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23화 (123/275)

심상 (4)

“쿠흑, 쿨럭!”

매화비원에서 뛰쳐나온 백련교주는 한 손으로 입가를 막았다. 깊은 내상에서 오는 핏물이 손가락 사이로 줄줄 샜다.

백무량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통을 감내했지만, 적어도 반년은 정양을 해야 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군.’

백무량이 쉼 없이 펼친 살초.

그 사이사이에 매화비원의 선기가 스며 있었다.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마치 매화비원이 백무량을 돕는 듯했으니까.

‘내가 아무리 용태가 좋지 않더라도, 쉽게 죽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거늘.’

다시 떠올려도 기이한 일이다.

백련교주는 절벽에 등을 기댔다. 선혈을 끊임없이 토하며 마기를 수습하는 데 전념을 다했다.

쿠르릉……!

멀쩡하던 하늘이 검게 물들었다. 낙뢰가 한 나무에 꽂혀 불이 번지기 시작했다.

백련교주가 지닌 마기는 그만큼 위험하고, 방대하다.

“저쪽이다!”

천지의 기운이 어그러지는 현상이 일어나자, 멀리서 화산파의 도사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 중에는 종남의 목허도장도 있었다.

그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백련교주가 눈을 굴렸다.

“참으로…… 귀찮게 구는군.”

백련교주는 가슴팍을 연신 두드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

“이럴 수가, 백련교주가 봉신술에서 벗어나다니!”

본래 있어야 할 백련교주는 어디 가고, 허무만이 남아 있다.

청노가 수옥을 높게 들어 올렸다.

무계봉신술을 비추던 수옥이 다른 공간을 비췄다.

“화산파구나!”

수많은 희생으로 잡아 두었던 백련교주가 화산파를 통해 빠져나갔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괴성이라고 하여 다르지 않았다.

다만, 청노와는 다른 문제로 분노하고 있었다.

“또…… 또 곤륜신성한테 당해?”

부하를 둘이나 주었는데 실패했단 말인가!

괴성은 벽을 세차게 내리쳤다.

일견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그들이 있는 동굴 전체가 흔들리는 충격이었다.

청노가 그런 괴성을 째려보았다.

“곤륜신성에게 그만 신경 쓰라고 하지 않았나? 무림맹이 보고 있다고 말이야.”

“하지만 그 새끼가 우리 칠성교를……!”

“한심하기는!”

청노가 혀를 쯧 찼다.

하지만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백련교주의 도주에 백무량이 깊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청노는 괴성을 달래는 말을 꺼냈다.

“다음에 기회를 봐서 같이 처리하면 되니, 이제 그만 앉아 봐라. 다시 잡아넣을 생각을 해야지.”

“잠깐!”

분기를 참지 못해 씩씩대던 괴성이 돌연 동굴 밖으로 뛰쳐나갔다.

청노가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표정을 굳힌 채 괴성을 따라갔다.

어린아이의 가면을 쓰고 있기는 하나 괴성은 칠성교주.

불가와 도교 이전에 존재하던 토속신앙을 광신의 영역으로 발전시킨 자였다.

“별의 위치가 바뀐 거냐?”

청노의 물음에 괴성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미친놈이 끼어들었어.”

“……!”

청노가 주먹을 꽉 쥐었다.

하늘의 눈을 피하기 위해 수백 년을 인내했고, 백련교의 껍질을 뒤집어썼다. 이제는 대의를 위해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한데 이제 와서 점성이 달라지다니!

과도한 분노를 느낀 건지, 괴성의 가면 아래쪽에 실금이 갔다.

그걸 본 청노가 깜짝 놀라 괴성의 어깨를 붙잡았다.

“너, 가면이…….”

“나중에 고치면 된다.”

평소답지 않게 성숙한 목소리.

가면이 망가진 괴성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본래 존재치 않던 별이 천랑성의 팔다리를 끊을 예정이었으나, 같잖은 것이 도왔구나.”

“……좀 더 자세히 말해 봐라.”

“네가 들으면 천기가 더 망가진다.”

괴성이 하늘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우리가 할 일을 그놈이 처리해 줄 수 있었는데, 안 좋게 되었군.”

“백련교주 말이냐?”

“…….”

