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18화 (118/275)

매화비원 (6)

어느 무인도 돌을 내던진 걸 탄지공이라고 하지 않으리라.

둘의 비무를 지켜보던 모두가 굳어 버렸다. 필사적으로 백무량의 움직임에서 현묘한 무언가를 읽어 내려고 했지만, 소용없는 행동이었다.

“크윽…… 이놈!”

구장명이 핏발이 선 눈으로 백무량을 노려보았다. 비무장 바닥을 긁으면서 일어나다가, 그의 손톱이 부러지기도 했다.

백무량은 그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것이냔 시선과 마보세조차 취하지 않은 모습으로.

“내가 무슨 잘못을 하였다고, 이렇게 비참하게…….”

수많은 사람과 비무를 해 왔지만, 지금처럼 엉망진창으로 패배한 적이 있었던가?

구장명이 분노와 비애에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비무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럴수록 백무량에게 한 방은 먹이고 싶어진다.

“끄흐으……!”

신음을 흘리며 일어난 구장명이 검을 쥐었다. 부러진 손톱과 파편에 쓸린 손등이 붉게 물들어 볼썽사나웠다. 하지만 그가 품은 의지는 화산파의 장문제자다웠다.

뒤이어 분연히 일어나는 자하신공.

자색의 매화가 한 올 한 올 구장명의 검에 내려앉는다.

‘매향인가?’

백무량은 구장명의 기세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태청신공이 청운으로 유형화하듯이, 자하신공 또한 매향으로 화한 것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매향지경.

오랜 시간 답보였던 구장명이 분노로 잠재력을 격발시켜 도달한 경지였다.

“여기서 너를 이기고, 나는 더 나아가겠다.”

매향지경에 도달한 무인이라면 매화비원에서 더욱 큰 발전을 이룰 수 있다.

구장명은 한순간 분노를 잊었다. 매화검의 끝을 보겠다는 무인의 욕망이 거세게 불타올랐다.

그것을 알아차린 백무량은 말없이 백선신검에 손을 가져갔다.

스르릉……!

백선신검의 예기가 구장명을 예고 없이 덮쳤다. 모골이 서늘해지고, 뺨의 솜털이 베이는 감각이다.

구장명은 황급히 자하신공을 운용하며 숨을 내뱉었다. 매향이 순식간에 백선신검의 예기를 밀어냈다.

“시작할까?”

“계속 기다리고 있었소.”

백무량의 차분한 대답에 구장명이 검을 낮게 휘둘렀다.

평범한 하단 베기처럼 보이지만, 아래에 내리깔린 매향의 저의가 의심스럽다.

백무량은 곧바로 분광검을 펼쳐 검을 쳐 냈다.

카가강!

두 검이 부딪치며 거대한 소음이 울렸다.

“쿨럭!”

구장명이 핏물을 내뱉었다. 손목을 타고 흐르는 충격이 구장명의 오장육부를 뒤흔든 탓이었다.

그럼에도 왜 물러서지 않았는가.

백무량에게 이기기 위한 노림수가 그에게 있었다.

매영조하(梅影造河).

매화 그림자가 강을 만든다. 매향으로 화한 검기가 백선신검을 지나치고, 백무량의 복부로 쏘아졌다.

엄밀히 말하면 구장명의 복부에 돌을 던진 복수였다.

“어디 한번 너도 맞아 봐라!”

구장명이 씨익 웃었다. 핏물에 젖은 이빨이 번들거렸다.

그걸 본 백무량은 인상을 찌푸렸다.

“보기 흉하군.”

외마디를 중얼거린 백무량이 호흡을 크게 머금고는 진각을 강하게 밟았다.

운중용형보의 세 초식이 담긴 일보.

칠성교도에게 펼쳤던 공동파, 합일(合一)의 깨달음이었다.

쩌엉!

진각에서 발해진 충격이 매향을 부수고, 역방향으로 쏘았다.

구장명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마침내 벽을 부수고 오른 매향지경이 백무량에겐 일초지적도 되지 않았다.

“그만!”

낙매신검의 외침에 백무량은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청운이 담긴 일검이 순식간에 매향을 잘랐다.

그걸 보고 구장명은 깨달았다.

백무량은 언제든 자신을 이길 수 있었다는 것을…….

“나를 가지고 논 거냐?”

