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21화 (121/275)

심상 (2)

자색으로 물든 하늘 아래에 흩날리는 매화 잎.

백무량은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화산파의 무공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때엔 그저 생경하다고 느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건 구장명과의 비무에서 본 매화검법.’

백무량의 시선이 흩날리는 매화 잎으로 향했다.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것 같아도 일정한 법식이 있었다.

알고 나서야 보이는 것이 있다고 하던가?

매화비원이야말로 그 말의 결정체였다. 백무량은 그저 망연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장명과 낙매신검.

그 둘에게서 본 초식은 다섯 개도 되지 않았지만 본질은 동일하다.

‘매화검법을 구성하는 스물네 초식 모두 매화비원에서 탄생한 것이겠구나.’

백무량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매화검법을 숙하게 익히진 않았지만, 매화비원과 검해는 어느 정도 통하는 바가 있었다.

화산파와 곤륜파의 무공을 드러내는 본질.

매화비원이라는 공간 자체가 화산파라면, 검해는 심상으로써 곤륜파 무공의 원류(源流)를 보여 준다.

“감탄밖에 나오지 않아.”

이 성지를 남긴 학대통 조사의 뜻이란 무엇일까?

의문을 품은 백무량이 한 걸음을 옮겼을 때.

바스락.

발치에서 부스럭거리는 매화 잎이 있다. 백무량은 그것을 발끝으로 툭툭 치며 땅바닥을 드러냈다.

“허어.”

까닭 없이 탄성이 나왔다. 놀랐다는 표현으론 부족했고, 경악이라 말하기엔 지나쳤다.

순리(順理)였다.

백무량의 상처를 치료하고서 시뻘겋게 물들었던 매화 잎이 땅바닥에 깔려 있었고, 그 아래에 뿌리가 있었다.

매화나무 수십 그루가 내뿜던 생기(生氣).

그 정체가 무인의 피를 머금은 매화 잎이었다니.

“성지라면 신령한 기운 같은 게 유지하는 줄 알았는데.”

어렸을 적에 동경했던 고수의 진면목을 본 것처럼 뭔가가 쓰라리다.

백무량은 피식 웃었다.

자기 마음대로 실망하고 놀라는 자신이 우습기도 했고, 성지 또한 순리대로 흐르고 있음에 안도했다.

‘검해가 나를 위해서 천리(天理)를 거역한 건 아니겠구나.’

모든 이유는 사형인 주백천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형에게 듣기 전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로 있을 순 없었다.

다시 되살아난 이유가 검해에 있지 않다.

그것이 확실해진 이상, 백무량은 마음속에 있는 짐을 조금 털어 냈다.

단순히 그뿐만이 아니었다.

매화비원에 발을 들이고 나서부터 매향이 콧속을 간질이고 있었으니까.

“스읍- 후.”

숨을 크게 들였다가, 내뿜는다. 곤륜파의 호흡이 매화비원의 매향을 끌어들이고 밀어내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과도하게 뭉친 매향이 피부를 쓸었다. 붉게 물든 피부 위로 금세 핏물이 올라올 것 같았다.

‘저번이었다면 크게 당황했겠지.’

정체를 모르는 힘은 무인에게 있어 공포다.

언제 주화입마가 닥칠지 모르고, 축기한 내공을 깎아 버릴지도 모른다. 예측이 불가한 기운이란 그러했다.

그러나 지금의 백무량은 달랐다.

“낙매신검의 자하신공과 조금은 닮아 있어.”

한 올, 한 올. 따로 두면 미약하기 짝이 없다. 매향이란 그저 향기일 뿐. 물리적인 힘을 가지는 것이 불가했다.

그 선입견은 자하신공의 특별한 기운이 매향에 깃들 때 완전히 부서진다.

“은은하게 스며들고, 안에서부터 부순다.”

백무량은 자신의 팔뚝을 바라보았다. 매향에 잔뜩 노출된 피부가 칼날에 긁힌 듯이 따끔거렸다.

극에 이른 화검(花劍)이 바로 이것일까?

‘아마 아니겠지.’

낙매신검이 진심을 다한 일 초를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봐도 기억할 가치는 없을 터였다.

매향이란 본래 무형(無形).

매화검법을 펼치는 무인의 의지와 의도에 따라 변화할 게 뻔했다. 오히려 그때 그 초식을 기억했다간 방만해질 가능성이 컸다.

백무량은 낙매신검과 구장명의 경지를 떠올렸다.

“구장명과의 비무만으로 끝났다면, 아마 오해했겠지?”

매화검법은 그 정도에 불과하다고.

왠지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낙매신검의 뜻을 꺾으려다가 화산파 무공의 본질을 본 것이 매화비원을 이해할 실마리가 될 줄이야.

