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19화 (119/275)

매화비원 (7)

“공동파의 무학에 이어서 이제는 화산파의 무학까지 배우고 싶은 모양이군.”

“……!”

“그리 놀랄 필요 없네. 아까 장명이와의 비무에서도 보여 주지 않았나.”

하나로 담아서 펼치는 일보.

운중용형보를 본 낙매신검은 내심 백무량을 대단하게 여기고 있었다.

후학이 선배가 남긴 무공을 답습하지 않고 진화시킨다.

이 얼마나 각별한 일인가!

하지만 어디까지나 남이었기에 손뼉을 칠 일이지, 사문의 무학이 유출되는 건 그다지 원치 않았다.

그 비무를 척준환이 보았다면 겉으론 허허 웃어도 내심 꽁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낙매신검은 침묵하고 있는 백무량에게 덕담을 건넸다.

“훌륭한 일이네. 공동파의 후기지수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무학을 자네가 습득하여 사문의 무공에 적용했으니까. 정말 크게 개안했지.”

“선배의 말을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백무량이 입술을 달싹였다.

호기심과 투쟁심 그리고 결연함이 담긴 대답이 이어졌다.

“화산파의 무학이 궁금합니다. 그래서 이곳에 있는 고수와 비무를 하고 싶고, 매화비원에도 가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 혼자만의 만족을 위해서 행하는 건 아닙니다.”

“하면 무엇인가?”

“저는 곤륜파의 도사로서 해야 할 일을 이루려고 합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백무량은 천명(天命)이란 단어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쉽게 꺼낼 수가 없었다.

천명을 이야기하기엔 아직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첫째였고, 낙매신검을 신뢰하기가 어렵다는 게 둘째였다.

단 한 가지는 낙매신검에게 말할 수 있었다.

신념을 가지고서…….

“마교의 멸절.”

“……!”

낙매신검의 미간이 좁아졌다.

몹시 건방지게 들렸다. 후기지수가 입에 담기엔 너무도 크고, 무거운 업(業)이었다.

사실상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이 아닌가.

당장 수백 년 전에 모두 죽었다고 여겼던 칠성교가 강호에 암약하고 있었으니까.

낙매신검은 백무량이 헛꿈을 꾼다고 여겼다.

“그들을 발본색원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곤륜파의 선배가 이루지 못한 유지를 이어 가는 것 또한 후학의 책무지요.”

백무량과 낙매신검의 시선에서 허공에서 부딪쳤다.

무언(無言)의 싸움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느 한쪽이 뜻을 굽히지 않는 이상,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곤륜파의 대사형과 화산파의 장로이자 강호십대고수.

강호의 강자존이라면 당연히 전자가 뜻을 꺾어야 한다.

그 법식은 칠성교보다도 더욱더 오래된 전통이었다.

“나 하나도 감당치 못한다면, 당연히 물러서야 할 것이다.”

낙매신검이 자하신공을 운용하자 짙은 매향이 자소원 안쪽을 채웠다. 구장명이 보였던 것과는 격이 달랐다.

‘몸이 따끔거릴 정도야.’

백무량은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매향은 청운을 손쉽게 뚫고서 전신을 푹푹 찌르고 있었다.

태청신단도 낙매신검의 내공 수위를 막기엔 역부족이다.

낙매신검이 낮은 목소리로 백무량을 설득했다.

“백련교주는 태청선이 있으셨던 곤륜파를 멸문시켰다. 칠성교야 말할 것도 없이, 강호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던 마교지. 강호십대고수도 승리를 자신할 수 없다.”

“…….”

“한데 너는 왜 이길 수 없는 자에게 도전하려고 하느냐? 왜 스스로 절벽에 몸을 던지려는 것이냐?”

“마땅히 그러해야 하니까요.”

“그만두게.”

낙매신검이 백무량을 더욱더 강하게 압박했다.

백무량의 도복이 거칠게 흔들렸다.

마치 태풍에 휩쓸리는 것 같았다.

“자네처럼 유망한 후기지수가 헛된 꿈에 젖어서 죽길 바라지 않아. 잠깐의 호연지기일 뿐이야.”

“잠깐이라…….”

백무량은 눈을 꾹 감았다.

옛 기억과 그때의 감정이 스쳤다. 이제는 지겨울 정도였다. 슬슬 버려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백무량의 일생이었다.

항상 비극이었고, 후회가 남았을지언정 부정할 수 없다.

하물며 지금은 곁에 현씨 조손이 있다. 사형이 어딘가에서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백무량이 입술을 달싹였다.

“선배가 판단할 게 아닙니다.”

“……뭐라?”

“잠깐의 호연지기가 아닙니다.”

헛된 꿈이었고, 잠깐의 호연지기였다면 왜 칠십여 년 전에 목숨을 내놓았겠는가.

낙매신검은 자신을 한낱 후기지수로 생각하고 있겠지만, 백무량에겐 구천검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일생은 누구도 함부로 평할 수 없다.