“적당히 맞춘 거요.”

“처음부터 진심이 아니었다는 말이군.”

구장명이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쌍룡으로 불리는 불영신동도 아니고, 자기보다 한참 어린 곤륜신성에게 패배하다니.

백무량이 이화겸을 꺾은 고수라고는 하나 패배의 충격은 무겁다. 무엇보다 상대가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고 생각하면 더더욱 심각했다.

그건 비무를 지켜보던 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곤륜신성은 화산파의 대제자를 능멸하러 왔는가!”

“대체 왜 그렇게까지 잔인한 짓을 한 것이냐!”

“곤륜파 장문인께 전서구를 보낼 것이다!”

비무의 결과로 인정하기에는 너무나도 참혹하고, 잔인하다.

차라리 백무량이 처음부터 검을 뽑아서 구장명을 꺾었다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을 터.

‘나도 그쪽이 편했는데, 부탁이 부탁이라.’

백무량은 낙매신검을 바라보았다. 이만하면 충분하겠냐는 의미가 담긴 시선이었다.

이에 낙매신검이 전음을 보냈다.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야. 얼마나 굴욕적이었으면 한순간이지만 매향지경에 올랐겠나?]

[이 분위기는 나중에 진정시켜 주십시오.]

[나중? 내가 할 일을 뒤로 미룰 성격처럼 보였느냐?]

전음을 마친 낙매신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만하라! 곤륜신성의 불손함은 내가 부탁한 일이니라!”

“……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전과는 다른 의미로 소란이 일어났다.

사문의 장로가 타문의 후기지수에게 대제자를 처참하게 꺾어 달라고 부탁하다니?

도사들 사이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아무리 낙매신검일지라도 이건 너무했다는 말과, 깊은 뜻이 있지 않겠냐는 분분했다.

그때 구장명이 낙매신검에게 서러움이 맺힌 목소리로 외쳤다.

“어째서입니까!”

“…….”

“왜,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런 창피와 시련을 주신 겁니까!”

“그만 깨어나라는 뜻이었다.”

“무얼 말입니까?”

“언제까지 아첨쟁이 사이에 있을 생각이었느냐? 내가 알던 기재는 어디 가고, 오만불손한 애송이만 남아서 뒤처지고!”

말을 하다가 화가 확 치밀었던 걸까.

고함을 버럭 내지른 낙매신검이 구장명에게 더욱 강한 기세를 드러냈다.

“난 그것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자기보다 한참 어린 놈한테 지면 그래도 정신을 차리겠지 싶어서 시켰다! 어떠냐, 자기보다 일곱 살은 어린 후배한테 지니까?”

“…….”

그렇다고 화산파가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이런 창피를 주다니.

구장명이 입술을 꽉 짓씹었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쓰러졌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심마는 없었다.

백무량에겐 어떤 짓을 해도 이기지 못했을 거고, 불영신동에게 졌을 때부터 이런 생활을 끝내야 한다고 여겼다.

단지 계기가 없었을 뿐이다.

구장명이 낙매신검에게 반항적인 시선을 보냈다.

“앞으로 화산에 박혀서 지내면 되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싶으신 겁니까?”

“그래!”

낙매신검은 속으로 웃음을 머금었다.

구장명은 단지 아첨에 약할 뿐, 정신력은 나쁘지 않았다.

어떠한 창피와 굴욕을 주더라도 심마에 빠지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기에 백무량에게 무리하게 부탁한 것이다.

‘곤륜신성 덕분에 내 뒤를 이을 후학이 생기겠어.’

백무량은 자신의 부탁을 완벽하게 해냈다.

낙매신검과 백무량이 서로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한 시진 뒤, 자소원.

백무량은 낙매신검과 마주 앉았다.

한데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이제 막상 보상을 받을 때가 되니까…… 좀 어색하네.’

아무리 부탁을 받았다고는 하나 화산파의 장문제자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굴욕을 주지 않았던가.

이제 와서 마음이 바뀌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백무량은 가볍게 헛기침했다.

“저어, 무슨 말씀이라도 해 주시지요.”

“자네가 오는 도중에 무림맹에 들렀다고 하더니만, 귀띔은 해 주지 그랬나.”

“……?”

“무림맹에서 칠성교에 대한 소식과 연무지회에서 일부러 침묵했던 아미파의 서신을 보내왔네.”

