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29화 (129/275)

호위 (5)

‘벽을 기어오른 건가?’

백무량은 몸을 뒤틀어서 대검을 피했다. 필연적으로 요현을 뒤로 밀쳐 낼 수밖에 없는 방향이었다.

하지만 대검의 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투검(投劍)!’

대검을 던져서 건물의 벽을 허물고, 안쪽에 있는 자신을 노리다니?

백무량은 사 년 전에 마주했던 사자탈의 두 마인을 떠올렸다.

그들이 특이한 무공을 지녔듯, 요현이나 대검의 주인도 마찬가지였다.

백무량이 아랫입술을 짓씹는 사이, 요현이 기쁜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백상(白象)!”

요현의 외침이 나오기가 무섭게 두 번째 투검이 백무량을 노렸다.

마치 당가의 암기를 닮은 듯한 소도(小刀).

백무량은 입술을 비틀었다.

처음 당했을 땐 당황했지만, 지금은 눈에 익었다.

그렇다면 반드시 대응할 수 있다.

‘자소단을 괜히 많이 취한 게 아니야.’

쿠르릉……!

청운이 해일처럼 일어난다.

본디 외력(外力)을 지니지 못했던 기운이 막강한 내공과 선기를 머금고 바위처럼 단단해졌다.

뒤이어지는 심의(深意)가 청운을 제 의지대로 움직이게 만드니.

“감싸, 안아?”

요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백상의 투검이 붙잡히는 광경은 난생처음이었다.

아니, 되레 날아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간다.

요현은 백무량의 무위에 몸서리쳤다. 그는 자신의 술법을 선기로 지울 수 있을뿐더러, 백상의 투검조차 무효로 만들었다.

백무량은 요현의 꼴을 보고는 히죽 웃었다.

“소란이 커지는군. 감당할 수 있겠나?”

“뭐, 뭐가?”

“여긴 나만 있는 게 아니거든.”

백무량의 시선이 바깥으로 향했다.

요현도 백무량을 따라 허물어진 벽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누렇게 변한 장발의 거한이 무시무시한 살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금모도왕, 남천……!”

요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기감이 둔하고 술법을 알아차릴 기예가 없을 뿐.

남천의 무공은 단천(斷川)의 기세가 담겨 있었다.

아무리 백상이 투검의 달인일지라도 남천을 상대하면서 백무량을 견제할 틈은 없을 터.

이는 요현뿐만 아니라 백무량도 알고 있었다.

백무량은 청운을 한껏 끌어모으며 주먹을 쥐었다.

“자, 더 해보겠느냐?”

“기고만장하기는!”

요현의 목소리에 짙은 요기가 서렸다.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는 위기감이 천면호를 한계선까지 끌어온 것이다.

그걸 본 백무량은 호흡을 고르며 뒤쪽에 있을 조원양에게 전음을 보냈다.

[곧 건물이 무너질 겁니다. 어서 내려가십시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요현이 조원양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어떤 미친 짓을 할지 모르니까.

단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릴 뿐.

백무량은 그 소리를 덮기 위해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금모도왕-!”

“어느 놈이 불렀느냐!”

“바깥에 투검의 고수가 있소! 그놈을 쇠사슬로 붙잡아 주시오!”

“……그쪽에도 마인이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없어도 괜찮겠느냐-?”

“한 손으로도 이길 수 있소!”

백무량이 당당하게 외치자 ‘크하핫’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남천의 기척이 사라졌다.

요현의 얼굴은 분노로 물들어서는 점차 요기에 감싸이기 시작했다.

“감히 천면호에게 도전하다니.”

“내 알 바냐.”

백무량은 어깨를 으쓱이면서 요현의 신색을 훑었다.

‘가면에 금이 간 이후로 점차 요기가 짙어지는데, 슬슬 검을 뽑아야 할지도 모르겠군.’

손등의 운룡이 점차 빛을 발하고 있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요현의 정신이 점차 허물어지고, 신에게 동화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사형의 서책을 보지 않았다면 왜 저러는지 몰랐겠지.’

백무량은 호흡을 머금고 청운을 사방에 퍼뜨렸다.

그 직후, 땅을 박찼다.

꽈과광!

멀리서 날아온 투검이 한 층을 박살 냈다.

잠깐이었지만 가히 청룡언월도를 떠올리게 하는 크기였다.

“곤륜신성!”

반쯤 이성을 잃은 요현이 오른팔을 휘둘렀다.

아주 원시적인 공격이었지만, 손톱에 휩싸인 요기가 가공할 만한 힘을 품고 있었다.

