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자 (1)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청노는 괴성을 처음으로 꾸짖었다.
백무량을 공격할 건 알았지만, 호광성 시장 한복판에서 화려하게 일을 벌일 줄은 몰랐던 탓이다.
이에 괴성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그놈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건데.”
“최선을 다해서 정체를 드러냈지. 칠성교의 반점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대체 어떡하려고 그랬느냐?”
“없을 거야. 이번에 소림사가 관련되지 않았잖아.”
“아두(阿頭)야, 곤륜파가 우리와 싸웠던 문파임은 잊었느냐?”
아두라는 단어에 괴성이 주먹을 꽉 쥐었다.
“아두는 말이 심하잖아!”
“어리석고 생각이 터무니없이 짧으면 아두나 마찬가지지.”
청노는 괴성에게 음산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일을 벌이는 건 좋지만, 교단의 정체가 드러나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백련교를 사칭하고 있단 사실은 더더욱…… 알겠느냐?”
“나도 알아. 그러니까, 그만해.”
괴성의 눈가가 축축해졌다.
무림맹의 무인에게 회수되던 두 무인의 시신.
칠성교인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괴성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었다.
그 기색을 알아차린 청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서 괴성을 더 자극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무계봉신술을 아군에게 쓸 수도 없고.’
한숨을 푹 내쉰 청노가 괴성에게 나가라고 손짓했다.
괴성이 벌인 짓을 자신과 성화가 해결할 판국이었다.
***
이른 아침, 무림맹.
남궁진은 책상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콰지직!
흑단으로 마감된 책상이 무너지며 수많은 파편이 무림맹주실 바닥에 떨어져나갔다.
그럼에도 남궁진의 화는 풀리지 않았다.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시체가 갑자기 사라졌다고?”
“그, 그게…… 그곳을 지키는 무인들이 입을 모아서…….”
무림맹 이군사, 모용청이 말을 더듬었다.
그 모습이 마치 오들오들 떠는 토끼처럼 보여서, 남궁진은 모용청을 끔찍한 오물을 보듯이 했다.
“자네가 왜 일군사를 뛰어넘지 못하는 줄 아나? 지금처럼 책임을 지고 간언할 자리에서 그딴 작태나 보이고 있으니 누구에게 신뢰를 받겠느냔 말이야!”
머리는 제갈후 이상으로 비상하고, 꾀의 심도는 모용청을 오랑캐라고 무시할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
불리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모용청은 끔찍한 말더듬이가 되곤 했다. 군사가 평정심을 유지하기는커녕 지켜보는 사람들까지 불안하게 만드는 재주를 가졌다.
그를 수족처럼 다뤄야 하는 남궁진에겐 참으로 계륵.
‘위기만 아니면 일군사 이상의 역량을 가졌거늘.’
마음이 언짢아진 남궁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대로 시신을 놓친다면 우리에게 맡긴 곤륜파가 무슨 말을 하겠나?”
“좋은 소리는 나오지 않겠지요.”
“무림맹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질 걸세. 의심하는 사람이 많이 생기겠지.”
남궁진의 미간이 좁아졌다.
“무려 곤륜신성, 후기지수가 넘긴 마인의 시신을 빼앗겼다. 그걸 보고도 혀 한번 차지 않을 무인이 어디 있겠나?”
“…….”
“반드시 되찾아 와야 해.”
“알겠습니다.”
정신을 다잡은 모용청이 명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단 호광성에 출입한 상단부터 확인하겠습니다.”
“상단?”
“시신을 감추고 이동할 수단이라면 수레밖에 없습니다. 성문을 타고 움직였다가는 반드시 누군가에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흐음.”
침음 흘린 남궁진이 모용청에게 물었다.
“호광성을 왕래하는 상단이 어디 한둘이던가? 게다가 관부가 우리에게 정보를 넘길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데…….”
모용청이 히죽 웃었다.
“시신에 화약을 숨겼다고 합시다.”
“자칫 잘못하면 불똥이 튀지 않겠나?”
“왜 튑니까, 진실인데.”
남궁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이런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의원에게 이야기해 추종향을 뿌린 화약 주머니를 복부에 꿰매 넣었습니다.”
