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 (5)
***
“천하의 곤륜신성이 이렇게 늦게까지 자고 있어야 되겠는가!”
호탕하게 외친 남궁진은 문을 열어젖혔다.
당연하지만,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맹주님의 후의 덕에 잘 지내고 간다는 쪽지만이 빈자리를 강조할 뿐이었다.
“허, 이것 참.”
무슨 일이 바쁘다고 이렇게 일찍 떠난 건지.
남궁진은 낮은 목소리로 아쉬움을 토로했다.
“아미파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 있었는데…….”
***
무조건 마차를 타고 가자던 유성한의 소원은 반은 이루어졌고, 반은 그렇지 못했다.
그 이유는 바로…….
‘걷는 것보단 낫긴 한데, 엉덩이가 너무 아파.’
오랫동안 마차에만 있어서 그런지 살갗이 슬슬 따끔거렸다.
바닥에 아무리 푹신한 걸 깔아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을 본 백무량이 조소를 머금었다.
“마차, 마차 노래를 부르더니 슬슬 허리도 뻐근하고 살이 짓무르지 않느냐?”
“……더 좋은 마차는 없었을까요?”
“복에 겨운 소리를 하는구나. 이토록 긴 거리를 마차로 갈 수 있다는 건 참으로 행복한 일이거늘.”
“완전 아저씨 같은 소리네요.”
“언제는 사부님이라더니?”
백무량이 슬쩍 주먹을 들자, 유성한이 몸을 뒤로 뺐다.
이런 실랑이도 한 시진 동안이나 하면 질리기 마련.
유성한은 몸을 꿈틀거리다가 대자로 누워서 잠을 청했다.
그동안 백무량은 이번 강호행에서 얻은 것들을 심상에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칠성교와의 싸움, 조원양의 선물, 심천검과의 비무.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사건이었다.
특히 조원양의 선물은 송우현이 그토록 말하던 ‘상단주’의 행태와는 거리가 멀었다.
[네 호의를 사기 위해서 준 게 아니겠느냐?]
심천검의 물음에 백무량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째 선배께서는 항상 인간을 불신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불신? 처음부터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곤륜파의 장문인이란, 도경을 여느 학도사보다도 많이 읽었다는 뜻이다.
한데 팔 대 장문인이었던 심천검은 왈패라고 불린 자신처럼 사람을 늘 의심하거나 헐뜯었다.
백무량으로선 그것이 너무나도 기이했다.
‘저도 그럼 못 믿을 사람입니까?’
[너는 검해가 선택한 도사가 아니더냐. 나의 후계를 이었다고 봐도 무방한데, 당연히 믿어야지.]
믿을 만한 확실한 이유가 있지 않는 이상 신뢰할 수 없다.
심천검의 말에서 해묵은 감정과 고집이 느껴졌다.
백무량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가 선배님을 그렇게 불신으로 몰았습니까?’
[…….]
심천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순간으로 끝나지 않고, 보름 동안 이어졌다.
시간이 그렇게까지 흐르니 백무량이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뭔지 몰라도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이해해 줘서 고맙구나.]
‘다만 나중엔, 반드시 말해야 할 땐 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
음색에서 머뭇거림이 느껴졌지만, 심천검이 약조를 어길 것 같진 않았다.
백무량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만나는 사람마다 깊은 사연을 한둘씩은 가지고 있는 건지.
백무량의 시선이 마차 밖으로 향했다.
어느덧 완연해진 봄.
따스한 공기가 뺨을 두드렸다. 하지만 백무량은 그보다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다 왔구나.”
“지, 진짜요?”
얼마나 지루했던지 유성한이 고개를 밖으로 뻐끔 들이밀었다.
너무나도 높아 육안으로는 정상을 바라볼 수 없는 곳.
곤륜산맥이 가까웠다.
***
“대사형께서 돌아오신다!”
철유의 한마디에 곤륜파 전체가 시끌벅적해졌다.
이제 봄이라고 침소에서 몸을 뭉그적거리던 제자들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곤륜신성 백무량.
곤륜파의 대사형이자 핵심 고수라고 불리는 그의 귀환에 모두가 자신의 무공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무공이 그대로라는 소릴 들었다간…….’
‘……앞으로 열흘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잔다!’
백무량이 강호로 나가기까지 사 년.