피하지 않으면 가슴팍이 찢어진다.

백무량은 가볍게 혀를 차며 상체를 뒤로 기울였다.

완벽하게 펼쳐진 철판교 위로 요현의 오른팔이 지나갔다.

이에 요현이 속으로 득의의 미소를 머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녀의 정신을 장악한 천면호의 미소였다.

[아이야, 땅이 무너졌는데 어찌 저 자세에서 균형을 유지하겠느냐? 당장 죽여 버리렴.]

“예.”

넋이 나간 요현이 왼팔로 오른쪽 어깨를 내리쳤다. 관절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오른팔의 방향이 억지로 휘었다.

백무량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칠성교의 무학이 신에게 기생하는 형태라고는 하나, 저건 자기 자신을 죽이는 짓이었다.

‘마교는 마교로구나.’

과거, 양청교가 자신에게 의견을 개진했었다.

칠성교는 자기가 입교하길 바란 것일 거라고, 그때는 확신이 없어서 아니라고 하기가 어려웠다.

하나 지금의 백무량은 단언할 수 있었다.

‘저런 꼴이 되려고 입교한 건 아니었을 거야.’

신에게 동화되면서 장난감처럼 휘둘리는 인간이라니.

속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자비와 자애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요기(妖氣)가 백무량의 신경을 건드렸다.

투둑.

백무량의 양발이 아래로 무너지는 벽을 디뎠다. 시간으로는 찰나를 쪼갠 순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운중용형보의 공타식, 공정식, 허류식.

강호에서 가장 뛰어난 보법이자 경신법이 백무량의 하지(下肢)에 실렸다.

허공에서 철판교의 자세를 취했음에도 균형이 맞춰지고, 청운이 상반신을 감싸 안는다.

태청신공이 발전하면서 자연스레 터득한 단계.

백무량은 마치 평지에 서 있는 것처럼 평온했다.

“으아아!”

위기감을 느낀 요현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울먹이던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뽑았다.

무시무시한 요기와 가면 아래 숨겨진 무언가가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아.’

백련교주에 비하면 압도적이지 않다.

요현의 미간을 발로 찬 백무량이 자세를 똑바로 고치고는, 곧바로 검을 내질렀다.

구천화우검의 일초, 균천관일.

일 갑자의 내공과 선기가 뒤섞인 일격이 요현의 가면을 강타했다.

뚜둑, 뚜두두둑…….

가면이 완전히 부서지며 요현의 민낯이 드러났다. 천면호에게 완전히 사로잡혀서는, 털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복잡한 감정이 든 백무량은 선기를 담아 말했다.

“지금, 네 모습이 어떤 줄 아느냐?”

“…….”

잠깐 동안, 요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은 못 했다는 말이 옳았다. 가면이 부서진 이상, 삼존 요현이 아니라 천면호가 씐 인간이 된 셈이니까.

선기에 맞닿았기에 요현의 정신이 천면호 위로 떠올랐을 뿐이다.

그 찰나 동안 요현은 자신의 팔을 보았다. 입술이 저절로 비틀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 이런, 이런 걸……!”

요현이 눈물을 흘리자, 백무량은 무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사연이 있어서 사교에 들어갔는지 모른다. 내가 알 필요도 없지. 어차피 너 또한 죄 없는 양민을 죽인 마인이니까.”

사실은 무정한 척할 뿐이다.

저렇게까지 변모한 사람을 앞에 두고도 침착할 사람은 없었다.

그저, 후회했으면 했다.

어떤 사연이 있건, 무슨 억하심정이 있었던, 마교에 들어갔다는 것 자체를.

백무량은 마지막에 떠오른 감정을 담아서 요현을 바라보았다.

“다만 이제 죽이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 조금은 안타까워서 말했다.”

동정심.

요현은 백무량의 말에서 온기를 느꼈지만, 살의가 그 위를 덮었다.

오로지 천면호의 의지였다.

“건방진 놈!”

요현의 목소리가 지워지고, 천면호처럼 날카로운 쇳소리가 사방을 때렸다.

백무량은 순간 두 손을 교차했다. 그와 동시에 천면호의 요기가 사방으로 폭사했다.

꽈과광!

그렇지 않아도 불안정했던 만금상단이 일거에 무너졌다.

백무량은 밀려 나가는 몸을 청운으로 붙잡고, 무너져 가는 벽의 파편을 밟았다.

“어째서 무탈한 것이냐!”

천면호가 백무량에게 뇌성벽력 같은 호통을 내질렀다.

수백 년 동안 모아 온 요기, 요현의 악행으로 쌓은 업(業).

