐작한 고수의 안색이 새하얬다.
[장 대인! 저자는 칠성교도 중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괴물이오! 절대 자극하지 마시오!]
“……음.”
고수의 간곡한 전음에 장원백은 남자를 보았다.
가면을 쓰고 있기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장원백에겐 수많은 사람을 마주하며 쌓은 경험이 있었다.
“뛰어난 재주라면 초대장을 대신하기에 충분하지. 보고 나서 불청객으로 생각할지, 귀빈으로 여길지 판단하겠소.”
“……!”
고수를 비롯한 무인 모두가 귀를 의심했다.
척 보아도 칠성교의 교주 내지는 고수일진대, 어찌 저렇게 말한단 말인가!
하지만 남자의 반응은 무인들의 예상을 한참이나 뛰어넘었다.
“대궐 같은 집에서 사는 양반이 인심 한번 고약하다! 하지만 내가 불청객인 건 어쩔 수 없는 일! 좋소, 아주 대단한 것을 보여 주지.”
남자가 손가락을 튕겼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숨죽여 구경하던 양민 하나가 상인을 손가락질했다.
“저, 저거!”
상인의 품에서 줄줄이 굴러 나오는 엽전들.
눈 뜨고도 코 베인 상인이었지만 전신이 빳빳하게 굳어서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저기도!”
다른 사람의 주머니에서도 엽전이 튀어나왔다. 그러다 은전까지 나오니 상인의 눈알이 또르륵 굴렀다.
미치고 환장하겠다는 감정이 절절히 느껴졌다.
그것들이 대략 은원보의 가치가 되었을 때.
“자!”
남자가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기이한 현상이었으나 누구도 그것에 집중하지 못했다.
촤아악!
수백 개에 달하는 엽전과 은전이 허공으로 날았다.
남자는 빙긋 웃으며 손을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그러자 엽전과 은전 들이 둥글게 깎여 나가며 남자가 든 젓가락으로 모여들었다.
촤르르륵!
나무젓가락 위로 쌓인 동전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이번에는 주변에서 구경하던 양민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 돈은 못 받더라도 최소한 몇 달은 먹고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반면 무인들은 어떠한가?
‘저것이 우리한테 휘둘러졌다면…….’
‘일거에 머리가 터져 나갔을 것이다.’
남자가 보인 무위는 예사롭지 않다. 최소한 구파일방의 장로는 와야만 상대가 될 법한 경지에 있었다.
심지어 아까 검무를 추었던 고수라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좌중은 여러 가지 이유로 침묵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웃질 않을까?”
모골이 송연해지는 중얼거림이었다.
사람 목숨을 개미처럼 안다는 칠성교도에게 말을 붙이기란 제정신으론 불가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잔칫상을 보시오.”
“응?”
“아직 술잔에 술이 한가득이오.”
장원백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남자의 말을 받아쳤다.
주변에서 존경 어린 시선이 내비쳐졌다.
남자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과연…… 잔치에 술이 없었으니 분위기가 이렇게 딱딱했지.”
“재주는 잘 보았소.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을 합하여도 방금 본 것만큼은 아닐 것이오. 하면 한 가지를 여쭤봐도 되겠소?”
“무엇을 말인가?”
“빈객으로 대접을 하고 싶은데, 존함을 모르니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알 수가 없소.”
장원백의 말에 남자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죽은 사람이 산 자의 이름을 듣는다고 달라질 게 있더냐?”
“……뭐요?”
장원백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
촤악!
생일에 참여한 모든 사람의 목에 붉은 실선이 그려졌다. 바깥에서 구경하고 있던 양민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것을 본 남자, 칠성교주는 더욱 크게 웃었다.
“하하, 하하하……!”
이번 행동은 변덕스럽고 충동에 가까웠다. 하지만 재미는 나름대로 있었다.
처신을 잘하면 살려 줄 것처럼 행동했지만,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었다.
목숨을 빼앗은 건 엽전을 던질 때부터.
이미 목을 베였다는 것조차 모르면서 담대한 척 구는 모습이 참으로 우스웠다.
“아쉽구나. 심천검…… 이런 자리에 네가 있었다면 참으로 즐거웠을 텐데.”
