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비원 (4)
자색의 하늘, 매화나무로 이루어진 숲.
왼쪽 아래에 주(株)라고 적힌 그림이라.
백무량이 그림 앞에서 움직이지 않자, 학도사가 거드름을 피웠다.
“이 그림이 왜 맨 위층에 있는지 아는가?”
“모르겠습니다.”
“아래에 있는 그림보다 귀중하기 때문일세.”
백무량은 자연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래에서 몇십 점씩 걸려 있던 것에 비해 이곳은 두세 그림밖에 없었다.
과연 학도사의 말대로였다.
“보는 눈이 있군. 하지만 곤륜에 팔진 않을 걸세.”
“낙매신검께서 부탁해도 안 됩니까?”
“어, 그건…… 일반적일 때랑 다르잖나.”
“된다는 이야기군요.”
백무량은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내심은 복잡했다.
‘선후가 잘못된 건 목허도장이 아니라 나였나 본데.’
사형의 안배가 매화비원에 있었단 말일까?
백련교주와 마주한 것이 그 안배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백무량은 그와의 만남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하지만 확인하지 않고서는 화산파에서 나갈 수도 없는 일.
백무량이 고개를 털었다.
일이 조금 꼬이긴 했지만, 해볼 만했다.
‘보수를 두 개로 늘리면 되는 일이잖아.’
낙매신검이 부탁했다. 매화비룡의 코를 꺾어 달라고.
그걸 완벽하게 해낸다면 매화비원에 다시 출입하는 건 물론, 사형의 그림까지 취할 수도 있다.
백무량은 득의의 미소를 짓고는 학도사에게 예를 취했다.
“선배 덕분에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알려 준 거라곤 위층의 그림이 값지다는 것뿐이네.”
빚을 졌다고 하기엔 너무 사소한 일이 아닌가.
백무량이 마음에 들었던 학도사는 이번 일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저 그림을 미리 점찍고 있었다는 말을 했다가는 낙매신검이 백무량에게 무언가를 시킬 테니까.
학도사가 고개를 가볍게 털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제 들어가게. 시간이 늦었네.”
“감사합니다.”
백무량과 학도사는 담소를 나누며 전각에서 나왔다.
***
“장난하자는 건가?”
매화비룡 구장명(具長鳴)은 전각에서 나오는 백무량을 지켜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나와의 비무를 앞두고 있으면서 그림이나 구경하고 있어?”
낙매신검이 구장명에게 말했다.
곤륜신성을 비무로 꺾는다면 매화비원의 출입을 허락하겠다고, 장문인이 있는 자리에서 공언했다.
매화비원이 어디던가!
화산파의 개파조사이신 학대통 진인이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진수(眞髓)를 남겨 놓은 성지이자 심상.
출입을 허락한다면 사실상 차기 장문인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구장명의 내심은 조급하고, 간절했다.
‘그런데…… 정작 저놈은 나를 가벼이 여기고 있다는 게지.’
구장명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백련교의 좌호법을 죽였다고 하여 품었던 호감이 산산이 무너졌다.
혹자가 본다면 속이 좁다고 혀를 찼겠지만, 구장명 주위에는 꾸짖어 줄 사람이 없었다.
도리어 그것을 부채질했다.
“이번에 화산파의 위엄을 제대로 보여 줘야 합니다!”
“암요! 대화산이야말로 강서 도문의 제일 아닙니까?”
“곤륜신성을 꺾는다면 누구도 사형의 강함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설령 소림의 불영신동일지라도요!”
구장명의 사제들이 듣기 좋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누가 듣더라도 아부다. 실제로 매화비룡은 소림의 불영신동에 비하면 몇 수는 뒤떨어진다는 말이 지배적이었다.
불과 일 년 전만 하더라도 그에게 패배하지 않았던가.
구장명이 한쪽 어금니를 꽉 다물었다. 지금 생각해도 치욕적인 패배였다.
‘마침 그놈과 곤륜신성이 비슷한 나이였지.’
곤륜신성 백무량이 열여섯, 불영신동이 열여덟.
나이가 약관을 넘은 매화비룡이었기에 더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내가 직접 꺾어 주는 수밖에 없겠구나.”
구장명의 말에 사제들이 ‘와!’ 소리를 냈다.
그때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불청객이 다가왔다.
“가만히 듣자하니 뭐가 어째? 강서 도문의 제일? 니가 곤륜신성을 꺾어?”
“이 밤중에 누구…… 헉!”
불청객의 얼굴을 확인한 구장명이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어린 시절, 그에게 엉덩이를 얻어맞던 기억이 생생했다.