백무량은 계속해서 이어진 인연을 떠올렸다.

‘화산파로 향하다가 양청교와 만나고, 칠성교와 싸우고, 잔도에서 떨어지고, 낙매신검의 도움을 받고.’

만일 중간에 양청교를 만나지 못했다면 잔도에서 떨어졌을 때 칠성교의 마인과 만나 홀로 싸우다 죽었을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낙매신검의 도움이 없었다면 매화비원에 다시 출입할 수 없었겠지.’

그야말로 천운이 도왔다.

백무량은 모든 것에 감사함을 느끼며 매화비원을 거닐었다.

백련교주와 조우했을 때처럼 선기가 집중된 곳은 없었다.

손등의 운룡 또한 무수한 빛을 흩뿌렸다.

‘그때는 분명 사그라들었는데…….’

연관이 없으리라곤 생각지 않는다. 손등의 운룡과 백련교주가 상극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백무량의 뺨에 매화 잎이 하나 스치고 지나갔다.

포근하고 따뜻한 감촉.

매화검법의 매서운 화려함과는 다르다. 백무량은 천천히 떨어지던 매화 잎을 한 손으로 잡아챘다.

“……읏.”

부드러웠던 매화 잎이 금세 날카로워져선,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피가 한 방울씩 뚝뚝 떨어지자 바닥이 붉게 물들었다.

자하신공을 형상화한 매화 잎과 피로 이루어지는 순리라.

백무량은 눈이 번쩍 뜨이는 듯했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화산파의 무공은 화려하고 매섭다. 도가의 무공처럼 유하거나 조화를 중시하진 않았다.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만 보았을 뿐.

백무량이 매화비원의 전경을 한눈에 담았다.

‘잎이 떨어지고, 피를 머금고, 땅에 흘리고, 매화나무가 피어나는 과정. 그래, 순환이었어.’

싸움으로 이루어지는 순환.

도가답지 않게 투쟁적이었지만 그 나름의 가치가 있었다. 괜히 호사가들이 무당파와 화산파의 우열을 가리는 게 아니었다.

화산파를 심상으로 그려 낸 이곳이 바로 매화비원이라.

백무량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잠깐, 그렇다면 백련교주는 왜 내 앞에서 나타난 거지?’

낙매신검이 나타났을 땐 온데간데없이 사라지지 않았던가.

백무량의 모골이 오싹해졌다.

매화비원이 순환을 형상화한 성지라면, 백련교주를 부른 매개체가 있었다는 소리다.

칠성교의 마인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들은 백련교주와 대화하던 중에 나타났으니까.

답은 하나뿐이다.

“나인가?”

자신과 백련교주는 무언가로 이어져 있다.

그렇기에 매화비원은 크게 순환하여, 어딘가에 갇혀 있는 백련교주를 불러서…… 백무량과 대면시킨 것이다.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지.’

백무량은 멍하니 매화비원을 바라보았다. 운룡의 빛이 조금씩 사그라들고, 깜빡거리고 있었다.

전조였다.

또다시 그와 마주할 것이란 전조.

백무량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수십 년 만인가?”

백련교주가 백무량을 직시하고 있었다.

***

“이로써 두 번째구나.”

죽립을 깊게 눌러쓴 도사가 지저분하게 기른 턱수염을 매만졌다.

백무량과 백련교주.

둘은 처음부터 이어져 있지 않았다.

“좋지 않은 상황이야.”

도사가 작게 한탄했다.

괴력난신.

천리에 맞지 않는 존재, 백련교주가 백무량의 천명을 끊었기에 하늘이 두 운명을 옭아맸다.

도사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본래 존재하지 않았던 별이 천랑성(天狼星)에 달라붙어 있다.

‘세 번째 만남에 이르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부서지리니.’

두 번째라고 타격이 없진 않다. 둘 중 하나는 깊은 상처를 입고 신음할 터였다.

도사는 땅에 두 무릎을 꿇고 제를 지냈다.

백무량이 괴력난신에게 패하지 않기를.

언젠가 자신과 마주할 수 있기를.

***

수십 년.

백무량은 백련교주가 한 말을 듣고 확신을 품었다.

‘나와는 시간이 다른 곳에 갇힌 게로구나.’

전에는 그저 가정에 불과했다. 백련교주가 거짓말을 했을 거라고 여겼다.

눈앞에 자신이 보이는데도 끝까지 안 보이는 척했던 놈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거짓말을 할 상황도 아니거니와, 옷이 저번보다 더욱 해져 있었다.

백무량이 낮은 목소리로 백련교주를 위협했다.