칠성교주 괴성은 옛 호적수를 떠올리며 가면을 매만졌다.
***
[그러니까, 검을 그런 식으로 무르게 휘둘러서는 안 된다니…….]
한창 초식의 설명을 이어 가던 심천검이 돌연 말을 멈췄다.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심천검에게 눈 같은 건 없을 테지만, 어쩐지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왜 이야기를 하다가 멈추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불합리합니다. 누군 생각도 숨길 수 없는데, 참나.”
[의념을 일으키고 심상을 구축하는 데 익숙해지면 너도 가능하다. 그러니 빨리 수련이나 해라.]
아니꼬우면 자기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르면 된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심천검은 평소와 같았다.
‘내가 착각했나?’
좁혀졌던 백무량의 눈초리가 제자리를 찾았다.
하기야, 같은 목적을 두고 있는 이상 자신에게 무언가 숨길 이유가 없었다.
수백 년 전의 연인이 살아 있는 게 아니고서야…….
[이놈!]
심천검의 호통에 귀가 먹먹해졌다.
순간 인상을 찡그린 백무량은 금세 히죽거리며 웃었다.
“그거 보십시오. 사람 생각 마음대로 읽는 거 아닙니다.”
[검해를 이은 후배가 이리 진중한 맛이 없으니…….]
“마인 앞에서는 진중해질 수 있습니다.”
[허, 그래, 그러면 수련에 다시 집중하거라.]
심천검의 말에 백무량은 숨을 가다듬었다.
뒤이어 펼쳐진 것은 수많은 무학의 난립.
곤륜파의 무공이되 공동파의 경(經)이기도 했고, 화산파의 화(花)였으며, 보타문의 금(金)이었다.
보통이라면 뒤섞이지 않을 이질적인 무학이 태청신공의 무한한 그릇과 백무량의 무재(武才)에 굴종했다.
누군가가 보면 혀를 내두를 일초가 연이어지고, 흐드러졌다.
그 초식 사이마다 심천검의 촌평이 이루어졌다.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고 하지 마라. 번잡하다.]
[구름을 꽃잎처럼 휘두르려고 하느냐? 추하다.]
[왜 자유로운 운해를 형태로 굳히려고 드느냐?]
절대 고수만이 볼 수 있는 사소한 트집이 백무량의 귓가를 쑤셨다.
이보다 더 잘 펼칠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심천검의 평가는 박하기만 했다.
그러나 백무량은 자책하거나 심천검에게 악감정을 품지 않았다.
‘아직 익숙하지 않을 뿐이야.’
구파일방의 무인은 일평생을 무학의 끝을 보기 위해 수련에 정진한다.
그에 비해 자신은 어떠한가?
무학의 겉만 보고 베껴 와서는 곤륜파의 무공에 뒤섞으려고 한다.
오만을 넘어선 아집.
각 문파의 장로가 보았다면 본 문을 무시했다며 진노할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틀을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이라고.
백무량은 그 길을 향해 맹진하고 있었다.
“후우, 후우…….”
전신 세맥까지 흐르던 호흡이 어느새 중심에 쏠렸다.
두세 시진 동안 매번 최선을 다하여 무공을 펼치고 있으니 살과 근육을 가진 인간이라면 당연히 찾아올 한계였다.
그 한계를, 백무량은 의념으로 대체했다.
스으윽.
청운이 전신을 붙잡고, 백무량의 의지에 따라 휘두른다.
붉게 달아오르다 못해 시뻘겋게 변한 피부에서 피가 배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근육통에 몸부림쳤을 테지만, 백무량의 인내심은 굳건하기만 했다.
[너…….]
심천검은 백무량을 만류하려고 입을 열었다.
체력이 한계에 달하면 집중력도 흩어지기 마련이니, 오늘은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것이 스승으로서 옳은 판단이었다.
그러나 무인으로서 침묵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 백무량에게 보였다.
‘점차 예리해지고, 능숙해진다.’
예리해진다는 것은 검로에 불필요한 힘을 확실하게 덜어 내고 있다는 뜻이며, 능숙해진다는 것은 무학의 본의(本意)를 체화하고 있다는 뜻.
