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22화 (122/275)

심상 (3)

낙매신검의 신색을 본 백련교주가 눈을 빛냈다.

“오호라, 네놈은…….”

“닥쳐라!”

낙매신검이 내지른 노호에 자하진기가 담겼다.

원숙하기 그지없는 발출. 백련교주가 오른팔을 가볍게 휘둘렀다.

파앙!

마기와 자하진기가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막대한 충격이 매화비원을 한차례 휩쓸어, 바닥에 깔려 있던 매화 잎이 위로 붕 떠오른다. 낙매신검과 백련교주 모두 눈살을 찌푸렸다.

백무량은 그 틈을 노렸다.

구천화우검의 삼 초, 호천풍연.

청운으로 빚어진 무형의 검기가 백련교주의 등을 노렸다.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

“나름의 은혜라고 생각하여 가만히 두었거늘.”

백련교주가 고개를 돌렸다. 마기로 새까맣게 물든 눈동자 가운데, 금색의 휘광이 감돌고 있었다.

백무량은 이를 꽉 앙다물었다.

“바라지도 않았어.”

“그런가?”

백련교주가 호천풍연의 검경을 한 손으로 쥐어 터트렸다.

그럼에도 상처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

‘괴물인가?’

좌호법 이화겸조차도 호천풍연을 막아 내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가!

백무량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압박감을 느꼈다. 염천일원을 펼친다고 한들 격중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었다.

그때 낙매신검이 앞으로 나섰다.

“내가 상대하지.”

“선배님!”

“자네는 하 장로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게. 저놈은…… 자네가 상대하기엔 아직 일러.”

백무량을 타이르는 낙매신검의 목소리에 서늘한 예감이 말라붙어 있었다.

칠십여 년 전, 백련교주와 싸우던 주자령처럼.

백무량은 고개를 강하게 내저었다.

“안 됩니다! 여기서 같이 힘을 합하면……!”

“말을 듣지 않을 텐가, 곤륜신성!”

두 도사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언의 대화가 시선으로 이어지던 그때.

“눈물겹군, 정말로.”

백련교주가 둘을 비웃었다.

물론, 그것으로 끝나진 않았다.

“내가 선택을 줄여 주지.”

쩌저적……!

요안의 남자가 펼쳤던 마공, 번마염천.

주변을 마기로 물들여 짓누르는 수법과 백련교주의 마공은 서로 엇비슷했지만 결정적으로 격이 달랐다.

“일단은 저기 쓰러진 놈부터 정리하면 되지 않겠나?”

백련교주의 마기가 하일화에게 쏘아졌다.

“……터무니없는!”

낙매신검이 자하신공을 끌어 올렸다. 상대가 백련교주라는 것은 알았지만, 말도 안 되는 전법이었다.

점(點)이나 선(線)이 아닌 면(面).

담벼락보다 높게 쌓인 마기가 하일화와 낙매신검을 덮쳤다.

“크윽……!”

매화검법이 어지러이 펼쳐진다. 낙매신검의 뺨에 구슬땀이 흐르고, 마기의 벽을 깎기 위한 몸부림이 이어졌다.

낙매신검과 하일화가 동시에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 속.

백무량은 말없이 호흡을 고르고 심의를 정련했다.

“호오.”

그걸 본 백련교주가 작게 감탄했다.

“걱정되지 않나?”

“내가 걱정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냉정하군.”

“이런 것쯤, 수백 번은 넘게 상상한 광경이야.”

“……뭐라?”

백련교주가 인상을 찡그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을 들어서 당황한 것 같았다.

하지만 백무량의 말은 진실이었다.

정말로, 끊임없이 상상했다.

지난 삼 년 동안 백무량은 백련교주와 싸울 ‘언젠가’를 상상했다.

어떤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고 싸우기 위해서, 심상에서 백련교주의 형상을 불러냈다.

항상 패했지만, 소득이 없던 건 아니었다.

그건 백련교주의 표정만 봐도 안다.

“아주, 오래전에도 이러했지.”

백련교주가 회한이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놈은 곤륜도 중에서 가장 강하지 않았음에도, 가장 멀리 도망쳤다. 이번에도 마찬가지군. 화산파의 도사보다 약하지만, 나를 두려워하질 않아.”

“…….”

백무량은 예전 일을 곱씹었다.

주백천을 오솔길로 보내고 나서, 백련교주에게 들었던 말.

-기뻐해도 좋다. 네가 가장 멀리 도망친 곤륜도다.

그때는 백련교주를 상대로 버티기만 하면 됐다.

주백천을 지키면 이기는 싸움이라고 여겼다.

‘지금은?’

백무량은 자문했다.

