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31화 (131/275)

시험 (2)

‘싫다?’

백무량은 남천이 내놓은 뜻밖의 대답에 귀를 의심했다.

비무를 싫어하는 무인이라니.

그것도 강호십대고수에 오른 고수가 거절하는 경우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백무량의 표정이 굳어졌다.

“제가 부족한 겁니까?”

“내가 놓친 놈을 너는 잡아다가 죽였잖냐! 네가 부족하면 나는 벽에 대가리를 박고 뒈져야지.”

“하면 왜입니까?”

“비무처럼 병신 짓거리를 왜 해?”

남천이 한쪽 볼을 씰룩였다.

백무량은 그의 조소에서 복잡한 과거를 읽었다.

태산검문의 후예라는 단어에 질색하고 비무를 거절하는 이유가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왠지 그런 예감이 들었다.

‘자세한 건 묻지 않는 게 좋겠지.’

남천과의 대화는 이제 겨우 일다경에서 한 식경 남짓.

그에게 깊은 이야기를 듣기에는 친분이 없다.

백무량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두 손을 모아 올렸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실례는 무슨…… 내가 싫다고 한 것뿐이지.”

남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괜히 그러니까 미안해지잖냐, 씁.”

“정말로 괜찮습니다.”

“하여간 비무라면 끼니도 거르는 새끼들이 워낙 많으니, 나 같은 정상인이 미친놈처럼 보인다니까.”

한참 동안 불만을 툴툴거리던 남천이 숨기고 있던 말을 툭 던졌다.

“이번 일은 내가 빚졌어.”

“……?”

“그딴 표정 짓지 말고, 그렇게 알아.”

남천의 폭언에 옆에서 듣고 있던 조원양이 실소를 터트렸다.

“솔직하지 못하기는, 나이를 어느 구멍으로 먹었는감?”

“시끄럽다! 돈 귀신 놈!”

윽박을 내지른 남천이 백무량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표정이라.

백무량은 웃음을 속으로 참고서 남천의 말을 기다렸다.

“……다음에는.”

남천이 힘겹게 뗀 서두.

백무량은 부드러운 어조로 남천을 응원했다.

“편히 말씀하십시오.”

“어른이 말씀하잖냐, 끝까지 들어. 그러니까…… 음, 다음에는 말이야.”

남천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늘 남에게 험한 모습을 보이고 빚을 받아 내던 남천에게 있어 이번 일은 매우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태산검문의 역사라든가, 뭐 칠성교와 어떻게 싸웠는지 알아보마.”

“다음에는 비무도 해 주십니까?”

“염병.”

남천이 욕을 주절거리자 백무량은 기탄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를 지켜보는 조원양 또한 흐뭇한 마음이었다.

“남천 자네, 좀체 사람이랑 어울리질 못하더니만, 성격 좋은 후배가 있어서 다행이구먼.”

“누가 들으면 내 보모인 줄 알겠어?”

“어디서 외상으로 술 퍼먹으면 내가 가서 갚아 주고, 심심하다 그러면 놀아 주고, 그게 보모지 뭔가?”

“에이, 씨발. 상왕님 아니랄까 봐 말은 청산유수네.”

남천이 둘 다 저리 다 꺼지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의 시선이 무너진 잔해로 향한 걸로 보아, 만금상단의 수복에 손을 거들려는 듯했다.

백무량은 조심스레 조원양 옆으로 이동했다.

‘부탁받은 건 호위지 공사까진 아니니까.’

그 움직임을 알아차린 조원양이 눈치 빠르게 말을 붙였다.

“하던 이야기가 남아 있었지.”

“예, 그랬지요.”

“저기서 이야기하세.”

조원양과 백무량의 대화를 들었는지, 남천의 목소리가 저절로 커졌다.

“건물이 무너졌는데 어딜 가는 거냐!”

“선약이 있다, 이놈아!”

남천에게 소리를 버럭 내지른 조원양이 백무량보다 앞서 걸어갔다.

무너진 만금상단과는 다른 방향.

그걸 의아하게 여긴 백무량이 전음을 보냈다.

[보답을 받으려면 잔해를 치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긴 어디까지나 내 안위를 위해서 지어진 거지. 귀한 물건은 따로 보관해 두고 있다네.”

조원양의 눈이 깊어졌다.

찰나였지만 아주 먼 과거를 떠올린 듯했다.

백무량은 그를 따라서 청운을 운용했다.