그 모든 것이 백무량에겐 통하지 않았다.

백무량이 선기를 가지고 있다는 걸 고려해도 특이한 일이었다.

답은 오직 하나뿐.

“설마……!”

천면호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같은 삼존인 백상, 정확하게는 그의 내부에 있는 악신에게 의념으로 전해야 했다.

-대적자는 사실 낙매신검이 아니라, 곤륜신성이었다!

지난 사 년 동안 만마교단은 낙매신검을 견제하고 독을 푸는 데 전념했다.

백련교주와 마주하고도 살아남았단 것 자체가 하늘이 내린 대적자만이 가능한 기적이니까.

‘칠성교주께서도 오해하고 있었어! 이대로 두면 안 돼!’

천면호가 백상에게 의념을 보내려는 그때.

백무량의 손등에 새겨진 운룡이 천면호의 요기를 먹어 치우고 거대해졌다.

뒤이어 운룡이 천면호의 목을 물었다.

“……!”

천면호가 몸을 버둥거리는 사이,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쥐었다.

운룡이 거대해지는 광경은 아예 보지도 못했다.

요현에게 주려는 안식과 자비.

구천화우검의 후반부를 펼치기 위해서는 극도의 집중과 심상이 필요했다.

“현천부휘.”

백무량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청운으로 이루어진 검강이 섬광처럼 이어지는 연격.

천면호의 전신에 검상이 새겨진다. 청운으로 만들어진 운무가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백무량의 초식은 아직 끝나지 않은 채, 이어졌다.

“양천대소(陽天大疏).”

구천화우검의 육초, 양천대소는 현천부휘의 변초이자 개량.

현천부휘의 검강이 한데 모여 벽력을 그린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천면호를 찌그러뜨렸다.

쩌저적!

천면호와 완전히 동화되어 인간과 거리가 멀어져 버린 육신이 갈라지고, 찢어졌다.

“아아악!”

고통에 찬 비명이 천면호의 입가에서 터져 나왔다.

백무량은 그 광경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얼마나 아프더냐, 괴물.”

“네놈……!!”

“네가 괴롭힌 사람들보다는 못할 것이다.”

백무량의 우수가 반원을 그렸다.

양천대소에 숨겨진 비수라고 할 수 있는 칠초, 주천암성(朱天暗星).

검강과 동시에 펼쳐지는 암경(暗經)이 천면호의 심장을 도려냈다.

‘도가의 무공과는 가장 동떨어진 초식이지만, 이보다 확실한 살초는 없지.’

땅바닥에 내려선 백무량은 천면호를 내려다보았다.

먼지투성이로 변한 천면호는 단말마의 비명 하나, 유언 하나 남기지 못한 채 피거품을 뻐끔거리며 죽어 가고 있었다.

어울리는 죽음이었다.

칠성교와 결탁한 한낱 잡신에 불과한 놈에게는.

“자네…….”

백무량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한쪽 팔에 상처를 입은 조원양이 깜짝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은가?”

“저야 아무렇지 않습니다. 한데, 상왕께서 상처를 입었으니 호위로서는 실격이군요.”

“나는 자네가 남천과 교대하고 떠난 줄 알았다네.”

“사실은…… 이놈이 어딘가 숨어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백무량은 조원양에게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금환을 미끼로 삼아 요현을 끌어냈고, 그 덕택에 침입을 적시에 막아 낼 수 있었노라고.

설명을 마친 백무량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데 금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방금 골목에서 발견했네.”

“다행입니다.”

백무량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을 본 조원양은 속으로 생각했다.

‘단순히 은혜를 갚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접근하면 안 되겠군.’

칠성교도를 압도적으로 이겼을 뿐만 아니라, ‘그 남천’을 자기 마음대로 지휘한 솜씨란!

처음부터 평범한 무인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백무량의 기량은 예상했던 그 이상이었다.

조원양은 속으로 만금상단이 가지고 있는 보물과 영약 들을 떠올렸다.

‘윤이나 우백이에겐 미안하지만, 인연을 확실하게 잡아야겠어.’

백무량의 눈치를 살피던 조원양이 헛기침을 했다.

“크흠, 흠. 자네, 하루 정도 시간을 비워 줄 수 있나?”

“앞으로 이틀은 여유가 있습니다.”

“호위는 이제 끝났네. 그러니…… 내가 무언가 보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백무량은 속으로 득의의 미소를 숨기고는 도사다운 표정을 지었다.

“어디까지나 상왕의 체면을 위해서 받는 겁니다.”

“알겠네, 허허.”

조원양은 백무량의 내심을 알아차렸지만, 모른 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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