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비원 (5)
이튿날.
소란을 느낀 백무량이 상체를 일으켰다. 처소 바깥에서 낙매신검 특유의 날카로운 기세가 느껴졌다.
겉보기엔 자신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처럼 보여도, 억지로 일으키려는 의도가 보인다.
백무량은 문을 열었다.
“아침부터 웬일이십니까?”
“아침이니까 온 것이네.”
낙매신검은 백무량의 신색을 훑었다.
이제 막 일어났다지만 기량(氣量)이 제법 정돈되어 있다.
얼굴이 저절로 흡족해졌다. 백무량의 무공이 연무지회에서 보았던 검무보다 뛰어날 가능성이 엿보였다.
“매화비룡과의 비무는 기억하고 있나?”
“설마…… 오늘입니까?”
“자네는 곤륜파의 대사형이 아닌가. 오랜 시간 화산파에 머무르면 좋지 않은 소문이 돌 걸세.”
‘어제 하루 종일 전각에 있길 잘했다.’
자칫 잘못하면 사형의 그림을 찾지 못하고 비무에 임해야 했으리라.
백무량은 두 손으로 양 뺨을 때렸다. 약간 남아 있던 졸음기가 싹 날아갔다.
“언제입니까?”
“금일 정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치를 예정이네.”
‘친선 비무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판을 크게 벌리는데?’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저 매화비룡을 꾸짖으려는 줄 알았거늘, 낙매신검의 의도는 그보다 더욱 잔인했다.
하지만 보수를 더 얻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백무량은 낙매신검에게 물었다.
“어떤 패배를 원하십니까?”
“강호의 쌍룡에서 매화비룡을 지워 주게.”
낙매신검이 덧붙인 말은 더욱 냉정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악몽을 꿀 정도라면 좋겠네.”
“알겠습니다.”
낙매신검의 말에 대답하면서, 백무량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매화비룡이 그에게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기에?’
강호십대고수인 낙매신검이 저리 잔인하게 말한단 말인가.
백무량은 속으로 혀를 거듭 찼지만, 동정심은 품지 않았다.
낙매신검이 마음을 저렇게 독하게 먹은 이상 백무량은 그 부탁을 이뤄 줘야 했다.
***
해가 완연하게 뜬 정오.
백무량은 수많은 눈총을 받으며 비무장으로 향했다.
청해성에서 받았던 경외나 질투는 없었다. 적어도 화산파는 백무량에게 겁을 집어먹을 만큼 좁은 공간이 아니었다.
호승심과 호기심.
두 감정은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자기가 쌓은 격과 경지가 있기에 호승심을 품고, 그것이 상대보다 뛰어나다고 판단이 들면 호기심이 생기니까.
그 시선만으로 백무량은 고수와 하수를 판단했다.
‘나한테 호기심을 품은 놈은 하수야.’
백무량은 비무장으로 향하면서 태청신공의 기운을 최대한 숨기고 있었다. 그래야 매화비룡에게 자신의 실력을 숨기고 무자비하게 때려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챈다면 최소한 강기를 이루었다는 뜻.
거목과 거암을 일격으로 부수고, 일수(一手)로 길을 여는 무인들이다. 백무량은 그들과 시선을 일일이 마주쳤다.
양청교와 싸운 뒤 운중용형보를 발전시켰듯, 화산파 고수와의 비무 역시 피와 살이 될 터였다.
“백 도우, 힘내!”
그때 양청교가 큰 소리로 백무량을 응원했다.
백무량은 순간 고개를 돌렸다. 시끄럽게 외쳐 대던 소음이 아직까지 귓가에 남아 있었다.
‘검보단 음공에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백무량은 실없는 농담을 떠올리곤 피식 웃었다.
그 모습을 본 구장명이 얼굴을 붉혔다.
“저놈, 나를 아주 우습게 보는구나.”
“진정하십시오. 목허도장께서 말씀하셨잖습니까.”
“나도 안다, 알아!”
사제들을 밀친 구장명이 경신법을 펼쳤다. 거의 날듯이 움직인 그가 비무장 위로 안착했다.
“과연 쌍룡!”
“화산파의 자랑이도다!”
그 모습에 으레 하는 칭송이 비무장 위로 쏟아진다.
구장명이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쓱이자, 낙매신검이 인상을 찌푸렸다.
“주변에 속 빈 강정밖에 없구나.”
백무량은 낙매신검이 매화비룡을 싫어한다고 추측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낙매신검은 나름대로 매화비룡을 인정하고 있었다.
열세 살이 되던 해까지만.
그 이후로 어떤 패거리와 어울렸는지, 도사가 아니라 거의 왈패가 되어 있었다.