‘내가 검해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면, 그때는 밝힐 수 있을까?’

백무량은 자문했다. 아주 충동적인 물음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며 웃어넘길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랬다. 칠십여 년 전에 죽은 사람이 되살아났다니, 곤륜파가 좌도방문이었냐며 손가락질받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노선배나 사형의 말대로 나에게 천명이 있다면?’

마교를 일소하기 위한 천명이라면 떳떳하게 밝혀도 되지 않을까.

그것을 위해서 주어진 검해가 아니던가?

백무량은 무의식중에 검해의 심상을 떠올렸다.

휘르르…….

백무량의 의지에 반응한 청운이 바다처럼 내리깔렸다.

곤륜파의 무학으로 이루어진 바다, 검해.

백무량은 백련교주와의 싸움 이후 두 번째로 검해를 바깥으로 끌어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알지 못했다.

반쯤 무아지경에 빠진 채, 낙매신검의 매향을 압도적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낙매신검은 크게 당황했다. 무아지경에 빠진 백무량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매향을 밀어붙였다.

헛된 꿈을 막으려고 했던 것이 도리어 역으로 몰렸다.

“어린 후배가 나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경지에 올랐으니, 필시 마교와 부딪치려고 할 터.”

강한 도사일수록 사지에 자주 몰리기 마련이다.

낙매신검의 표정이 복잡했다.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안타까워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좀 더 시간을 들여서 강해지고, 단단해져서 마교와 싸우기를 바랐거늘.”

저런 경지에 올랐는데 가만히 기다리라고 하는 것은 무림의 낭비요, 누구에게나 욕을 들어먹을 일이다.

뜻을 정한 낙매신검이 검을 쥐었다.

이대로라면 백무량의 심상, 검해에 삼켜질 것 같았다.

“……후우.”

호흡을 고른 낙매신검이 매화검법을 펼쳤다.

비무장에서 구장명이 펼쳤던 초식, 매화접무.

낙매신검의 우수가 움직이자 매향이 내공을 머금었다. 유형화한 매향은 매화 잎으로 바뀌고, 붉게 물들었다.

구장명이 그저 검에 휘둘렸다면 낙매신검의 매화접무는 검과 의념을 동시에 휘두른다.

콰과과!

검해의 중심이 파헤쳐졌다. 낙매신검의 의념에 따라 매화 잎이 흐드러지고, 만개했다.

하나 그것이 전부였다.

“나의 일검에도 뚫리지 않는구나!”

낙매신검은 크게 감탄했다. 백무량이 심상에 품은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전력을 다한 일검에도 쇠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파헤쳐진 공간을 메웠다.

“약관이 되었을 때 과연 어떤 경지에 오를지…….”

낙매신검의 시선이 백무량에게 향했다. 무아지경에 빠진 백무량이 운해를 끝없이 자아내고 있었다.

지금 그를 깨운다면, 지금의 광경을 기억하진 못할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게 늘 그러했다.

정말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육체를 깎아내야만 약간의 깨달음을 주었다.

‘무의 신이 있다면 정말로 쪼잔한 존재일 거야.’

낙매신검은 검을 강하게 쥐었다.

매화만리향(梅花萬里香).

매화검법의 마지막 절초가 운해를 뒤덮는다. 붉게 물든 매화 잎이 낙매신검의 의지에 따라 휘몰아쳤다.

하나하나가 검강의 위력.

그야말로 매화검법의 극에 이른 초식이었다.

꽈과광……!

수백, 수천 개의 매화 잎이 운해를 꿰뚫는다.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자소원이 크게 흔들렸다.

“쿠흑.”

그제야 무아지경에서 깬 백무량이 헛기침을 연발했다. 심력을 너무 소모한 탓에 눈이 반쯤 감겼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일단은 이곳에서 나가지.”

“매화비원은…….”

“허락하겠네.”

낙매신검의 말에 백무량은 눈을 끔뻑거렸다. 화산파의 무학은 허락하지 않겠다던 그가 맞나 싶었다.

하지만 낙매신검은 내심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싸울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보여 주는 게 낫지 않겠나.’

한숨을 내쉰 낙매신검이 백무량과 함께 자소원을 나갔다.

그와 동시에 기둥이 부서지더니, 건물이 우르르 무너졌다.

그걸 본 백무량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부순 건 아니겠지요?”

“물어 달라곤 안 하겠네.”

낙매신검의 말에 백무량은 완전히 무너진 자소원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걸 본 낙매신검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언제 출입하면 될지 오늘 안에 알려 주지.”

“감사합니다, 선배님.”

백무량은 발치에 구르고 있는 나뭇조각을 툭툭 밀어냈다.

***

“곤륜신성이 처음 매화비원에 들어간 건 사고였기에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건 아닙니다.”

매화비원을 관리하는 장로, 하일화의 태도는 단호했다.