지금 당장은 큰 피해를 보고 물러났다지만, 언제 다시 찾아올지도 몰랐다.

저벅, 저벅.

두 남자는 말없이 밤거리를 걸었다.

만금상단이 무너져도 호광성의 시장은 시끌벅적했다.

그러다가, 가끔.

“장사는 잘되는가?”

“물론이지요! 그나저나 팔은 어쩌다 그렇게 되신 겁니까?”

“잠깐 다쳤네. 큰일은 아니었어.”

“다행입니다, 허허.”

조원양과 상인의 대화가 자잘하게 이어졌다.

백무량이 보기엔 그것이 퍽 기이했다.

천하의 돈을 쥐고 있다는 상왕 조원양.

그와의 대화가 부담스러울 만도 한데, 상인의 얼굴에는 동네 할아버지를 보는 듯한 편안함이 있었다.

백무량이 궁금증을 느끼려는 찰나에 조원양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상하게 보이는가?”

“솔직하게, 그렇습니다.”

“자네에겐 이삼류 무인이 고수를 편하게 대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구먼.”

“…….”

백무량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만일 자신이 상인이었다면 조원양을 보자마자 대경실색하거나, 스스로 허리를 굽혔을 터였다.

하지만 이곳의 상인들은 그러지 않았다.

마치 이웃 할아버지를 대하듯, 조원양을 대하는 태도에서 어려움이 없었다.

그것이 꾸며진 것이든, 아니든 간에.

조원양이 백무량에게 뜻 모를 웃음을 보였다.

“하늘을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사람을 보았는가?”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찬가질세.”

조원양의 시선이 거리 하나에서 시장 전체로 커졌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테지만, 적어도 백무량이 보기에는 그랬다.

“내 나름대로 꾀를 냈지. 그게 잘 먹혀서, 상왕이라는 명성도 얻었네. 시기나 질투도 그쯤 되면 잘 떨어져 나가더군.”

“……!”

백무량은 속으로 놀람을 감췄다.

조원양의 말이 사실이라면 강호에 자자한 명성과 부 모두 어느 정돈 꾸며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나쁘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내가 상왕이 아니었다면 만금상단이 무너졌을 때, 시장이 고요했을 걸세. 다들 내가 망했는지 확인하러 왔겠지. 무슨 물품이 망가졌는지 본 다음, 다음 날 행동을 정했을 테고.”

그것이 바로 상계에 들이닥쳤을 혼란이었을 거라며.

조원양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적은 그것을 원했을 거네. 굳이 나를 납치하지 못하더라도, 만금상단이 무너졌다는 사건 자체가 큰 파장을 일으킬 테니까.”

“하지만 실패했지요.”

“다 나와 자네가 잘나서 그런 거 아니겠는가!”

호탕하게 웃은 조원양이 한 곳을 가리켰다.

널따란 강가에 있는 전각.

드넓은 조망으로 유명한 주가(酒家)였다.

‘이게 무슨…….’

백무량이 눈을 의심하는 사이, 조원양이 앞서 걸어갔다.

왁자지껄한 이야기 소리, 서로가 호걸임을 증명하려는 듯 술을 해치우는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건물이 무너진 마당에 술을 마시자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백무량은 주변을 사납게 살피며 조원양을 뒤따랐다.

그사이 조원양이 주인장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내가 전에 남겨 둔 술은 어디에 있는가?”

“지하에 있습니다.”

남자의 대답에 조원양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행동으로 백무량은 내막을 곧바로 이해했다.

만금상단이 남몰래 숨겨 둔 보물.

그것들 모두 주가의 지하에 있다는 것을…….

“눈치가 좋군.”

조원양의 말에 백무량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송 노야에게 배운 게 없지는 않습니다.”

“그 친구도 참, 얄팍한 잔재주가 많단 말이지.”

조원양이 옛 친구를 떠올리며 말했다.

“다음에 만나면 안부나 잘 전해 주게. 조가가 언제 죽냐고 물어봤다고 말일세.”

“그러지요.”

고개를 끄덕인 백무량이 조원양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처음에는 주취로 코가 썩는 듯했지만, 특별한 기관 장치를 지나 더 아래로 내려갔을 땐 고아한 향이 풍겼다.

백무량이 아는 향취였다.

“사향노루입니까?”

“그 친구에게 잘 배웠군. 맞네. 질 낮은 술 냄새에 찌들지 말라고 걸어 놓았다네.”