괴성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또한 청노에게 있어 훌륭한 대답이었다.

청노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면, 백련교주와 싸웠던 놈을 알아보면…… 대적자를 알아낼 수 있단 말이렷다?”

“…….”

“좋아, 알겠다.”

“앞으로 보름 동안은 가면을 고치는 데 써야겠어.”

“마음대로 해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괴성이 동쪽을 향해 달려갔다.

홀로 남은 청노는 턱수염을 매만졌다.

‘백련교주가 봉신술에서 빠져나간 건 안타까운 일이나, 대적자를 알아내는 것이 더욱 중하지.’

청노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화산파에 있는 고수라면…… 낙매신검이었던가?”

백무량과 백련교주가 무언가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청노와 괴성은 모른다.

그걸 모르는 이상 백무량이 백련교주를 매화비원으로 이끌었다는 사실 또한 모를 수밖에 없다.

단 하나의 무지(無知)가 끝없는 오해를 부르기 시작했다.

***

백무량은 폐허가 된 매화비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백련교주의 무한한 마기에 선기는 완전히 날아가고, 뿌리가 말라비틀어졌다.

마치 불에 타 버린 숲 같았다.

타문인 자신이 이렇게 허망한데, 장로인 낙매신검은 어떠하랴!

“내 대에 이런 일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낙매신검은 깊은 죄책감에 휩싸여 있었다.

백무량이나 칠지검협이 말리지 않았다면 자해를 했을지도 몰랐다.

무려 수백 년 동안 유지해 온 매화비원.

그 찬란한 성지가 백련교주에 의해 짓밟혔으니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이 드는 것이 당연했다.

마지막 희망이라곤 오직 하나.

“목허도장이 백련교주를 잡아 주겠지?”

“그럼요. 우리가 깊은 내상을 입혔잖습니까.”

백무량의 말에 낙매신검이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백무량 혼자서 백련교주를 압도적으로 몰아치고 있을 때, 길을 열어 준 것이 낙매신검이었으니까.

낙매신검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렇게 나를 위해 말하지 않아도 되네.”

“선배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

“저는 이번 일에서 회자되고 싶지 않습니다.”

백무량은 이번 일로 인해 한 가지를 확신했다.

자신과 백련교주가 무언가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매화비원은 싸움으로 이루어지는 순환으로 이루어져 있었지.’

피에 젖은 매화잎이 지면의 뿌리에 생기를 불어 넣고, 생기는 매화나무의 생장(生長)에 도움을 준다.

그것이 백무량에게 통용되었다면…… 백련교주가 백무량을 죽일 때, 무언가가 이어졌다는 뜻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매화비원에서 백련교주와 조우할 가능성 자체가 없었다.

‘무엇보다 백련교주가 그곳에 갇혀 있었던 이상, 지금 강호에 있는 백련교는 거짓일 가능성이 높아.’

백련교라는 이름을 뒤집어쓴 또 다른 사악(邪惡).

백무량은 그들 중에 칠성교가 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칠성교와 수차례 마주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걸 낙매신검에게 말하기엔 신뢰가 부족하다.

백무량이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이번에 매화비원에 출입한 것도 선배님의 후의 덕분이었지요. 평제자는 모르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게다가…… 저는 지금까지 많은 마인과 부딪쳤습니다. 그 상태에서 백련교주와 싸웠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낙매신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자야 낙매신검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지만, 후자는 아니었다.

백련교 좌호법에 이어서 백련교주와도 싸웠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곤륜파와 백무량은 많은 구설수에 휩싸일 터였다.

그것은 강호십대고수인 낙매신검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이해하네.”

“이번 일은 선배님과 장문인, 그리고 아까 뵈었던…….”

“하 장로를 말하는 건가?”

“예, 하 장로님만 아셨으면 합니다.”

낙매신검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림맹에는 알리지 않을 생각인가?”

“무림맹은 너무 귀가 많습니다.”

백무량은 무림맹에 있었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꽤 오래 있었기에 알았다. 남궁진이 워낙 주변에 드러내길 좋아하고, 권위를 즐기는 터라 무림맹에 거주하는 식객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 중에 마교의 세작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들 중에 분명 마교도가 있을 터였다.

그걸 낙매신검이 모를 리가 없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군.”

