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30화 (130/275)

시험 (1)

***

‘요현이 죽다니?’

남천에게 쫓기고 있던 백상이 속으로 경악했다.

믿어지지 않았다.

가면이 반쯤 부서져서 폭주했다는 건, 분노한 요신이 바깥으로 나왔다는 뜻.

게다가 천면호는 요신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 강호십대고수가 둘일지라도 이기기 버거울 터였다.

가장 큰 문제는…….

‘천면호를 죽였다는 건, 다른 칠성교도도 안전하지 않다는 거야.’

상황이 다급하여 천면호의 적이 누구인지 보지 못했다.

단지 원호의 목적으로 투검을 했을 뿐이다.

백상의 표정이 일그러지던 그때, 뒤쪽에서 사자후가 들려왔다.

“네 이놈, 당장 멈추지 못할까!”

날카롭게 정련된 도기가 백상의 뺨을 스쳤다.

가면을 쓰고 있다고 한들 막을 수 없었다.

붉게 물든 피부에서 핏물이 주르륵 흐른다. 공기가 순식간에 데워져서는,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이것이 바로 금모도왕 남천의 무공.

태산검문 특유의 극양(極陽)이 가면 아래 내재한 음기를 지우니, 백상의 정신이 크게 뒤흔들렸다.

“크윽……!”

“흥!”

콧김을 내뿜은 남천이 나뭇가지를 박찼다.

으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무 하나가 부러진다. 극양의 기운이 대지를 뜨겁게 달궜다.

낭인이 흔히 익히는 투력보(鬪力步).

앞으로 쇄도하는 힘만 과할 뿐, 방향을 바꾸거나 하는 현묘함은 없다. 단순함으로 따지자면 삼재검법과 비슷했다.

하지만 남천이 펼치는 투력보는 평범함이라는 테두리에서 일찌감치 벗어났다.

“거기 서라!”

남천의 허벅지와 장딴지가 양기를 머금은 채 부풀었다. 금방이라도 힘줄이 터질 듯 맥동했다.

그 발이 땅을 때리는 순간.

꽈광!

작약이 터지는 듯한 굉음이 터졌다. 남천이 의도치는 않았지만, 극양의 기운이 담긴 음공과 같았다.

“무슨 저런……!”

백상의 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심의를 포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단순함과 강함. 남천의 무학은 대체로 이러했다.

그렇기에 호사가들은 남천의 투력보를 다른 이름으로 칭했다.

투신보(鬪神步).

수십 보 바깥에서도 완연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오직 남천만이 펼칠 수 있는 보법이다.

“하하, 귀가 따갑지 않더냐-!”

남천의 외침에 백상의 시야가 명멸했다. 귀 안쪽이 터지면서 평형감각이 무너지고, 청각이 흐려졌다.

이대로는 안 된다.

백상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제기랄!”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남천을 향해 검을 던지고, 숲 사이로 몸을 숨긴다.

임기응변에 불과한 행동이었지만 백상은 호흡을 다잡아야만 했다.

‘빌어먹을 극양!’

칠성교의 입교는 악신이나 요신을 가면 아래에 가두고 사역하거나 동화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자연히 음기를 키우는 내공심법을 익혀야 했고, 선기와 양기에 취약했다.

특히 남천은 극양의 기운을 가진 무인.

그에게 타격을 입히려면 지금처럼 쫓기는 게 아니라, 함정을 파고 습격하는 것이 옳았다.

‘일단은, 이곳을 피한다.’

이미 요현이 죽은 것만으로 칠성교의 피해는 과하다.

여기서 자신까지 죽는다면 칠성교주가 어떤 짓을 벌일지 몰랐다.

‘죽어서도 안식을 찾지 못하겠지.’

모골이 송연해진 백상은 몸을 부르르 떨고는 갈대밭을 향해 달렸다.

마침 바람이 강해서인가, 늑대 무리가 갈대 사이를 달리는 듯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곳이라면 피 냄새와 발자취를 지울 수 있다.

백상이 상체를 숙인 채 갈대밭으로 진입한 그때.

“여기서 나를 떨쳐 보겠단 게냐?”

남천의 외침에서 느껴지는 분노와 비웃음.

백상은 그것을 애써 무시했다.

‘아무리 저놈이 강하다고 한들, 어찌 갈대밭 전체를 날려 버릴 수 있으랴.’

그저 조용히 사라지면 그만이다.

백상이 발걸음을 재촉하는 순간, 극양의 도기가 갈대밭을 향했다.

쩌저적!

태산검문의 무공, 철검칠식(鐵劍七式).

