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자 (2)
안서백은 내심 곤륜파에 실망감을 품고 있었다.
‘구파일방에 합류했단 소식을 듣고 찾아왔지만, 무공의 수준은 우리 가문과 별반 다를 게 없지 않은가.’
하물며 곤륜파 장문인은 무공을 모르는 학도사.
강자존의 법식에 따르자면 곤륜파보다 오히려 경무안가가 더욱더 훌륭한 가문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되니 백무량의 소문도 의심스러웠다.
‘청해성의 마인은 겨우 잡졸에 불과했고, 사천당가와 사대사행 모두 그곳에 있는 무인의 도움을 받지 않았나.’
특히 좌호법 이화겸은 백무량과 생사투를 벌이기에 앞서 청성파 전체와 싸우지 않았던가.
체력과 내공을 소진한 노인을 상대하는 건 아이의 손가락을 꺾는 것보다도 쉬운 법이다.
안서백은 백무량의 위아래를 곁눈질했다.
제법 근골이 완성되어 있기는 하나 일평생 동안 무공을 단련한 자신의 상대는 아니었다.
“지금이라면 말을 번복할 수 있네.”
“제가 왜 번복하겠습니까, 전 청해제일검과 비무할 수 있는 기회인데요.”
‘……요놈 봐라.’
안서백이 수염에서 손을 뗐다. 이만큼 경고를 해도 받아들이지 않으니, 뼈아픈 교훈을 새겨 줄 차례였다.
“선배로서 선수는 양보하겠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
“곤륜파에 혈육을 보내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곤륜파 무공을 직접 마주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게 선수와 무슨 상관인가.
안서백이 묻기도 전에 백무량이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일초반식에 패하면 자존심이 상하잖습니까.”
“……자네.”
“저도 한 번만 말하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무량의 기세가 거칠게 몰아쳤다. 안서백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어린 외견을 보고 괄시했던 마음이 단숨에 사라졌다. 잠깐이었지만 백무량이 보인 존재감은 그가 봐 온 그 어떤 중원의 고수보다 뛰어났다.
안서백은 인정해야 했다.
“사양하지 않지.”
곤륜신성이 생각보다 뛰어난 경지에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 말고는 별다를 게 없었다.
‘오만하고 행동이 가벼운 것이 결국 그 나이 대로구나.’
연무장에 도착한 안서백이 검을 쥐었다.
경무(輕武).
쾌검으로 이루어진 경무안가만의 가전 무공이었다.
처음 마주한다면 일검으로 목을 벨 수도 있는 필살의 검법이기도 했다.
‘손에 사정을 두어야겠지만, 상처 하나는 남겨 주어야겠지.’
그 상처를 볼 때마다 경무안가를 무시하던 실책을 떠올릴 것이다.
안서백의 검이 괴상망측하게 휘어졌다. 허와 실을 쉬이 구분할 수 없는 검로가 백무량의 목을 향해 발해졌다.
하지만 백무량의 안색은 여전히 여유 만만했다.
언제든 제압할 수 있다는 것처럼, 백선신검에 손을 가져가지도 않았다.
그 사실이 안서백의 심기를 건드렸다.
“건방지도다!”
“내가 할 말입니다, 선배.”
백무량이 옆으로 반보 움직이며 우수를 휘둘렀다.
소청권의 이 초, 우청격.
오른 주먹이 칼날을 후려쳤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한 안서백의 손목이 강하게 뒤틀렸다.
“……크윽!”
고통이 안서백의 정신을 뒤흔든다. 백무량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오른발을 앞으로 내질렀다.
쩌억!
발바닥으로 몸통을 밀어 친다. 실전이었다면 발등을 낮춰서 창을 찌르듯이 펼쳤을 터였다.
그러나 밀치는 것에도 나름대로 고통이 있다.
“커헉!”
안서백의 입가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렀다. 내장이 뒤틀리며 내상이 턱 끝까지 올라온 까닭이었다.
백무량은 안서백의 선공을 냉정하게 평가했다.
“검로가 특이하기는 하나 현묘함이 없으니 실을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가전 무공을 헐뜯으려는 게냐!”
“그냥 그렇다는 건데, 뭐, 폄하로 들렸다면 어쩔 수 없지요.”
백무량이 눈을 끔뻑였다.
그 모습이 마치 안서백의 복장을 터트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곤륜파의 속가제자로서 배우는 무공이 아마 더 뛰어날 겁니다.”
