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자 (3)
곤륜파를 공격한 마교에 대하여.
제목을 확인한 백무량은 서책을 펼쳤다.
그곳에는 주백천의 서체로 쓰인 설명으로 즐비했다.
칠성교.
천마신교.
성화교.
백련교 이전에 곤륜파를 공격했던 마교에 대해 꽤나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사형이 이런 걸 준비해 뒀단 말인가?”
불과 이십여 일 전만 하더라도 칠성교도에게 공격당하지 않았던가!
백무량은 서책을 유의 깊게 살폈다. 주백천이 남긴 서책에서 칠성교를 상대할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한 글줄에 시선이 꽂혔다.
-가면의 면적이 넓을수록 신과 동화된다. 따라서 칠성교의 직책은 가면에 따라 결정된다.
-그들의 무공은 중원의 것과는 달리 변칙적인 움직임으로 유명하다. 필자는 그것을 인간의 정신이 신에게 융화되었기에 벌어진다고 확신한다.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두 칠성교도를 무림맹에게 넘길 때 보았던 괴한.
‘얼굴을 덮을 정도의 가면이었던 것 같은데…….’
서책의 정보가 사실이라면 그자가 바로 칠성교주였다는 말이 아닌가!
백무량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만일 그때 대책 없이 덤볐더라면 백련교주와 버금가는 고수와 싸워야 했을지도 몰랐다.
하면 천마신교는 어떠할까?
백무량의 손가락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칠성교의 습성이나 문화보다는 아무래도 무공이나 알아볼 특징이 궁금했다.
-천마신교.
-그들은 고대의 천마를 신으로 모신다. 시대에 따라 마라(魔羅) 혹은 암천제(暗天帝)라 칭하기도 했다.
-칠성교가 사람의 정신을 망가뜨린 후 신을 빙의시킨다면 천마신교는 의태에 가깝다. 서장의 포달랍궁에서 분화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나 확신은 없다.
-천마신교의 특징은 안색이 항상 파랗게 질려 있다.
“사형도 잘 알지 못하는 건가.”
오랜 시간 동안 날뛰었던 칠성교와는 다르게 천마신교는 곤륜파에게 패배했으니까.
위험도가 낮다고 생각해서 기록이 많이 없는 듯했다.
백무량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성화교를 살폈다.
-성화교.
-특이하게도 성화교는 교주를 성화를 품은 자, 성신(聖身)으로 칭한다. 성화를 통해서 세상을 정화한다는 위험한 교리를 가지고 있다.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하다. 고대의 칠성교나 세외에서 온 천마신교와는 다르게 성화교는 무림 내에서 생긴 마교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마공조차 쓰지 않는다.
가장 까다로운 마교다.
백무량의 표정이 굳었다. 알아볼 방법이 전무하다면 모든 무림인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구파일방의 고수들 중에 있었을지도…….’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목허도장을 떠올렸다.
곤륜파의 복귀를 억지로 반대하는 모습이 유난히 눈에 띄었던 탓이다.
“후우.”
한숨을 내쉰 백무량은 맨 첫 장으로 돌아갔다.
가장 궁금했던 부분을 해결했으니, 이제는 정독할 차례였다.
‘마교를 알아볼 능력만 있다면 백전백승이야.’
백무량의 시선이 잠시 손등의 운룡으로 향했다.
마기를 감지하고 빛을 내는 공능이 있다고는 하나, 칠성교 때처럼 갑자기 급습해 올 가능성이 있었다.
그 말인즉 높은 경지의 마인은 마공을 숨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들을 끌어내려면 역시 소림사의 무승이 제격이지.’
아무리 잘 숨긴다고 한들 소림사의 불기에는 맥을 못 추는 것이 바로 마인이다.
서책의 내용대로라면 성화교를 제외한 칠성교와 천마신교를 상대함에 있어 소림사가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백무량은 서책을 끝까지 읽으면서 요점을 정리했다.
‘최소한 성강의 경지가 아니라면 엮여선 안 된다.’
백무량이야 삼 년 전에 이룩한 경지였지만, 보통의 무인이라면 이립이 되어도 이루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강기를 이룬다는 건 일신의 무공에 통달했다는 의미다.
그런 고수가 구파일방에선 각 문파마다 최소 스무 명.
오대세가가 항상 구파일방에게 밀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팔락.
서책의 마지막 쪽.
그곳에는 마교에 대한 이야기는 적혀 있지 않았다.