심천검은 백무량의 검로를 잠자코 지켜보았다.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던 검은 욕심을 덜었고.
꽃잎의 형상에 집착하던 구름에는 쾌가 담겼다.
몇 겹의 초식이 담긴 검과 쾌해진 구름은 단단해졌으니.
사소한 트집을 던지던 촌평은 침묵으로 화했다.
검로 전체를 보던 심천검의 시선이 백무량의 근육과 눈으로 향했다.
검에서는 허점을 찾을 수 없다는 의미였으나, 정작 초식을 펼치는 백무량은 자신의 발전을 알지 못했다.
“…….”
호흡마저 잊은 무아지경.
백무량의 움직임은 두세 걸음으로 제한되었으나, 검에서 펼쳐지는 기세는 수십 리를 주파하고도 남았다.
그렇기에 탈진은 금세 찾아오고 말았다.
“허어, 허억…….”
두 손을 무릎에 올린 채 백무량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아주 오래전, 등정로에서 현종휘를 꾸짖을 때가 생각나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곤륜도가 어찌 돼지처럼 숨을 헐떡거리는 게냐?]
그 따가운 가르침은 심천검 또한 마찬가지였다.
백무량은 애써 호흡을 가라앉히며 심천검에게 물었다.
“어땠습니까?”
[어떻기는, 눈이 공허한 것이 자기 적도 못 알아보고 칼만 휘두르고 있었거늘.]
무아지경은 결국 적을 직시하지 못하는 맹목(盲目)일 뿐.
심천검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만일 네 앞에 칠성교주나 백련교주가 있었다면 단숨에 죽었을 것이다. 무기는 어디까지나 적을 향해야 상처 입힐 수 있는 법이지.]
“그럼 그 검이 상대를 상처 입힐 수준까지 올라왔다는 뜻이군요.”
그 말에 심천검이 잠시 침묵했다.
[꿈보다 해몽이구나, 쯧.]
심천검의 핀잔에 백무량은 씨익 웃었다.
누구보다 악담이 심하면서 칭찬엔 인색한 것이, 참으로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앞으로 이걸 정립해 가면 어떻겠습니까?”
[……솔직하게 말하면 마뜩잖다. 본류에서 벗어나 다른 문파의 무학을 덧대어 새로운 검로를 파생시키는 셈이니, 어찌 내가 곱게 볼 수 있겠느냐!]
심천검의 말에 진중함이 담겼다.
곤륜파의 팔 대 장문인으로서, 심천검은 백무량의 심지가 궁금했다.
[네가 예전에 말했었지. 곤륜파의 실전된 무학을 한데 그러모아, 곤륜파의 무도를 완성하고 싶다고.]
“……!”
백무량의 눈이 커졌다.
그건 분명, 백련교주와의 격전에서 떠올렸던 생각이었다.
그때부터 심천검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백무량이 과거를 되짚는 동안 심천검이 입을 열었다.
[하나 너의 행태는 곤륜의 무맥을 가다듬는 것이 아니다. 다른 문파가 보면 손가락질하고, 도둑놈이라고 꾸짖을 행태지. 마교를 모두 멸절한다고 한들 그것을 곤륜파에 남길 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괜찮겠느냐?]
“……저도 압니다.”
이렇게 노력한다고 해도 곤륜파에 온전히 계승시킬 수는 없다.
깨달음의 전반이 다른 문파의 것이니, 그것을 들어내면 검로 중간이 텅 비게 된다. 그렇기에 백무량의 무공은 필요 없는 것으로 금세 잊힐 터였다.
하나, 상관없었다.
백무량은 고개를 반듯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마교를 이길 수 있다면 족한 일입니다.”
[…….]
백무량의 심지를 본 심천검이 불만스럽지만, 강하게 확신하고 있던 답을 내놓았다.
[그것을 하나로 정립한다면 곤륜파의 신검(神劍)이라 불려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단순히 한 세대의 최고수가 아닌, 곤륜의 역사를 통틀어서 고금제일.
심천검의 확언에 백무량은 다시 검을 잡았다.
가빴던 호흡이 어느새 진정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