“감사합니다, 선배님.”

백무량이 예를 표하자, 낙매신검이 백무량을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나를 탓하진 않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벽을 부수고, 그놈에게 밀쳐진 탓에 놓치지 않았던가. 항렬이나 연배를 떠나서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다네.”

고개를 떨어뜨리고, 초점을 잃은 눈.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모습까지.

한계를 절감한 무인처럼 보였다. 세상이 강호십대고수라고 부르는 절대 고수의 풍모는 전혀 없었다.

백무량은 낙매신검을 가만히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례 좀 하겠습니다.”

“음?”

찌지직!

백무량이 한 손으로 낙매신검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낙매신검은 순간 당황하여 백무량의 가슴팍을 밀쳤다.

아니, 그저 시도에 불과했다.

반보에 깃든 운중용형보.

이제는 원숙하게 펼칠 수 있는 보법에 낙매신검의 오른손이 허공을 갈랐다.

백무량은 무심한 표정으로 낙매신검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전부입니까?”

“자네…….”

“한번 꺾인 매화는 피지 못한단 말입니까?”

“정말로 선을 넘는군!”

낙매신검의 우장이 백무량의 기해혈을 향했다.

자기의 멱살을 잡고 있는 이상, 피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고수다운 풍부한 경험과 판단.

백무량은 쇄도하는 우장을 흘낏 보았다. 괜찮기는 했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백련교주에게는 이런 공격이 통하지 않아.’

낙매신검은 격중하면 쓰러질 것을 전제로 공격했다. 하지만 백련교주는 그렇지 않다.

압도적인 힘으로 버티거나, 손목을 잡아 비틀거나.

백무량은 낙매신검에게 남은 내공이 별로 없다는 것을 기억했다.

쿠르릉……!

태청신공의 청운이 낙매신검의 오금을 강하게 때린다.

낙매신검이 사람인 이상, 오금을 얻어맞으면 폈던 팔을 좁힐 수밖에 없다.

“큭!”

“이것이 백련교주가 행하는 싸움법입니다.”

무인은 검과 검을 나누어 상대의 급소를 피할 수 없는 때에 공격한다.

하지만 백련교주는 그리할 필요가 없다.

단순한 의지로 마기를 일으키고, 발산한다. 그에게 있어 무인의 공격은 간단하게 막아 내거나 역습할 수 있는 것에 불과했다.

그를 이기려면 일 초가 필요하다.

모든 마기를 깨부수고, 머리를 반으로 가를 일 초!

백무량은 낙매신검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님을 왜 원망하지 않느냐고 물었지요? 그건 의미가 없어서입니다. 경험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곤륜은 늘 마교와 대적했고, 이겨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으며…… 지면 멸문해야 했습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때 도와주지 않은 사람을 탓하거나 비난하기 마련이지요.”

사실 백무량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칠십여 년 전의 무림맹을 미워했고 강호를 탓했다.

만일 그때 곤륜산에 모두가 집결했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답답한 후회와 미련이었다.

‘하지만 곤륜의 선인(先人)은 그러지 않았지.’

패배를 양분으로 삼고 흩어진 무학을 맨손으로 그러모았다.

깎여 나간 바위 조각이 점차 쌓이다가 동산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 역사를 증명하는 것이 바로 분광검.

곤륜파는 분광뇌운결을 잃었지만, 남은 파편을 재해석하여 또 다른 무공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화산파는?

한 번의 실패로 완전히 부서질 것인가?

백무량은 낙매신검의 멱살을 놓았다. 그러고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기다렸다.

낙매신검이 답을 찾고,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그래.”

한참 동안 번민하던 낙매신검이 건조한 목소리로 서두를 떼었다.

“재건하면 되는구나.”

“예.”

백무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다시, 백련교주와 마주한다면 그때…… 반드시 끝을 보리라.’

두 번째 만남이 상처로 끝났다면, 세 번째는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는다.

백무량이 마음을 다잡던 그때.

백련교주를 추격했던 칠지검협이 매화비원에 도착했다. 목허도장은 일부러 떼 놓고 온 듯했다.

낙매신검이 칠지검협에게 물었다.

“백련교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놓쳤네.”

칠지검협이 힘 빠진 목소리로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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