쌍룡이라 불리는 것도 가진 재능이 뛰어나서 가까스로 유지하는 칭호였다.
“내가 그때 자리를 비우지만 않았어도 쌍룡이 아니라 신룡이라고 불렸을 터인데!”
낙매신검의 한탄에 화산파의 장문인인 칠지검협(七指劍俠)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장로께서 자리를 비운 건 모두 화산을 위해서였습니다. 게다가 아직 장명이는 어리지 않습니까?”
“장문인이 지켜보셨으니 알겠지만, 지금쯤이면 심상 수련을 마치고도 남을 재목이었습니다. 그걸 하지 못한 건 주변에 들러붙은 놈팡이들 때문이지요.”
낙매신검은 매화비룡 주변에서 떡고물을 쥐여 주는 호사가와 속가제자들이 싫었다.
특히 속가제자였던 호사가는 당장 파문시켜 버리고 싶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릇을 가지고 추켜세우니! 쯧쯧.”
“아, 그러고 보니 어제 목허도장이 한 짓은 들으셨습니까?”
“들었습니다. 목허도장이 한 행동 중에서 제일 가치 있는 일이었지요.”
중지로 구장명의 이마를 때리고 한참 훈계를 했다던가.
가르침을 주겠단 말은 선을 넘었지만, 그것으로 구장명의 마음을 확인했으니 넘어가 줄 수 있다.
낙매신검의 내심을 확인한 칠지검협이 전음을 보냈다.
[그나저나 곤륜신성이라는 아이는 어떻습니까?]
[장명이를 꺾어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칠지검협이 백무량의 신색을 살폈다.
과연, 낙매신검에게 일찍이 들은 대로 어린 나이에 고등한 경지에 오른 신진고수였다.
[이번에 혼이 제대로 나겠군요.]
[그래야 합니다.]
낙매신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기회에 장명이의 주변을 정리할 생각이니까요.]
낙매신검이 직접 잘라도 되지만, 그랬다가는 구장명이 반발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건 올바른 방도가 아니었다.
‘자기보다 어리고 갑자기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곤륜신성이 제일 제격이지.’
처참하게 패하면 패할수록 구장명 주위에 들러붙은 진드기가 알아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낙매신검의 눈이 좁아졌다.
어느새 백무량이 비무장 위로 오르고 있었다.
저벅, 저벅.
구장명이 화려하게 안착한 것에 비해 백무량은 평범했다.
백련교 좌호법을 죽였다는 명성에 비해 너무 초라했기에 좌중이 실망감을 품었다.
그러나 이 모두가 백무량의 연출이었다.
“저보다 선배시라고 들었습니다.”
“흥, 이제 내가 보이나 보지?”
구장명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내심 뿌듯한 마음이 없잖아 있었다.
근래 강호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곤륜신성.
그가 자신을 선배로서 대접해 주니 마음이 살짝 붕 떴다.
하지만 백무량의 대접은 그게 끝이었다.
“듣던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뭐야?”
“강호에서 쌍룡이라고 불리나 행동거지에 무게감이 없고, 검을 파지한 손에서 힘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나이도 저보다 많다고 들었는데, 그것이 얼굴에만 쏠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찰나의 침묵이 흐른다.
백무량의 말을 찬찬히 곱씹은 구장명이 이를 악물었다. 그럼에도 갖은 모욕에 턱이 덜덜 떨렸다.
“……지, 지금 나를 조롱하려는 게냐?”
“느낀 바를 그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백무량은 빙긋 웃었다.
여기서 보인 태도로 많은 사람의 미움을 받겠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쭙잖게 도사짓을 해 봐야 기대만 커질 뿐이다.
평범한 무인처럼 돌아다니다가 행한 한 번의 선행(善行).
오히려 그것이 세인의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그건 칠십여 년 전 구천검 백무량의 방식이기도 했다.
“말이 더 필요합니까?”
“네 이놈! 감히 화산파에서 나를 모욕해!”
구장명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외의 반응은 극명했다.
어린 도사는 입술을 달싹이면서 분노했고, 나이 든 도사는 시큰둥했다. 백무량의 말이 험하긴 해도 옳다는 것 하나는 인정했다.
가장 중요한 낙매신검은 피식 웃고 있다.
그와 시선을 마주친 백무량이 호흡을 골랐다.
‘저 어린 녀석을 이기는 건 너무 쉬워.’
과장을 보태자면 삼재검법으로도 구장명을 이길 수 있다.
그만큼 백무량과 구장명의 차이는 현격했다.
‘빨리 이기는 것보다 느리게 이기는 걸 고민해야 한다니.’
참으로 신선한 경험이다.
백무량은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주먹만 한 돌을 발견했다.