“종남이야말로 강서 도문의 적통이거늘! 듣는 귀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게냐?”
종남파의 장로 목허도장이 콧김을 씩씩댔다.
자신의 초대를 거절한 백무량을 뒤쫓아서 화산파로 왔더니만, 건방진 후배들이 종남파를 업신여기는 소리를 찍찍 내뱉으니 화가 치밀었다.
“네가 아직 벌이 부족한 모양이구나.”
“아, 아닙니다, 선배님. 제가 실언하였습니다.”
“그래. 실언이지. 어린 혈기에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다.”
목허도장의 말에 구장명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해가 저문 밤에 화산파 내부.
목허도장이 구장명에게 손찌검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과감했다.
“한데 자기 사제가 그런 말을 하는데 꾸짖질 않아? 못난 놈!”
따악!
목허도장의 중지가 구장명의 미간을 때렸다.
힘을 아무리 덜었다고 해도 일문의 장로. 이마가 순식간에 시뻘겋게 물들었다.
구장명의 몸이 공벌레처럼 구부러졌다.
“악!”
“과거 종남산에서 개파한 전진교. 그곳의 칠자로 불리셨던 학대통 진인이 화산파를 세웠음을 네가 모르진 않을 터! 그걸 알고도 사제의 헛소리를 가만히 놔둬?”
“하,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곤륜신성과의 비무가 중요하다?”
“예!”
구장명이 반항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본 목허도장이 지저분하게 웃었다. 백무량이 연무지회에서 펼친 검무를 보았던지라, 구장명의 말이 참으로 우습게 들렸다.
“너는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자유로이 펼칠 수 있더냐?”
“예!”
“그걸 누가 판단하느냐, 네가?”
“당연하지요! 저는 화산파의 장문제자입니다!”
“자유로이 펼친다. 그 말의 의미를 네가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느냐? 확신할 수 있어?”
“…….”
선문답인가.
구장명은 대답을 머뭇거렸다. 이십사수매화검법을 통달했다고 자부하긴 했지만, 심원(深原)을 이뤘다고 할 순 없었다.
목허도장이 거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주제는 아는구나. 그래. 네가 화산의 장문제자라고 해도 결국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자유로이 펼친다는 것은 자신이 펼치고자 하는 심상의 극(極)을 이뤄야만 가능한 말이다.”
“하면 곤륜신성은 그걸 이뤘단 말입니까?”
구장명이 순간 욱하여 물었다. 목허도장은 평소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노인네들이 무림맹으로 바둑 두러 간 줄 아느냐?”
“……예?”
“연무지회에 참석한 구파일방의 고수가 일곱이다. 호사가들이 그리 좋아하는 강호십대고수가 둘이나 참석했지.”
그들 모두가 곤륜신성의 검무를 인정했다.
그 말의 의미와 무게를 구장명은 가볍게 보고 있다.
목허도장이 인상을 한가득 썼다.
“지금 네 수준으로 그 자리에서 인정을 받을 것 같아?”
“하지만 저는 쌍룡…….”
“너 말고 불영신동이라면 몰라도.”
목허도장이 구장명의 역린을 서슴없이 건드렸다.
구장명은 순간 치솟으려는 화를 억지로 꾹꾹 눌렀다.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곤륜신성한테 그냥 지라는 뜻입니까?”
“내가 네 무공을 봐주마.”
그 말에 숨을 죽이고 있던 구장명의 사제들이 눈을 끔뻑였다.
종남과 화산의 무공이 다르다고 한들, 목허도장은 낙매신검의 호적수를 자처하는 고수다.
그의 가르침을 받는다면 매화검을 더욱 날카롭게 벼려 낼 수 있으리라.
‘받으십시오!’
‘기회잖습니까!’
구장명의 사제들이 속으로 결정을 재촉했다.
하지만 구장명은 이미 답을 정해 놓고 있었다.
“싫습니다.”
“왜?”
“선배라고 한들 매화검의 수련을 타인에게 보여 줄 수 없습니다.”
구장명은 화산파의 장문제자로서 가져야 할 태도를 관철했다.
목허도장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면 잠깐은 좋겠지만, 결국 화산파의 가르침에 불순물이 섞이게 된다.
그건 구장명이 원하지 않았다.
“누가 화산파의 도사 아니랄까 봐 고집하고는…….”
목허도장은 혀를 찼다.
사실 두 가지 생각이 있어서 한 제의였다.
첫째는 초대를 거절한 백무량에게 골탕을 먹이기 위함이요, 둘째는 매화검법의 요체를 엿보기 위해서다.