“경무안가를 무시하다니……!”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안서백이 선홍색 핏덩이를 뱉어 냈다.
내상을 억지로 가라앉히고 내공을 운용했다는 뜻이다.
백무량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살초라도 펼치겠단 겁니까?”
“명문 도가인 줄 알았건만, 대사형의 태도가 이러하다면 어찌 가문의 핏줄을 쉬이 맡기겠느냐?”
“…….”
이에 대해선 백무량도 할 말이 없었다.
전 청해제일검이라는 별호에 호승심을 느꼈고, 마음이 고깝기도 했다. 운산보와 붙어먹은 가문이라는 생각이 컸다.
그래서 지도대련처럼 비무를 진행할까 했는데…… 예상보다 안서백의 자존심이 높았다.
‘나이가 나이니까 부족함을 깨달으면 고개를 숙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독이 될 줄이야.’
이로써 경무안가를 비롯한 권문세가와 척지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백무량은 후회하지 않았다.
청해성의 권문세가가 겨우 이 정도라면 나머지도 별 볼 일 없는 가문일 테니까.
“선공을 펼치십시오. 제가 받겠습니다.”
“끝까지!”
안서백의 안광이 불꽃이 튕겼다. 범처럼 보였던 수염이 지금은 승냥이와 다를 바 없었다.
‘겉모습만 요란했단 거지.’
백무량은 남궁진과 척준환, 송우현을 떠올렸다.
평소에는 실없는 사람인가 싶다가도 필요할 때면 진지해지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고수라 할 수 있었다.
가문의 휘광을 빌려서 청해제일검이라.
그런 건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을 명예였다.
백무량의 우수가 앞으로 향한다. 백선신검이 운해의 흐름을 가르며 안서백의 검과 마주했다.
구천화우검의 일 초, 균천관일.
검극과 검극이 부딪친다. 불똥이 허공을 튕기는가 싶더니, 백선신검이 순식간에 안서백의 검을 갈랐다.
“……!”
두 동강이 난 칼.
안서백은 실의한 표정으로 검을 놓았다. 뗑그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땅바닥을 뒹굴었다.
그것이 마치 검객의 꺾인 의지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백무량은 안서백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검술의 소양이 부족할뿐더러, 상대를 너무 얕잡아 보다가 당한 패배였다.
‘진지하게 상대했다면 그래도 일 초에 당하진 않았겠지.’
백무량이 본 경무검법은 변초와 허초가 잦았다.
그 점을 잘 이용해서 상대의 실수를 유도한다면 강자에게도 상당히 잘 먹힐 무공이었다.
그것을 제대로 써먹지 못한 것은 오로지 안서백의 분노 때문이다.
“일어나십시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시끄럽네.”
안서백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신에게 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싫은 눈치였다.
백무량은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군자는 아이에게도 배운다고 하는데, 저 사람은 내 소문을 들었음에도 눈과 귀를 막았군.’
저렇게까지 나오면 겸양을 떨기조차 싫어진다.
안서백에게 등을 돌린 백무량이 곤륜파 밖으로 향했다.
철유를 비롯한 제자들이 만들어 놓은 지도.
그것을 보면서 곤륜산맥을 떠돌 생각이었다.
***
그날 저녁.
“건방진 애송이 같으니!”
“무공이 뛰어나다고 그렇게 행동해도 된답니까?”
“…….”
주변에서 백무량을 성토하는 말을 흘림에도 안서백은 말없이 촛불을 노려보았다.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백무량에게 패한 자신의 모습과 같았다.
직접 백무량과 검을 마주하고 나니 한 가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곤륜파의 무공이 무척 뛰어나더구나.”
“아버님!”
안서백의 아들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내일은 제가 도전하겠습니다. 기필코 그놈의 콧대를 꺾어서 경무안가의 명예를 바로 세우겠습니다!”
“됐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청해제일검이라고 해 봐야 결국 곤륜파가 없을 때의 이야기지 않느냐.”
안서백은 미련을 허심탄회하게 풀어놓았다.
“내 고집이 컸던 게야. 후기지수를 상대로 자존심을 부리겠다고 살초를 펼친 게 잘못인 게지.”
비무하던 당시는 피가 끓어서 알지 못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백무량의 잘못보다 자신의 잘못이 컸다.
‘청년이 말실수했다고, 무공이 뛰어나다고 살초를 펼쳐서야 어찌 무가의 어른이라고 할 수 있겠나.’