그동안 곤륜파는 백무량과 현종휘를 중심으로 온갖 훈련에 매진했다.
특히 청성파의 사대사행을 모방한 험지는 곤륜도에게 있어 끔찍한 경험을 선사했다.
“이, 이걸 어떻게 올라갑니까!”
“힘내서 열심히 하다 보면 된다.”
무덤덤한 목소리로 터무니없는 소리를 해 대던 백무량.
그 아래에서 얼마나 모진 수련을 감내했던가!
곤륜도의 무위가 한층 성장하기는 했지만 치가 떨리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강호에 다녀오는 동안 발전이 없는 곤륜도는 내가 특별히 지도해 주지.
곤륜도들은 이 말에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백무량이 떠나는 건 행복하고 기쁜 일이었지만 그동안에도 자신을 채찍질해야 하다니!
현종휘나 철유만큼의 인내심이 없으면 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현종휘는 현재 강호행을 떠난 상태.
남은 희망은 오로지 철유뿐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들 대사형의 말이 가볍게 들린 것이냐? 왜 열심히 수련하지 않은 것이냐?”
그 희망이 도리어 백무량의 편을 들어 버리는 것이다.
곤륜도들은 메슥거리는 속을 부여잡았다. 이대로라면 백무량에 의해 또다시 하루하루가 끔찍해질 예정이었다.
바로 그때.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기적이 일어날 줄이야.
“새로운 아이를 곤륜으로 들일 터이니 잘 씻기고, 잘 먹이고, 텃세 부리지 말아라.”
그것은 바로 어린아이, 유성한의 입문이라.
노심초사하던 곤륜도가 슬그머니 백무량에게 물었다.
“하면 전에 하셨던 말씀은…….”
“말씀? 내가 뭐라고 했던가?”
백무량의 반문에 다른 곤륜도들이 질문을 던진 곤륜도에게 눈을 사납게 부라렸다.
그냥 조용히만 하면 지나갈 일에 왜 불을 피우냔 뜻이었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백무량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녀석들.’
지금은 모른 척 넘어가 주는 것이 제자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길이리라.
백무량은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소릴 했는진 모르겠다만, 대사형의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참이냐?”
“……예?”
“여독이 쌓였을 터이니 아이의 짐부터 풀어 주거라. 아, 새로운 제자라고 하여 너무 많은 걸 캐묻지는 말고.”
그 말에 곤륜도들이 환희를 꾹 참았다.
백무량이 모르는 척 넘어가 준 것도 있었고, 캐묻지 말라는 건 유성한에게 좋지 않은 사연이 있다는 뜻이니까.
가장 나이가 많고 온유한 곤륜도가 유성한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더냐?”
“유, 유성한입니다.”
낯선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유성한의 얼굴이 긴장으로 붉어져 있었다.
백무량은 그것을 흘낏 보고는 철유에게 다가갔다.
“그동안 아무 일 없었느냐?”
“자리를 비우신 동안 소문이 퍼지지 않게끔 잘 조절했습니다. 대사형은 어떻습니까?”
“……최대한 조용히 다닌다고 했지만, 글쎄.”
남궁진이 알 정도면 사실상 무림맹 수뇌부는 알고 있다고 봐야 했다.
백무량은 이번 강호행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말했다.
그것을 끝까지 경청한 철유가 옅은 웃음을 보였다.
“사형답지 않습니까. 각 문파의 금지(禁地)란 금지는 모두 방문하고 다니시는군요.”
“어허.”
“아,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백무량의 표정이 급격하게 진지해지자, 철유가 가볍게 두 손을 흔들었다.
“그게…… 사형께서 어린 제자와 함께 돌아오신다니까…….”
“다니까?”
평소답지 않게 어색한 미소를 짓는 철유.
백무량은 예기치 않은 불안을 느꼈다.
철유가 저렇게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일 때면, 늘 백무량이 상정하지 않은 상황이 닥치곤 했다.
쌀이 곯아서 저녁을 먹지 못한다든가, 우물에 표주박 조각이 떠다닌다거나.
“이번에는 무슨 일인데?”
백무량의 말에 철유가 곤혹스러움을 면치 못하던 그때.
“제가 돌아왔지요.”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백무량이 고개를 돌렸다.