주백천이 과거에 겪은 개인적인 일화가 담겨 있었다.
-어린 사제가 물었다. 곤륜은 왜 항상 마교를 막다가 멸문을 당하느냐고, 이런 고초를 무릅쓸 이유가 있느냐고.
백무량은 침묵했다. 기억이 틀린 게 아니라면 자신이 어린 시절에 주백천에서 투덜댔던 이야기였다.
‘모두가 의로움을 알아주진 않는다고, 버릇없이 외쳤었지.’
백무량의 시선이 다음 줄로 향했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사형의 대답이 적혀 있었다.
-그때의 나는 사제에게 무슨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답을 찾게 되면 말해 주겠다고 했다.
-그 뒤로 수십 년이 흐른 지금.
-드디어 답을 깨달았다.
“의와 도리.”
백무량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선이 곧바로 아랫줄로 향했다.
-몹시 고리타분한 답이다. 사제가 듣는다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원체 그런 걸 싫어하는 아이였으니까.
-하지만 내 일생을 안다면 이해해 줄 것이다. 사제는 남을 이해하고 보듬을 줄 아는 사람이니, 믿고 맡길 수 있다.
백무량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렇지, 사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글줄.
백무량은 주백천의 서체를 매만졌다.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으면서 글만 남겨 놓고, 사람의 감정을 북받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영웅담의 주인공이 되겠다고 했지.
-내 그림은 산하객잔과 무당, 화산, 보타암, 종남에 남겨 두었다. 부디 안배를 잘 수습하면 좋겠구나.
“그건 송 노야한테 들었어.”
천문을 읽는 주백천도 송우현의 존재를 알진 못했던 모양이다.
큭큭거리며 웃은 백무량이 눈가를 쓸었다. 잠깐 울음이 나올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눈물을 흘릴 거라면 백련교를 처리한 뒤, 사형과 재회하고 난 뒤여야 한다.
의지를 다진 백무량이 마지막 줄을 읽었다.
-누군가가 이것을 먼저 발견했다면, 의지를 후대에 남겨 주기를 바란다.
백무량은 서책을 덮었다. 눈이 저도 모르게 감겼다.
“확신은 없었던 거구나.”
만에 하나 짐승이 찢을까 싶어서 쇠로 만든 상자로 봉하고, 솜으로 습기를 막고, 마지막 글줄까지 남긴다.
이것을 남기면서 주백천이 얼마나 긴장했을지 눈에 선했다.
“내가 발견해서 다행이야. 그렇지, 사형?”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백무량은 헛웃음을 흘렸다. 워낙 기상천외한 것과 마주하다 보니 서책이 대답할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품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금방 찾아갈 테니까.”
동이 틀 때까지.
백무량은 밤새도록 암자에서 혼자 앉아 있었다.
***
“이제 오신 겁니까?”
현노윤의 걱정 어린 물음에 백무량은 애써 웃었다.
“산맥에서 흥미로운 걸 발견해서 말이야. 필사해서 무림맹에 보낼까 해.”
백무량이 품에서 서책을 꺼냈다. 현노윤은 눈을 의심했다.
“이럴 수가…… 이건 과거의 곤륜도가 남긴 서책이군요.”
“어떻게 알아봤느냐?”
“수결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시대에 따라 곤륜의 학도사끼리 유행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 게 있었나.”
백무량에게 서책을 건네받은 현노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맨 뒷장이 왜 뜯겨 있습니까?”
“처음부터 그랬다.”
“그렇습니까?”
뜯긴 자국을 보아 최근에 생긴 흔적이거늘.
현노윤은 백무량이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굳이 묻진 않았다.
언젠가 말할 때가 되면 알려 줄 터였다.
무엇보다 서책에 적힌 정보가 무척 흥미로웠다.
“곤륜파가 유실한 마교의 정보가 모두 담겨 있다니…… 이걸 한 서책에 모을 도사라면 범상치 않겠지요!”
“내 사형이 쓴 책일세.”
“사조님의 사형이라면, 그분 말입니까?”
“그분이라…….”
백무량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얽혔다.
그걸 본 현노윤이 아차 하여 말을 고쳤다.
“주 사조님이지요. 실언이었습니다.”
“아니야. 괜찮아. 모두가 잊었는데 어찌 장문인을 탓할 수 있겠느냐.”
고개를 내저은 백무량이 현노윤을 바라보았다.
“필사는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겠더냐?”