그 말에 백무량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칠성교야 필사본을 준 지 얼마 안 됐다지만, 아미파의 서신을 일부러 누락시켰었다?

‘생각해 보면 아미파의 장문인께서 그랬었지. 연무지회에 서신을 보낼 테니 그때 연유를 알게 될 거라고.’

연무지회에서 워낙 심력을 소모하다 보니 깜빡 잊고 있었다.

백무량의 표정을 본 낙매신검이 사정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주가 워낙 속이 검으니 자네가 몰랐을 수도 있네.”

“조금 섭섭하긴 합니다.”

“두 가지 모두 자네의 공로가 크니까, 이해하네. 그러나 칠성교에 관한 이야기는 오자마자 해 주어야 했네.”

낙매신검은 칼처럼 벼려진 목소리로 백무량을 나무랐다. 백무량이 침을 꿀꺽 삼켰다.

“매화비원에서 저를 습격했던 두 마인이 칠성교도였습니다.”

“가면을 쓴 놈들 말인가?”

“예. 목 뒤에 일곱 개의 반점이 있는 걸 확인하면 정확합니다.”

“…….”

낙매신검의 미간이 좁아졌다.

화산파의 성지인 매화비원. 그곳에 칠성교도가 침입한 이상 장로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앞으로 마교에 관해 알게 되는 것이 생기면, 자기 볼일보다 먼저 말해 줘야 하네.”

“죄송합니다.”

백무량은 사죄의 뜻을 표했다.

사실, 사형이 남긴 안배를 위해 화산파에 왔지, 경종을 울리고자 온 것은 아니었다. 낙매신검이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았다.

딱 잘라 말해서 자신은 이기적이었다.

백무량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낙매신검이 어깨를 붙잡았다.

“내가 그런 사죄를 받으려고 참은 게 아니네. 도사가 함부로 정수리를 보이는 게 아니야. 그만하게.”

“알겠습니다, 선배님.”

백무량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는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한데 아미파가 침묵한 연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자네가 나에게 말해 주지 않은 것과 일맥상통하네.”

“……예?”

“아미파의 장문인, 정혜신니께서 칠성교에게 습격을 당했다고 하네. 그것도 아미파 한복판에서 말이야.”

낙매신검이 서신의 내용을 떠올리고는 인상을 구겼다.

“연무지회 때 숨긴 이유는 말하지 못하겠다고 하더군.”

“허어, 왜 그걸 쉽게 말해 주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어 가긴 했지만, 백무량은 한 가지를 의심하고 있었다.

연무지회에 모였던 고수 중에 마인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건 백무량이 지금도 의심하고 있는 것 중 하나였다.

‘무림맹주가 보기에 최소한 낙매신검은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겠지.’

백무량은 낙매신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제 제 부탁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하게.”

“화산파가 보관하고 있는 그림 하나를 가지고 싶습니다.”

낙매신검이 설마 하는 마음에 물었다.

“설마 개파조사께서 남긴 유물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무명의 도사가 남긴 그림입니다.”

“그거라면 상관없지. 그런데 정말 그게 전부인가?”

“하나 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긴 합니다.”

그 말에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낙매신검이 팔짱을 꼈다.

그가 어디 말할 테면 해 보라는 시선을 보내니 백무량도 편하게 할 수 있었다.

“매화비원에 한 번 더 출입하고 싶습니다.”

“……뭐라고?”

“매화비원에 출입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낙매신검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화산파의 성지인 매화비원에 출입하고 싶다니!

백무량이 모를 리가 없었다. 분명, 그를 잔도에서 구해 줬을 때 설명해 주었을 터였다.

낙매신검이 백무량에게 재차 물었다.

“무리한 부탁인 걸 모르지는 않겠지?”

“알고서 했습니다.”

“이유를 똑바로 설명하게. 그렇지 않으면 나도 말이 곱게 나가진 않을 걸세.”

백무량은 낙매신검과 시선을 마주했다.

낙매신검에게는 거창한 미사여구나 아첨 따위는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혐오하는 쪽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백무량은 가슴속에 있는 솔직한 말을 내뱉었다.

“화산파의 무혼을 눈에 담고 싶습니다.”

“…….”

그 답을 들은 낙매신검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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