안서백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니 그제야 가문을 위한 길이 보였다.
“속가제자로 들어가거라. 정종 무학을 익힐 수 있다면, 소가주의 직책을 포기해도 좋다.”
“하지만……!”
“너도 보지 않았느냐. 곤륜파의 무학이 얼마나 뛰어난지 말이다.”
감았던 눈을 뜬 안서백의 표정에서 욕심이 드러났다.
“나중에는 경무안가의 가주보다 곤륜파의 속가제자가 더 나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지금의 패배는 잊어도 좋다.”
“아버님의 뜻이 그렇다면…… 잊겠습니다.”
안서백의 아들은 속으로 안도했다.
허풍을 떨긴 했지만, 백무량에게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탓이다.
한편 같은 시각.
“윗물이 그러니 아랫물이 맑을 리가 없겠지.”
곤륜산맥을 떠돌던 백무량은 경무안가의 처우를 결정했다.
송우현이야 청해성의 인맥을 중시하는 듯했지만, 백무량의 생각은 달랐다.
‘인맥도 인맥 나름이지 일단은 사람이어야지.’
상황이 어려워지면 나 몰라라 도망가는 건 곤륜파의 정신에 맞지 않았다.
다른 구파일방도 마찬가지겠지만, 항상 마교와의 전쟁에서 일선에 섰던 곤륜파는 더더욱 중요했다.
약속과 신뢰.
그것이 밑바탕에 깔려 있지 않으면 상대가 권문세가든 오대세가든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백무량은 곤륜산맥을 떠돌았다.
분광뇌운결을 가르쳐 주겠단 말에 얼마나 신이 났는지, 진척이 생각보다 더욱 빨랐다.
‘열흘이 삼사 일로 줄어들다니.’
무공에 대한 열망이 그토록 강했던 걸까.
헛웃음을 머금은 백무량이 보다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그러다 보니 익숙한 곳에 도착했다.
등정로에서 마주쳤던 바람, 우거진 녹음(綠陰).
백무량은 어린 시절처럼 신을 벗었다. 사브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낙엽이 짓밟혔다.
‘가을이구나.’
완전히 만연한 가을.
주황색으로 덧칠된 산맥이 백무량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사형이 좋아했던 광경이었고, 사부도 가을의 곤륜산을 아꼈다.
워낙 바쁘다 보니 이런 절경을 놓치고 있었던 걸까.
백무량은 숨을 한가득 머금었다. 맑은 공기가 폐를 살살 긁어 주는 듯했다.
그제야 자신의 행색이 눈에 들어왔다.
“주책이었구먼.”
신을 벗고는 낙엽을 짓밟고 다니다니.
현종휘가 보았다면 현사조님도 애였다면서 낄낄거렸을 터였다.
백무량은 피식 웃고는 가까운 암자로 향했다.
주백천이 도경을 들고 자주 찾아갔던 암자, 청석암.
백무량이 청석암의 마루에 걸터앉기가 무섭게 나무가 뒤틀렸다.
우드득!
습기를 너무 많이 머금어서 그런지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단 건가.
백무량은 애석하단 표정으로 마루를 내려다보았다. 이곳에서 자주 놀았던 추억이 아직 생생했다.
하지만 거기에 머무를 순 없었다.
‘암자를 살피라고 했지.’
마루 위로 올라선 백무량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이 자리를 비워서 핀 초록색 이끼 같은 게 벽지를 채우고 있었다.
인상을 한가득 쓴 백무량이 이곳저곳을 뒤졌다. 하지만 텅 비었을 뿐, 무언가 보이지는 않았다.
‘하긴, 뭐가 있었으면 나한테 가져다줬겠지.’
고개를 내저은 백무량이 바깥으로 나가려던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사람이 무언가를 숨기려고 하면 보통 아래에 숨기곤 한단다.
주백천이 여러 이야기를 하면서 중간중간 해 주었던 공통점.
‘그것이 문득 떠오른 이유가 무엇일까.’
백무량은 직감대로 방바닥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콰직!
바닥이 가라앉으며 그 아래가 보였다. 백무량의 눈이 커졌다.
쇠로 만들어진 상자.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건지, 녹 하나 없다.
백무량은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 안에는 솜이 가득 채워져 방습 처리가 되어 있었다.
“역시!”
백무량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솜 안쪽에 하나의 서책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