모용청은 자기가 했던 이야기를 되짚었다.
“시체가 갑자기 사라졌다고 했지, 찾을 방법이 없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아! 그런데 진즉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남궁진의 고함에 모용청이 다시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맹주님께서 알다시피…….”
“됐네. 지금 당장 출발하지. 추종향을 추적할 매는 미리 준비해 두었나?”
“물론이지요.”
모용청이 소리 없이 웃었다.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을 놈들을 뒤쫓읍시다.”
관부와 무림.
천하의 두 세력에 동시에 쫓기는 기분은 어떠할까.
모용청은 확신했다.
“이번에야말로 그들을 생포할 기회입니다.”
“그래야지.”
남궁진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걸음을 내디뎠다.
같은 시각.
시신을 천으로 뒤덮은 무리가 호광성 성문을 통과했다.
순전히 행운이었다.
하필이면 오늘따라 줄이 짧았고, 성문대장이 잠을 자지 못해 검문이 손쉽게 끝났다.
“이대로 호광성 밖으로 나가면 우릴 찾지 못할 것이다!”
시신에 추종향이 있는지도 모른 채, 마인들은 성공을 자축하는 분위기였다.
두 고수가 등장하지만 않았다면 그러했을 것이다.
쿵!
허공에서 등장한 두 노인이 마인들을 굽어보았다.
“흥, 어디서 시체 썩는 냄새가 나길래 와 봤더니…… 백련교도였느냐?”
검은색 무복을 차려입은 노인.
흑마의 살기에 마인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살기가 마치 그물처럼 엮여져,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같은 마인 주제에 편을 가르는 게냐?”
한 마인이 비아냥거리자 흑마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갈라야지. 너 같은 놈과 같은 마인 취급 받기는 싫거든.”
“알량한 무공 하나만을 믿고 나대는구나!”
“하면 너희는 남을 믿느냐?”
흑마가 고개를 내저었다. 만일 자신이 마공을 독자적으로 익히지 않고 마교에 입문했다면 저런 꼴이었을 터였다.
‘끔찍하군.’
교리를 광신하여 한낱 인간을 신으로 칭한다.
그것이 얼마나 우스운 짓거리인가.
흑마가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시신을 가리던 천이 옆으로 치워졌다.
“뭘 숨기나 했더니 사내놈 둘이군.”
“죽여라!”
마인들의 외침에 흑마가 백귀를 곁눈질했다.
흑마가 검은 무복이라면, 백귀는 하얀 무복.
그가 한차례 몸을 털자 한낮임에도 보름달이 뜬 것처럼 보였다.
스걱!
백귀의 조공을 피하지 못한 마인들이 모두 죽어 나갔다.
만마교단에 속한 마인이 대부분 일류 이상임을 생각하면, 백귀의 경지는 최소한 성강 이상이었다.
다만 그것을 지켜보는 흑마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평범하게 흙이나 만지면서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요안의 남자에 의해 몸을 개조당하고, 무림사에 연루되다 백귀라는 악명을 떨치고 말았다.
금분세수는 이미 늦었다.
백귀에게 남은 것은 이제 복수였다.
“형님, 이 시체들은 어떻게 할까?”
“그대로 둬라.”
“우리가 묻어 두는 게 낫지 않나?”
“주인이 있는 것 같으니까.”
흑마가 수레에서 등을 돌렸다.
무슨 짓을 해 놨는지 몰라도 시신 안쪽에서 추종향 냄새가 진동했다.
‘괜히 건드렸다가 흔적을 남겨선 안 될 일이지.’
흑마가 신법을 펼치자 백귀도 전력을 다해 쫓아갔다.
그렇게 일다경이 지나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뒤늦게 도착한 남궁진과 청룡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시체를 훔쳤던 마인들이 죽었고, 수레는 그대로 남아 있다.
남궁진의 시선이 수레에 남은 상처 자국으로 향했다.
“조공의 고수라…….”
인간의 피육은 물론, 나무까지 파헤칠 정도면 정파의 무공은 아니었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생각을 정리한 남궁진은 무인들에게 지시했다.
“시신을 챙겨라.”