분천지(分天地)의 일도가 갈대를 갈랐다. 극양의 기운이 하늘과 땅 사이를 불사를 듯이 일렁였다.

‘이런 미친!’

대체 얼마나 심후한 내력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백상의 등 뒤로 뜨거운 기운이 치달았다. 이대로라면 등가죽이 타 버릴 것만 같았다.

“끄으윽……!”

입술을 꽉 앙다물며 인내하던 그때, 남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했나?”

고개를 갸우뚱거린 남천이 다시 도를 쥐었다.

정말로 누가 죽는소리를 낼 때까지 재차 펼치려는 듯했다.

‘강호의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구나!’

단순함으로는 남천이 제일가는 고수라더니, 백상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두 번째로 얻어맞는다면 내면에 가둬 둔 악신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손이 많이 가는 부하로군.]

전음 한 줄기가 귓전의 스치고, 남천의 뒤쪽에서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기수식을 취하던 남천이 우뚝 멈췄다.

“저기로구나!”

쩌적!

땅거죽이 뒤엎어지는 굉음과 함께 남천이 다른 방향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백상은 고통을 인내하며 벌벌 떨었다.

[교주님,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안다. 하지만 그대로 넘어가서도 안 되는 일이지.]

칠성교주, 괴성의 전음은 무미건조했다.

[복귀하면 삼존 후보를 추려서 데려오도록.]

[알겠습니다.]

백상이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멀리서 남천의 고함이 들렸다.

“어디로 간 거냐! 이노옴-!”

꽈과광!

굉음은 밤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

만금상단이 무너진 자리에 흩날리는 무수한 먼지와 나뭇조각, 기관의 장치들.

수많은 일꾼을 들였지만, 잔해를 치우는 것만으로 닷새는 족히 걸릴 일이었다.

백무량은 조원양의 안색을 살폈다.

겉으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메마른 입술에서 쓰라린 본심이 느껴졌다.

‘금모도왕이 그놈을 잡아 오면 좋겠지만, 안 되겠지.’

소문이 사실이라면 추적술은 남들보다 훨씬 뒤떨어질 터.

백무량의 추측은 곧 사실이 되었다.

“미안하네, 놓쳤어.”

백상을 놓친 남천이 침을 퉤퉤 뱉어 댔다.

이에 조원양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않나, 상대가 칠성교니까.”

“쯧.”

남천의 시선이 잔해를 치우고 있는 일꾼들에게 향했다.

“이래서야 농담도 못 치겠군.”

“뭐, 만금상단이 드디어 망할 때가 왔다고?”

“그래!”

“여전히 눈치가 없군그래.”

조원양이 피식 웃고는 백무량을 가리켰다.

“여기 있는 대협께서 내부에 침입했던 마인을 잡아 주셨다네. 자네보다 훨씬 유능하지.”

“오!”

감탄을 흘린 남천이 백무량에게 다가갔다.

“몇 시진 전에 잠깐 보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그…… 곤륜……신검?”

“곤륜신성입니다.”

“그 실력으로 신성? 하하, 저놈 말처럼 나보다 나으니까 앞으로 신검이라고 하게.”

남천이 털털한 웃음을 보였다.

백무량은 속으로 놀라움을 삼켰다.

‘무인답지 않아.’

농담이라고 해도 약관에 불과한 자신을 자기보다 낫다고 말하다니?

지금까지 봐 온 고수 중에 속 좁은 목허도장이 있었기에 더욱 신기한 일이었다.

백무량은 편한 마음으로 남천에게 예를 표했다.

“아닙니다. 선배가 계시기에 저도 편하게 싸울 수 있었습니다.”

“하하, 말본새가 아주 듣기 좋구만! 평소에는 워낙 개새끼나 병신 소리만 들어서 말이야!”

남천의 걸걸한 목소리에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구천검 시절에 함께 어울렸던 몇몇 낭인이 떠오른 것이다.

그걸 본 남천이 히죽 웃었다.

“뭐가 그리 웃기나? 도사치곤 특이하구먼, 보통 내가 이러면 열 받는 걸 참느라 표정을 구기던데.”

“그냥, 그냥 우스워서 그랬습니다.”

“선배가 우스워?”

목을 조르려는 척, 백무량에게 어깨동무를 한 남천이 조원양을 곁눈질했다.

“이놈 이거, 마음에 드는데?”

“자네 마음에 든 것치고 좋은 결과가 없지 않던가?”

“아니, 이 사람아! 허례허식이 없다는 게 좋다는 거지!”