답은 터무니없이 간단했다. 처음부터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처럼 최선을 다해서 널 베겠다.”

“……하하, 하하하!”

폭소를 터트린 백련교주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저기 있는 화산파의 고수, 낙매신검마저도 자신을 두려워하는데 백무량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그래, 그때처럼 말이지.”

백련교주가 한 손으로 자신의 뺨을 매만졌다.

과거 백무량이 검상을 냈던 그 자리였다.

지금은 상처가 완전히 붙어 흔적조차 없었지만, 늘 신경 쓰이는 자리였다.

강호의 무인에게 유일하게 입은 상처였으니까.

백련교주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생각이 바뀌었다. 은혜는 잠시 잊고, 여기서 너를 죽이고 가마.”

“마교 주제에 은혜는 무슨.”

백무량이 피 섞인 가래침을 뱉었다. 백련교주의 마기에 대항하다 보니 조금씩 속에서 내상이 끓었다.

속전속결.

빠르게 끝내지 않으면 또다시 죽고 만다.

‘지금까지 경험한 깨달음과 기량을 모두 쏟아서!’

백무량의 눈빛이 결연해졌다. 백련교주가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그 모습을 본 낙매신검이 황급히 달려 나왔다.

“백련교주, 네 상대는 나다!”

“시끄럽다.”

백련교주가 발을 구르자 마기로 이루어진 벽이 낙매신검을 막았다.

그것이 여섯 개.

육각으로 이루어진 비무장이 즉석에서 만들어졌다. 바깥에서 낙매신검이 검을 휘둘렀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백무량은 그것을 보았음에도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백련교주가 의아함을 드러냈다.

“후회하지 않나?”

백련교주의 물음에 백무량은 말없이 검을 들었다.

완벽하게 정련된 심의가 청운을 응축했다. 호사가들이 보면 강기라고 하겠지만, 그보다 훨씬 대단한 기운이었다.

“대단하군. 전보다 훨씬 성장했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

백련교주는 백무량의 기운을 품평하며 천천히 다가왔다. 걸음에 담긴 긴장감이라곤 한 톨도 없었다.

상대의 목숨 따윈 언제든 취할 수 있다는 태도.

백무량은 송곳니로 입안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정신을 일깨웠다.

백련교주가 배시시 웃었다.

“그것으로 부족하단 생각은 들지 않나?”

“…….”

“무릎을 꿇고 빈다면 보내 주지. 백련교주의 이름을 걸고 말이야.”

뱀처럼 사특한 목소리가 흘렀다.

백련교주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곤륜도로서 죽느니, 살아남은 무인이 낫지 않겠느냐? 그깟 곤륜파가 무엇이 중하더냐?”

“…….”

백무량은 침묵을 지켰다. 백련교주의 섣부른 격장지계 따위는 아무런 타격도 없었다.

단지 속에서 불길이 일 뿐이다.

“시끄럽다.”

“그래, 그게 네 답이란 말이지.”

백련교주가 언제든 선공을 취하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사문의 원수가 눈앞에서 그러고 있었다.

백무량의 뇌리에 후회, 분노, 절망, 애통, 그 외 모든 감정들이 폭포수처럼 흐르고 지나쳤다.

감정의 격류가 백무량을 앞으로 몰아세웠다.

쿠르르……!

청운이 검해의 형상을 취하고, 양옆으로 퍼졌다. 무한하다시피 한 백련교주의 마기가 순간적으로 움츠러들 정도였다.

백련교주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친다. 그의 눈에 백무량의 중단전, 가슴속에 용솟음치는 심상이 보였다.

“바다인가?”

검으로 이루어진 바다.

곤륜파의 진실한 무학이 백련교주를 겨누고 있었다.

“겨우 그것뿐이…….”

백련교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무량이 땅을 박찼다.

운중용형보의 세 초식이 담긴 걸음.

공동파의 무학을 견식함으로써 얻은 깨달음이었다.

“하지만 정면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백련교주가 우장을 휘둘렀다. 무시무시한 힘이 깃든 권강엔 산을 꿰뚫는 힘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맞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백무량의 신형이 갑자기 허공에서 멈추자, 그 위로 백련교주의 우장이 지나갔다.

운중용형보의 공정식(空停式).

백련교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놈!”

“단순한 화풀이일지도 몰라.”

백무량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실, 지금까지 백련교주가 진짜라고 추정했을 뿐, 확실하진 않았다. 어쩌면 백련교주의 탈을 쓴 칠성교도와 싸우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놈은 선을 넘었다.

그깟 곤륜파.

그것을 위해 백무량은 목숨을 바쳤고, 되살아나서도 사문에 애정을 바쳤다.