조원양의 이야기는 자잘하게 계속되었다.

남해 보타암에 관한 정보, 송우현의 나쁜 버릇, 최근 곤륜파의 성장세에 대한 칭찬들.

백무량의 흥미를 사로잡은 건 바로 전자였다.

“보타암이 침묵하고 있다니요?”

“몰랐는가? 백련교의 난 이후로 단 한 사람도 나오질 않고 있다네.”

“……으음.”

백무량은 침음성을 흘렸다.

아직도 고요한 아미파도 그렇고, 이번에 들은 보타암까지.

이유 모를 침묵은 늘 불안을 부르기 마련이다.

특히 이번에 만난 칠성교도는 사람의 얼굴을 바꾸는 재주가 있었다.

‘다른 마인도 그런 술법을 가지고 있다면 어떨까?’

고개가 저절로 내저어졌다.

청성파의 멸문, 치명상을 입은 화산파.

가뜩이나 혼란해진 강호에 의심암귀를 불어넣는 꼴이었다.

그렇게 백무량이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조원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이 많은가 보군.”

“아, 그렇게 보였습니까?”

“주변에 금이 이렇게 번쩍이는데 눈길 하나 주지 않으면, 도사 이전에 사람이 아닐 걸세.”

조원양의 말에 백무량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과연, 그 말대로 갖은 금원보와 영약이 든 함들로 가득했다.

하물며 벽에 걸린 병장기는 어떠한가.

“평범한 무인이 들면 오히려 자기 팔을 베겠군요.”

백무량의 말에 조원양이 예전에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저 검이 바로 천무검성이 쓰던 칼일세.”

“천무검성……?”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백련교의 난 때, 백련교주가 했던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나에게 상처를 남긴 건 천무검성 유성백 이후로 처음이다. 네 재능에 경의를 표하지.

얼굴도 모르는 무인이었지만, 백련교주가 인정했다는 점에서 대단한 고수임은 짐작하고 있었다.

한데 그의 검을 칠십여 년이 지난 뒤에 보다니!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벽으로 다가갔다.

‘수십 겹의 예기(銳氣)라.’

내공 하나 없이, 그저 휘두르는 것만으로 강철을 베고도 남을 검이다.

백무량과 검이 가까워지자 조원양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조심하게. 손가락이 잘린 하인이 있었다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백무량은 숨 쉬듯 자연스럽게 청운을 운용했다.

이 갑자에 이르고부터 태청신공과 백무량의 의지는 거의 합일된 지 오래였다.

검이 품고 있는 예기를 밀어 내는 것 또한 간단하다.

“보십시오.”

백무량이 벽에 걸린 검을 꺼내자 조원양이 탄성을 터트렸다.

“호오……!”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던 검을 아무렇지 않게 꺼낸 게 신기하게 보인 듯했다.

피식 웃은 백무량은 칼날을 들여다보았다.

‘공을 잘 들였구나.’

천무검성 유성백이 어떤 무인이었는가.

그건 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피를 자주 먹였다면 요검이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거야.’

검이 가진 예기는 다루는 무인에 따라 살기가 되었을 것이고, 의념을 다루는 고수라면 살의로 진화했을 터였다.

하지만 천무검성이 썼다던 이 검은 순수했다.

단지 칼날이 날카로울 뿐, 누군가를 해하겠다는 의지는 없었다.

‘손가락이 잘린 하인도 궁금해서 대 본 거겠지.’

대수롭지 않게 여긴 백무량은 조원양에게 검을 내밀었다.

“이거 말고 더 좋은 건 없습니까?”

“어허, 이러지 말게.”

“검은 검이지요.”

“끄으음…….”

조원양이 검에 질색하면서 두 걸음 물러났다.

백무량은 그제야 검이 발하는 기운을 알아차렸다.

‘주인을 가리는 건가?’

청운에게 속절없이 밀려났던 예기가 조원양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이 우스워서, 백무량은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평범한 검은 아니군요.”

“내가 말했잖나. 하인의 손가락이 잘렸다니까.”

남천처럼 툴툴거린 조원양이 다른 곳을 가리켰다.

“어차피 그 검은 처치가 곤란했던 참일세. 그건 그냥 줄 터이니, 다른 것도 골라 보게.”

“오호라.”

탄성을 터트린 백무량은 모든 잡념을 지웠다.

이왕 이렇게 된 것, 가장 좋은 물품을 집어 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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