“오.”
좋은 생각이 났다.
돌을 들어 올린 백무량이 입김을 불었다. 돌에 한가득 묻어 있던 먼지가 날아가며 새하얀 색이 드러났다.
그걸 본 화산파의 도사들이 웅성댔다.
“……뭐 하는 거지?”
“글쎄?”
“돌을 모으는 취미가 있던가?”
많은 억측이 오간다. 그만큼 백무량의 행동은 기이하다 못해 기괴하게 느껴졌다.
구장명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뭐 하자는 거냐?”
“가만히 기다려 보시오, 매화비룡.”
“검을 뽑지 않고 무얼 하냐고!”
“무기를 정돈하고 있지 않소.”
그 말에 구장명이 순간 얼이 빠졌다.
그건 다른 도사라고 다르지 않았다. 무거운 충격이 비무장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지금 저게 무기라고 한 건가?”
“에이, 설마, 어떻게 저걸로 매화검법을 받아 낸다고?”
“저게 다 좌호법 이화겸을 꺾은 격장지계 아니겠나.”
“과연!”
단순한 농담일 것이다. 백련교 좌호법도 저런 격장지계에 당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백무량의 말을 부정할 때, 낙매신검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하하하……! 검을 뽑지도 않고, 돌로 우리 장문제자를 꺾겠다고?”
“그러려고 돌을 닦아 냈습니다.”
“하하하!”
자신이 시키긴 했지만, 저렇게 얼빠진 무기로 구장명을 꺾겠다니.
낙매신검은 너무 웃어서 생긴 눈물을 슥슥 닦아 냈다.
“장문인은 어떻습니까? 저걸 허락하시겠습니까?”
“곤륜파에 탄지공이 있다는 건 나도 처음 보겠군요.”
백무량의 진의를 알아차린 낙매신검과는 다르게, 칠지검협은 탄지공을 예상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매화검법을 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그럼 셋을 세고 시작하겠습니다!”
비무장 중앙에 선 도사가 크게 외쳤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도사가 백무량을 곁눈질했다.
정말로 돌로 싸울 생각인지 검에 손을 가져가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도사가 입술을 달싹였다.
“하나, 둘, 셋……!”
도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구장명이 앞으로 짓쳐 들었다. 비무장의 돌이 깨어지며 좌우로 비산했다.
그야말로 섬전과 같은 움직임.
백무량의 눈이 구장명을 좇았다.
‘낙매신검이 펼쳤던 일검에 비하면 하품이 나올 정도야.’
백무량은 돌을 쥔 오른손에 내공을 집중했다.
태청신공의 청운이 돌을 감싸자 웬만한 보검보다 더욱 단단해졌다.
까앙!
돌과 검이 부딪쳤다. 비무를 지켜보는 모두가 눈을 의심했다.
구장명이 펼친 초식, 매화낙섬이 돌 따위에 막혔다!
이에 치욕을 느낀 구장명은 검을 내빼며 회천각을 펼쳤다. 비급에 그려져 있는 것처럼 이상적인 자세였다.
그러나 백무량의 감상은 남달랐다.
“무공을 그림으로 배웠는가?”
기괴한 마공을 펼치는 마인에 비하면 코웃음이 나오는 일격이다.
백무량은 돌을 살짝 긁어내고는, 구장명의 무릎에 날렸다.
아주 작은 파편에 불과하나 실린 힘은 거목을 꿰뚫는다.
“끄윽!”
강렬한 고통에 구장명의 자세가 흔들렸다. 백무량은 자연스럽게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별로 힘도 주지 않았다.
쿠웅!
뒤로 넘어진 구장명은 머리가 흔들리는 충격을 느꼈다.
그렇게 찰나가 흐르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했다.
“내가, 뒤로 넘어져?”
“이런, 엉덩이가 아프겠군.”
백무량이 짓궂은 표정으로 ‘아차차’ 소리를 냈다. 어른이 어린아이를 상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구장명이 검을 거칠게 휘둘렀다.
매화접무!
이십사수매화검법에서 가장 화려한 초식이다. 주먹만 한 돌로는 모두 받아칠 수 없을 만큼 움직임이 많았다.
“어떻게 하겠느냐!”
구장명의 말에 백무량은 돌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청운이 감싸고 있으니 매화접무로는 막을 수 없을 터였다.
사실, 아무 생각이 없기도 했다.
쩌억!
칼에 몇 번 부딪친 돌이 구장명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컥!”
구장명이 두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당장은 기절하지 않았지만, 어딘가가 부러진 모양새였다.
“저, 저게 곤륜파의 탄지공인가?”
충격적인 광경에 칠지검협이 말을 더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