“마인들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놈들도 같이 수습하거라. 같은 패거리인지 조사해야겠다.”
“예!”
무림맹의 무인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
며칠 뒤.
백무량은 철유를 위시한 사제들과 함께 곤륜산맥에 흩어져 있는 암자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이 맺혔다.
‘너무 방치했구나.’
토대는 칠십여 년 전 그대로인데, 그 세월 동안 관리받지 못해 폐가가 되어 버린 암자들.
백무량은 그걸 볼 때마다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반쯤 무너졌을지언정 암자마다 사소한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 내가 가 봤던 곳이네.’
매번 동문과 싸웠다가 사부에게 면벽형에 처해졌던가.
그때는 사부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웠거늘, 지금 생각하면 그 면벽의 시간이 있었기에 심상을 이만큼 구축할 수 있었다.
[검해는 마(魔)와 싸우기 위해 곤륜파의 개파조사께서 만든 영성이요, 심상에 기거하는 무학(武學)이다.]
심천의 노인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
심상을 키우지 못했다면 검해가 깃들지 않았을 터였다.
백무량은 자연스럽게 다른 의문을 품었다.
‘내가 되살아난 것도 검해 덕택이었을까?’
칠성교가 급습한 이래로, 백무량은 때때로 주백천이 말한 천명이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평소였다면 무슨 꿈을 꾸냐며 넘겼겠지만, 칠성교의 무인이 꼭 집어서 자신을 급습한 것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사실 이어지는 부분이 없잖아 있었다.
천기를 읽고 안배를 남긴 사형, 주백천.
마와 싸우기 위해서 만들어진 영성, 검해.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선기에 강하게 반응하는 운룡.
그 세 가지가 모두 깃든 게 현재의 백무량이었다.
‘영웅담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지.’
백무량은 피식 웃었다.
어릴 때 영웅담을 들으면 그렇게 되고 싶다 생각했는데, 막상 그렇게 되니 몸과 정신이 괴로웠다.
너무 요구하는 게 많았다.
사문도 되살려야 하지, 준동하는 마교도 막아야 하지, 개인의 성취 또한 놓치면 안 된다.
백무량의 입가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만큼 굴렸으면 슬슬 나타날 때도 되지 않았소, 사형.’
거한이 말을 전하기를, 이십칠 대 제자 주연호.
사형의 종질로서 뒤늦게 입문한 곤륜도였다. 낯을 워낙 가리는지라 백무량과 친해질 기회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주연호가 백무량을 피했다.
‘……그때는 내 소문이 조금 흉흉하긴 했지.’
무공보다는 도경에 관심이 지대하여 주백천을 사부로 따르던 아이였다.
한데 그 주연호가 자신에게 암자를 살피란 말을 남기다니.
백무량은 그것이 우스웠다.
‘짜식이, 직접 찾아와서 인사를 올리진 못할망정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기는.’
무언가 사정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리움이 컸다.
칠십여 년 전의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필요했다.
백무량은 그것이 주연호라고 생각했다.
‘사형보다는 만나기 쉽겠지.’
아쉬움을 애써 털어 낸 백무량이 지도를 바라보았다.
며칠 동안 사제들이 부단히 돌아다녀서 곤륜파를 중심으로 많은 암자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시간을 많이 아낀 셈이다.
희희낙락한 백무량은 지도를 품 안에 넣었다.
‘앞으로 사나흘 뒤에 최적의 동선을 짜서 움직이면 되겠군.’
계획을 마친 백무량이 처소로 돌아가려던 그때.
“장문인께서 자기보다 먼저 소협을 설득하라고 해서 말이네.”
“……?”
백무량은 고개를 돌렸다. 수염을 곱게 기른 노인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형적인 범의 상이다.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경무안가(輕武岸家)의 안서백(岸西伯)이라고 하네.”
안서백이라…….
백무량은 송우현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가문의 무공만으로 청해제일검이라고 불렸던가?’
그것이 운산보가 패자이던 시절부터였다고 들었다.
백무량은 턱을 들었다.
“비무를 신청해도 되겠습니까?”
“……성격이 급한 후배로군.”
안서백이 수염을 매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