‘쯧. 이래서야 낙매신검을 이기기란 요원하겠군.’
한 번 더 제의하면 화산파에서 종남의 가르침을 고집하는 꼴이다.
목허도장이 고개를 돌렸다. 구장명의 결정을 나름대로 존중했다.
“곤륜신성한테 얻어터져도 모른다.”
“쌍룡의 이름이 바래질 일은 없습니다.”
구장명은 자신 있게 답했다.
‘상처를 돌보지 않고 그림이나 구경하는 녀석한테 질 리가 없다!’
구장명의 시선이 백무량이 돌아간 처소로 향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전각을 돌아다녔으니 끙끙거리고 있을 게 뻔했다.
***
“벌써 다 붙었단 말인가?”
깜짝 놀란 의원이 백무량의 복부를 매만졌다. 잔도에서 떨어지면서 부러졌던 뼈는 어느새 붙은 지 오래였다.
몇십 년 동안 환자를 보았지만 백무량의 치유력은 말도 안 되는 수준이다.
“허어, 이게, 허.”
의원이 감탄하는 모습에 백무량은 내심 히죽 웃었다.
좋은 약, 잠깐의 행공, 태청신단의 효력.
그 세 가지가 얽히자 뼈가 금세 붙었다. 내상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대체 어떻게 돼먹은 몸이냐?”
“곤륜산에서 동공을 펼치다 보면 튼튼해지기 마련이지요.”
백무량의 말에 의원이 좀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뼈가 부러진 게, 기껏해야 오늘 정오잖나!”
“그게…… 아마 살살 부러져서 아니겠습니까?”
“골절에 살살 부러진 게 어디 있다고 그래!”
의원이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환자 앞에서는 절대 하지 않는 행동이지만, 백무량의 용태를 보면 벌써 다 나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건 백무량 자신도 알고 있었다.
‘내가 너무 장난스럽게 말했나.’
태청신단과 선기의 조합이 이렇게 뛰어날 줄이야.
백무량은 방금 전 일을 떠올렸다.
태청신공을 행공하기가 무섭게 체내에 녹아든 태청신단과 선기가 부러진 갈빗대를 감싸 안았고, 금세 붙였다.
그것이 전부였기에 변명할 게 떠오르지도 않는다. 백무량은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의원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몸이 뚫어지겠습니다.”
“뚫려도 금방 재생하겠지!”
“제가 무슨 벌레인 줄 아십니까?”
“뼈가 그렇게 빨리 붙는데 관통상이라고 어련할까?”
‘……대맥이 다치지만 않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백무량이 진지하게 고민하자 의원이 실성한 듯 웃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검상과 골절상을 보았지만, 백무량처럼 자가 치유 된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그의 몸은 마치 완전히 정련된 무인과 같다.
백무량의 나이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의원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곤륜산에서 펼친 동공이 전부인가?”
“예.”
“그것만으로 신체를 그렇게 단련했다고?”
“그렇죠.”
백무량은 곧바로 대답했다. 거짓은 한 톨도 없었다.
단지 신체가 칠십여 년 전처럼 완성된 채 어려졌을 뿐이다.
그걸 모르는 의원이 속으로 고민했다.
‘어린 후기지수를 곤륜산에서 이삼 년 동안 수련시켜 볼까?’
절반만이라도 백무량처럼 된다면 화산파의 미래가 밝아질 터.
장문인에게 건의를 올릴 만하다.
의원은 백무량에게 본격적으로 캐물었다.
“어떤 식으로 단련하나?”
“곤륜파만의 수련법을 어찌 여기서 말하겠습니까?”
“……내가 개인적으로 연단하고 있는 걸 주겠네.”
“그럴 수 없습니다. 무엇을 준대도 사문의 가르침을 유출할 수 없습니다.”
백무량은 엄격하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사실, 자신의 단련법은 단순 무식 하여 쉽게 말해도 되는 일이었다.
‘여기서 곧바로 불면 미끼가 적지.’
의원이 장문인을 통해 무엇을 가져올 것이냐.
그것을 보고 나서 정하는 것이 순리다.
백무량은 속으로 구멍이 조금씩 뚫린 바위를 떠올렸다.
잘 구슬리면 말할 것처럼 보이게끔, 여유를 둔 것이다.
그걸 본 의원이 침음을 흘렸다.
“으음, 내가 너무 늦은 시간까지 있었던 모양이군. 이 이야기는 다음에 이어서 하세.”
“말하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
눈에서 아쉬움을 뚝뚝 흘린 의원이 처소에서 나갔다.
백무량은 이부자리에 몸을 누우며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