“학도사 다섯이 붙으면 사흘이면 충분할 겁니다.”
“사흘이라…….”
백무량이 턱을 매만졌다. 조금씩 올라오는 솜털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슬슬 어른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마교를 견제하면서 시간을 끈다면 누구에게도 이길 자신이 있다. 잠깐 마주했던 칠성교주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단 한 사람.
백련교주만큼은 백무량에게 있어 절대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었다.
그럴수록 필요한 것은 등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동문이다.
백무량은 턱에서 손을 떼었다.
“그동안 종휘와 철유에게 분광뇌운결을 가르치면 되겠군.”
“종휘야 그렇다 쳐도, 철유한테 벌써 가르쳐도 되겠습니까?”
“삼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기본을 단련한 제자야. 게다가 종휘 대신 교두 노릇을 하는데 뭐라도 챙겨 줘야지.”
“과연.”
현노윤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백무량은 차후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화산파에 있는 사형의 그림을 보러 가느냐, 칠성교에게 공격당했던 문파를 찾아가느냐.’
전자는 확실하게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었고, 후자는 무림맹에게 알려 줌으로써 후일을 노려볼 수 있었다.
거리상으로는 후자가 훨씬 멀었다.
산동성의 태산검문.
구파일방이 만들어지기 이전엔 강동제일검문이라고 불렸던 문파였다.
‘황제가 봉선 의식을 치를 때마다 태산검문의 장문인이 검무를 추었다고 하니 전통성은 확실하지.’
서책에서 본 정보를 떠올린 백무량은 의아함을 느꼈다.
‘그렇게 대단했던 문파가 왜 명맥이 끊긴 걸까?’
그곳이라면 칠성교에 대한 정보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백무량은 두 가지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다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일단은 분광뇌운결부터 가르쳐 볼까.”
백무량의 발걸음이 연무장으로 향했다.
***
“하압, 합!”
연신 기합성이 울리고 있는 곤륜파 연무장.
그곳에서 현종휘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게 뭐야!’
칠성교와 마주한 뒤로 무공을 자연스럽게 펼치기가 어려웠다.
현종휘가 눈을 꾹 감았다.
‘자꾸, 자꾸 그놈이 달려들잖아!’
사자탈 아래에서 보법을 펼치던 칠성교도.
현종휘가 검법을 펼칠 때마다 그놈이 재빠르게 달려드는 환영이 보였다. 백무량이 들었다면 깜짝 놀랄 일이었다.
심상 수련.
면벽을 삼 년 이상 한 도사일지라도 심상을 떠올리기가 어려운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현종휘는 칠성교도가 달려들었던 충격으로 인해 심상이 열려 있었다.
그것을 조절할 수만 있다면 도사에게 있어 엄청난 기연인 셈이었다.
‘현사조님께 말하면 해답을 알려 주시겠지?’
검을 수습한 현종휘가 연무장 출구로 향하던 그때.
“어딜 그렇게 바삐 가느냐?”
어느새 다가온 백무량이 현종휘의 손목을 붙잡았다.
현종휘는 환한 웃음으로 백무량을 반겼다.
“마침 사형을 찾으러 가는 길이었어요.”
“왜?”
“그게, 호광성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 자꾸 마인이 달려드는 환영이 보여서요.”
“환영이?”
백무량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것을 본 현종휘가 지레 겁을 먹었다.
“아니, 그게, 제가 겁이 많긴 한데 헛것을 보진 않거든요. 근데 검법을 펼칠 때마다 자꾸 나타나서…….”
“없애려는 노력은 해 보았느냐?”
“‘사라져!’라고 외치니까 오히려, 제가 부끄러워서요.”
“사라지진 않았단 뜻이렷다?”
“……네.”
현종휘의 대답을 들은 백무량이 철유를 불렀다.
“오늘부터 사흘 동안 나한테 분광뇌운결을 배울 테니까, 매일 세 시진은 비워 두어라. 알겠느냐?”
“예!”
철유가 힘 있게 대답했다. 하지만 현종휘는 그렇지 못했다.
자꾸만 튀어나오는 환영이 수련을 방해할 것만 같았다.
그 기색을 알아차린 백무량이 씨익 웃었다.
“너무 걱정 하지 마라. 오히려 그 환영 덕분에 더 빨리 배울 수 있을 테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도통 모르겠어요.”
“나만 믿어라.”
백무량이 주먹으로 가슴팍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