잘 정돈된 기도, 시장을 거닐면 대다수의 시선을 빨아 갈 외모.
백무량의 미간이 좁혀졌다.
“……너!”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사형.”
청운검협 현종휘.
최근 호광성에서 벌인 비무행으로 인해 엄청난 명성을 얻은 사제였다.
‘호광성에 계속 있어야 할 녀석이 왜 여기에 있어?’
[후배는 인기가 많아서 좋겠구먼.]
심천검의 농담에 백무량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평소였다면 인사를 받아 줬겠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분명히 금방 돌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사형이 새로운 제자를 데리고 왔다고 하니까,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요.”
그 말에 백무량은 철유를 돌아보았다.
보나 마나 이놈이 현종휘에게 고했을 거란 생각이었다.
“네가 말했느냐?”
“그게…… 어쩌다 보니 말입니다.”
철유가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뒷사정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전서구를 통해 소식을 확인한 현종휘가 철유의 말을 듣고 무작정 돌아왔을 터였다.
백무량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발전은 있었겠지?”
“사형과 겨뤄도 일 초에 밀리진 않을 겁니다.”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현종휘였지만, 백무량에겐 그저 우스운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나한테 많은 걸 배우지 않았더냐?]
‘지금 끼어드실 상황은 아니지 않습니까.’
[까탈스럽기는.]
자못 불만스럽다는 듯 말한 심천검이었지만, 끝에 가서는 웃음소리가 선명하다.
백무량의 표정이 구겨지자 현종휘는 눈을 끔뻑였다.
“사형, 제가 혹시 말실수라도 했습니까?”
“실수를 했지.”
“……예?”
“대사형의 말을 허투루 흘리고 마음대로 돌아온 점, 나와 겨루어도 일 초 만에 밀리진 않는다는 확신 말이다.”
백무량은 피식 웃으며 태청신공을 운용했다. 그저 숨 쉬듯 자연스러운 행공에 현종휘 또한 숨을 깊게 골랐다.
쿠르르……!
운해와 같은 내공이 몰아치며 두 갈래로 나뉜다.
백무량 못지않게, 현종휘도 자소단 두 개를 취한 고수였다. 나이에 비해 깊은 경지에 도달했다는 평이 대다수였다.
다만 그것이 백무량에게 통하지 않을 뿐.
까득.
강한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현종휘가 한쪽 무릎을 구부렸다.
어금니를 꽉 깨물기는 했으나 별다른 도움은 되지 않았다.
“이빨 나간다.”
“언제 또 좋은 걸 드신 겁니까?”
현종휘의 말에 백무량은 피식 웃었다.
“마침 이번에 나갔다 오면서 상왕께 많은 걸 받았다. 필요한 만큼 취해도 된다.”
하품으로 분류된 영약들과 금원보 서너 개.
호광성의 큰 장원을 통째로 사 버릴 만큼 엄청난 재물이었다.
그 말을 들은 현종휘와 철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정말입니까?”
“내가 뭐 하러 거짓말을 하겠느냐. 자, 봐라.”
백무량이 펼친 행낭에서 번쩍거리는 금원보의 자태.
그것을 본 현종휘는 가볍게 혀를 차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 나름대로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많은 경험을 쌓았다고 자부했는데, 사형에게는 안 되나 봅니다.”
“나한테 이겨 먹을 생각이었더냐?”
“하하, 그것까진 아니지만…….”
말끝을 흐린 현종휘가 유성한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 데려오신 아이는 어떻게 된 겁니까?”
“보타문주님의 부탁으로 곤륜파에 입문시킬 아이다.”
“보타문……? 보타암까지 가신 겁니까?”
어찌나 깜짝 놀랐는지 현종휘의 눈이 금원보를 볼 때보다 커졌다.
백무량은 진정하라며 현종휘의 어깨를 툭툭 때렸다.
“목소리가 크다. 내가 괜히 몰래 갔다 왔겠느냐?”
“……그래서 볼일은 잘 마치셨습니까?”
“그래. 저 아이도 그중 하나지.”
눈앞에 있는 현종휘와 비견되는 재능에, 천무검성의 무학.
백무량은 앞으로 기대된다는 눈빛으로 유성한을 바라보다가 현종휘에게 귀띔했다.
“아직 어린아이니 잘 부탁하마.”
“예!”
현종휘가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