남천은 팔에 은근히 힘을 주며 백무량에게 물었다.

“나이가 몇이냐?”

“이제 막 약관이 되었습니다.”

“허, 약관인데 만금상단을 무너뜨려? 대단한 놈이로고!”

칠성교도를 무찌른 게 만금상단을 무너뜨린 일로 바뀌었다.

백무량은 남천이 걸어오는 장난에 그저 껄껄 웃었다.

괜히 아니라고 해 봐야 남천 같은 낭인에게는 놀림거리가 될 뿐이었다.

그러다가 내심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그나저나…… 선배께서 태산검문의 유지를 이었다는 소문이 자자하지 않습니까?”

“그게 뭐.”

남천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백무량은 무언가 실언을 한 게 아닌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칠성교와 싸울 때 제 사문과 함께 제일 분전했던 문파라고 해서, 묻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모처럼 마음에 들었는데 그쪽이었다고?”

백무량에게 어깨동무를 푼 남천이 혀를 쯧쯧 차 댔다.

대답하기가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봐, 조가, 내가 평소처럼 하면 어떻게 될까?”

조원양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모처럼 수습한 건물의 잔해가 가루가 되겠지.”

“들었지? 후배, 내가 그걸 대답해 주면 만금상단의 건물이 사라진다는군.”

갑자기 저게 무슨 소리인가?

백무량은 눈을 끔뻑거리다가, 남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태산검문이랑 나랑 무슨 상관이냐는 거지. 나한텐 그게 시비거든. 시비가 걸리면 싸우고, 주위가 무너지고 그래.”

두서없이 말을 주절거린 남천이 오른손을 휘저었다.

“태산검문을 물으려거든 나 말고 딴 놈한테 물어봐. 태산 근처에 사는 도문이나 호사가가 괜찮겠네.”

“하지만…….”

“딴 얘기나 하자고.”

남천이 말을 무시하려고 들자, 백무량은 잠깐 고민했다.

저대로 두느냐 아니면 더 묻느냐.

답은 간단했다.

“들어야겠습니다.”

“염병!”

욕을 중얼거린 남천이 오른발로 땅을 툭툭 차 댔다.

“그놈의 태산검문이 나한테 뭘 해 줬다고 그래? 쥐뿔도, 개뭣도 해 주지도 않았는데 지랄은 지랄! 어쩌다가 비급 하나 주워다 배운 게 다야!”

“……예?”

“다 내가 알아서 배웠다는 거지.”

남천이 품에서 비급 두 개를 꺼내서 백무량에게 던졌다.

그것을 받아 든 백무량은 깜짝 놀랐다.

철검칠식 도해(圖解).

열화신공(熱火神功).

태산검문을 대표하는 두 무공.

백무량은 감히 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남천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남천이 씨익 웃었다.

“그래도 싹수 있는 도사라고 곧바로 펴 보진 않네. 낭인들은 허겁지겁 보느라 바빴는데.”

“하지만 이건…….”

“봐 보라고.”

백무량은 남천의 말대로 비급을 펴 봤다.

‘……이건.’

설명이 완전히 배제된 그림들.

무공의 도해가 적힌 비급이라기엔 너무나도 부실했다.

이대로 익혔다가는 극양을 품다가 기혈이 터지거나, 철검칠식의 무리한 움직임에 근육이 끊어지고 만다.

백무량이 인상을 찡그리자, 남천이 허리에 묶은 도를 툭툭 쳤다.

“그것도 물어봐야지, 왜 검이 아니라 도로 익혔느냐고.”

“초식을 단순하게 쓰기 위해서겠지요.”

“그것도 아냐, 그냥 도가 잘 정련된 검보다 쌌거든.”

여유가 생겼을 땐 이미 도가 손에 익어 버렸노라고.

남천이 담담한 목소리로 자기는 태산검문의 후예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것을 물어보는 무인 또한 지겹다고 덧붙였다.

“나는 낭인이 좋아. 그딴 개 같은 사정, 안 궁금해하거든.”

“이걸로 강호십대고수가 된 선배야말로 천재 아닙니까.”

“천재는 지랄, 그게 뭐 밥 먹여 주나.”

말은 그렇게 하지만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뒷머리를 벅벅 긁는 남천에게 백무량은 정중한 목소리로 청했다.

“선배와 비무하고 싶습니다.”

검법을 도법으로 바꾸었다고는 하나, 태산검문의 정종을 익힌 사람이 바로 남천.

‘더 높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백무량의 열의 어린 시선에 남천이 고개를 홱 돌렸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살며시 찌푸린 그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싫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