“우리가 정답게 대화할 사이더냐?”

“그때 몹시 꽁한 모양이야. 간단한 인사조차 거절하는 걸 보니.”

백련교주가 히죽 웃었다. 마치 ‘웃는다’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백무량은 완전히 사그라든 운룡을 흘깃거렸다.

‘뭔가 이상해.’

자색의 하늘이 어둡게 변하고, 흩날리던 매화 잎이 잿빛으로 물든다. 생기를 뿜어내던 매화나무도 점차 쪼그라들었다.

매화비원 자체가 말라붙는 듯한 광경.

백무량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백선신검을 쥐기가 무섭게 백련교주가 한 발자국, 앞으로 걸었다.

쿠르릉!

땅이 뒤엎어지고 매화나무의 뿌리가 재로 변한다.

백련교주가 본래 있었던 공간에서 매화비원으로 경계를 넘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마지막엔 자네의 뒤를 치던 놈을 보았지. 그로부터 수십 년 동안, 나는 고민했다네.”

‘내가 안 보이는 척 속인 게 아니라, 점차 적응했던 건가!’

백무량은 놀람을 뒤로하고 태청신공을 운용했다. 백련교주의 마기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전력을 다해야 했다.

그걸 본 백련교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떻게 하면 건너갈 수 있을까?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나갈 방법이란 무엇일까?”

“……놈!”

“답은 간단했네. 자네가 다시 나를 불러낼 때, 수백 년 동안 응축한 마기를 터트리는 것. 그것만 궁리하면 됐지.”

백련교주가 마침내 발을 매화비원에 내디뎠다.

하늘이 정한 뜻을 억지로 휘어잡고, 바꾸어 버리는 존재.

압도적인 존재감이 백무량을 짓눌렀다. 백무량은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켰다.

‘보다 높은 경지에 오르니, 이제는 확실하게 알겠구나.’

진정한 괴력난신이 눈앞에 있다는 것을.

백련교주와 싸웠던 사부, 주자령의 유언이 저절로 떠올랐다.

-네 사형, 백천이를 부탁한다.

이길 수 없는 상대기에 남긴 유언이었다.

백무량은 백련교주가 진정한 괴력난신임을 깨달았다.

그때 옆에서 호통이 들려왔다.

“네 이놈! 감히 매화비원을 어지럽히다니!”

비범한 경지에 오른 노고수가 백련교주를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백무량은 노고수를 말리고 싶었다.

저자는 백련교주라고, 함부로 맞붙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백련교주가 그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산파의 장로더냐?”

느긋한 어조에서 흘러나오는 여유.

백련교주의 강함을 어렴풋이 느낀 노고수가 제자리에서 멈췄다.

상대의 경지를 파악하려는 시도였지만, 무색하게 끝났다.

“끄아악!”

노고수의 두 눈이 마기에 짓눌렸다.

백련교주가 노고수의 몸부림을 즐겁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더 크게 질러 봐라. 수백 년 만의 자극이 제법 괜찮구나.”

“끄으으…… 이놈……!”

노고수의 자하진기가 백련교주의 마기를 일순 흩었다.

뒤이어지는 발검이 매화비원의 땅을 얇게 저몄다.

스르릉!

낮게 깔린 검강이 반원의 형태를 그리며 나아간다.

매화점개(梅花漸開). 숙하게 익힌 매화검법은 노고수의 뜻대로 백련교주의 발목을 노렸다.

하나 상대가 좋지 않다.

“무의미한 짓을.”

백련교주가 진각을 강하게 밟았다. 땅거죽이 갈라지고 수백, 어쩌면 천 년 동안 살아왔을 매화 뿌리가 맨살을 드러냈다.

노고수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아무리 상대가 마인이라지만 매화비원에 상처를 남길 수 없다.

화산파 고수로서의 긍지와 신념.

그것이 매화점개의 방향을 위로 틀게 했다.

“쿠흑, 커헉!”

노고수가 피가래를 뱉었다. 전력을 다해 펼친 초식의 방향을 억지로 바꾼 탓에 내상이 심각했다.

“이깟 나무가 무슨 대수라고!”

백련교주의 얼굴이 웃음이 피어났다.

가면이 아니라, 순수하게 즐거워서 지은 웃음.

‘저놈은 진정…… 마인이로구나.’

백무량은 치를 떨며 검을 쥐었다.

완전히 꺼졌던 운룡의 빛이 조금씩 들어오고, 검해가 백무량의 의지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의를 다지던 그때.

한 줄기 매향이 백무량의 콧등을 스쳤다.

“……하 장로, 이게 어찌 된 일이오?”

낙매신검이 진노한 표정으로 백련교주를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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