낙매신검이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그의 말은 변함이 없었다.

[장문인,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하 장로의 고집은 장로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칠지검협이 장문인으로서 명령하지 않는 이상, 하일화는 절대 백무량에게 출입을 허락하지 않을 터였다.

문제는 그렇게 한다면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

그보다 가장 큰 문제는 명분이었다.

“장로께서 곤륜신성과 약조를 했다지만 매화비원은 화산파의 성지입니다. 애초에 약속을 하지 않으셨어야 합니다.”

“……으음.”

침음을 흘린 낙매신검이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하 장로도 알잖소. 매화검을 익히지 않으면 어차피 매화비원에서 얻어 갈 건 없다는 것을.”

매화비원은 매화검법의 수련과 심상 수련에 도움을 주는 성지.

곤륜도인 백무량이 그곳에서 배울 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기껏해야 심상을 수련하는 데 매화검법을 참고하는 정도.

겨우 그것이 전부일진대, 하일화는 인상을 찡그렸다.

“가만 보니 장문인께서도 곤륜신성의 출입을 허락하는 입장입니까?”

“매화비원에 침입한 마인을 죽이고, 잡아 둔 게 곤륜신성이니까요. 출입뿐이라면 허락할 용의가 있습니다.”

“……허! 그랬지요. 그 공로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사문의 성지에 타 문파의 외인을 들일 순 없습니다.”

하일화는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낙매신검을 바라보았다.

사문의 제자보다 곤륜신성을 챙기려는 모습이 무척 고까웠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장문제자에게 치욕을 준 놈을 어찌 성지에 들인단 말인가! 부탁이 아니라 절을 했어도 안 될 일이다!’

하물며 그것을 곤륜신성에게 부탁했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벌였는지, 낙매신검의 행동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구장명의 행동거지에 문제가 있긴 했지만 그런 식으로 다스려선 안 됐다.

하일화가 칠지검협에게 섭섭한 목소리로 물었다.

“장문제자를 그렇게 이긴 놈을 성지로 들였다간, 화산파의 위신이 떨어질 겁니다. 장문인, 부디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시지요!”

“……하 장로.”

“예! 마음이 바뀌신 겁니까?”

“내가 왜 칠지검협이 되었는지 알지요?”

칠지검협의 말에 하일화가 입을 꾹 다물었다.

과거, 낙매신검에 이어 두 번째 기재로 불리던 검협.

그가 어느 날 세 손가락을 잃고 화산파로 돌아왔다.

당연히 화산파의 모든 장로가 분기를 터트렸다.

-대체 누가 그랬느냐!

그 물음에 검협이 대답했다.

-사파가 양민들의 목숨을 살리려면 자르라기에, 제가 잘랐습니다. 그놈의 목은 무림맹에 맡겼습니다.

장로들의 내심에 모순이 꽃피웠다.

자르지 않았더라면 먼 미래에 더 많은 사람을 구했을 터인데 왜 그랬냐며, 검협을 꾸짖고 싶어 하는 장로가 있었고.

화산파의 정신을 잘 지켰다며, 검협을 옹호하는 장로가 있었다.

하일화는 검협을 옹호하던 장로의 제자였었다.

“……왜 그때의 이야기를 하십니까?”

“매화비원이 화산파의 성지일지언정, 누구도 가지 못한다면 언젠가 폐허가 됩니다. 곤륜신성이 간다고 해서 성지가 폐허가 되는 것도 아니지요. 그는 마인이 아니니까요.”

“장문인!”

하일화가 중간에 말을 끊기 위해 외쳤다.

무례한 행동이나, 칠지검협의 생각을 바꾸고 싶었다.

하지만 칠지검협은 마음을 굳힌 지 오래였다.

“성지는 누군가의 발길이 닿기에 성지입니다. 배움에 목마른 도사가 보고 싶다고 청한다면, 오히려 기쁜 일이 아닙니까?”

“…….”

“곤륜신성에게 길을 열어 주십시오, 하 장로.”

칠지검협의 시선에 하일화는 고집을 꺾어야만 했다.

그가 세 손가락을 자르고 구한 양민들.

그중 한 명이 바로 하일화의 친동생이었다.

“그 이야기를 꺼내 가며 곤륜신성의 편을 들 이유가 있습니까?”

“옆에 있는 낙매신검에게 마교의 멸절을 논한 후기지수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강함을 훌륭하게 증명했지요.”

‘저 낙매신검을 상대로 강함을 증명했다고?’

구장명보다 몇 수는 위라는 건 알았지만, 그 정도였다니!

하일화의 눈이 커졌다.

그걸 본 칠지검협이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그런 곤륜신성에게 도움을 주고자 합니다. 마교에게 함께 대적할 동도로서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하일화는 두 손을 모아 올렸다.

앞으로 다가올 칠성교와 백련교.

그들과의 싸움에서 고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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