그러니까, ‘그깟’일 수가 없다.

백무량의 운룡비뢰장이 백련교주의 명치에 격중했다.

쩌적!

침투경의 묘리가 백련교주의 내부를 뒤흔들었다.

“크윽!”

백련교주의 입가에서 선홍색 핏물이 흘렀다. 장기가 상했다는 뜻이다.

백무량은 곧바로 오른발을 휘둘렀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백련교주가 두세 걸음 뒤로 물러났다. 백련교주였기에 그 정도였지, 다른 무인이었다면 그대로 즉사했을 위력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백련교주의 두세 걸음.

그 정도라면 백선신검을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는 거리다.

“……!”

백련교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오랜 시간 동안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있다 보니 그의 감각은 완전히 죽은 상태였다. 아주 오래전, 곤륜파를 공격할 때였다면 손쉽게 막았을 공격들이었다.

그에 비해 백무량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스르릉!

청운을 머금은 백선신검이 검명(劍鳴)을 내질렀다. 그것만으로 마기를 흩뜨리는 멸마의 공능이 있었다.

뒤이어지는 초식은 구천화우검의 후반부.

오로지 상대를 죽이기 위한 살검이다.

‘구천화우검의 오 초, 현천부휘(玄天浮輝).’

백무량의 검격이 순식간에 백련교주을 몰아쳤다.

검해가 보여 주는 심상에 몸을 맡긴 채, 근육이 내지르는 비명도 무시한 채 검을 휘둘렀다.

검강으로 이루어진 검격.

백련교주가 목도한 현천부휘는 그야말로 섬광이었다.

태양을 보았을 때 시야 한구석에 남는 점과 선. 그것들이 전신을 점했다.

틈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큭.”

백련교주가 처음으로 패색을 드러냈다. 상황이 몹시 좋지 않았다.

이제 막 무계봉신술에서 탈출하여 마기가 말라붙었고, 전투 감각은 반쯤 잃은 상태.

그에 반해 백무량의 공세는 완벽했다. 심지어 검해가 보여 주는 심상으로 인해 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때 백련교주가 히죽 웃었다.

“과거에도 이랬다면 어땠을까?”

“…….”

“이제 와서 나를 이긴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지? 네 사부와 사형 모두, 죽지 않았더냐?”

“소용없는 짓이다.”

백무량은 냉정한 목소리로 백련교주를 꾸짖었다.

“네가 나의 부모님을 욕하든, 죽은 사람의 명예를 더럽힌다고 한들 내 생각은 달라지지 않아.”

스르릉!

백선신검의 검명이 백련교주의 귓전을 두들겼다. 검해를 완전히 일으킨 백무량의 목소리는 무심하리만큼 차가웠다.

“너는 여기서 죽는다.”

“……그런가.”

그 공간에서 수백 년을 버텼거늘, 결국 여기서 끝인가.

백련교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더 기다릴 걸 그랬군. 너를 너무 만만하게 본 모양이야.”

“내가 그때 말했었지. 곤륜의 검해에 패하고 말 것이라고.”

“옛날에 들었던 소리군.”

백련교주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이번은 아닌 모양이야.”

“……?”

백무량이 미간을 찌푸린 그때.

콰르르르!

마기의 벽을 무너뜨린 낙매신검이 황급히 외쳤다.

“자네, 어디 다치진 않았는가!”

“길을 열어 주는 사람이 있지 않나.”

백련교주가 땅을 박차기가 무섭게, 백무량도 동시에 움직였다.

‘도망치게 두지 않는다!’

구천화우검을 펼치려는 찰나. 백련교주가 낙매신검의 등을 백무량 쪽으로 밀쳤다.

벽을 부수느라 힘을 대부분 소진한 낙매신검이기에 저항하지 못했다.

“이런……!”

낙매신검의 몸이 기운다. 백무량의 뇌리에 고민이 스쳤다.

‘이대로 구천화우검을 펼친다면……!’

적어도 낙매신검은 무조건 죽는다.

백무량의 입술 사이로 욕지거리가 툭 튀어나왔다.

“젠장할!”

백선신검에 담긴 내공을 회수하자, 백련교주가 히죽 웃었다.

“현명하군.”

콰르르르…….

백련교주의 등이 멀어지니 마기로 이루어진 벽이 일거에 무너졌다.

남은 것은 세 무인과 반쯤 폐허가 된 매화비원.

“젠장……!”

절망에 빠진 백무량은 한 가지를 모르고 있었다.

본래 백련교주에게 근맥이 끊어졌어야 할 운명을 매화비원이 감내했다는 것을…….

천명은 그렇게 정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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