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무지회 (3)
다음 날.
백무량은 아침을 간단하게 먹었다. 별 뜻은 없었다. 속이 비어 있어야 검무를 제대로 펼칠 수 있으리란 생각이었다.
뒤이어 객잔을 나서려고 할 때.
조윤이 백무량에게 묘한 말을 남겼다.
“무림맹으로 가십니까?”
“연무지회가 있으니까요.”
“가면 반가운 얼굴이 있을 겁니다.”
‘반가운 얼굴?’
구파일방의 장로 중에 백무량이 아는 얼굴이 있던가?
백무량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중요한 자리로 향하는데 의문이 남아선 안 될 일이었다.
“누굽니까?”
“비밀을 지켜 달란 부탁을 받아서 말입니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처음부터 말을 하지를 말지…….’
불만이 속에서 울컥거렸지만, 백무량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아예 모르고 가는 것보단 낫다. 백무량의 머릿속에서 여러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대부분 칠십여 년 전의 고수들이다.
‘여전히 나는 칠십여 년 전의 망령이구먼. 빨리 친구를 사귀든 해야겠어.’
백무량은 씁쓸함을 속으로 삼켰다. 사실상 현씨 조손과 송우현을 제외하면 친하게 지내는 이가 없다시피 했다.
당문영도 요즘은 소가주로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 않나.
현종휘가 백무량이 얼른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칭얼거리는 것도 이해가 된다.
‘연무지회가 끝나면 당분간 곤륜산에 박혀 있는 것도 좋겠네.’
사대사헹에서 얻은 깨달음의 실마리를 정리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백무량은 무림맹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연무지회에서 전력을 쏟아 낼 작정이었다.
‘내 전력이 어디까지 닿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백련교도 이화겸을 벤 검.
과거와 현재, 분광뇌운결과 분광검이 합쳐진 뇌화(雷花)를 본다면 구파일방의 장로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백무량은 그것이 궁금했다.
만일 검무를 보고도 억지로 고개를 돌린다면, 구파일방에 있는 미련을 버릴 생각이기도 했다.
‘구파일방의 그릇이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소리니까.’
차라리 구파일방에 속하지 않겠다.
생각을 정리한 백무량이 무림맹 정문으로 다가갔다.
“다들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곧은 어깨와 형형한 눈.
백무량은 무림맹 문지기에게서 긴장과 격동을 읽어 냈다.
‘모두 모인 건가?’
무림맹의 연무장으로 향하면서 백무량은 생각했다.
구파일방의 장로들, 정확하게는 아미와 청성을 제외한 여덟.
천하 무림의 고수가 일곱이나 출입하였으니 문지기의 태도가 평소보다 더욱 엄격했다. 백무량은 피식 웃고 말았다.
‘삼류 무인한테는 그토록 너저분한 말을 주절거리더니.’
열흘 정도 호광성 무림맹에 출입하니 그들의 생리를 알게 되었다.
무림의 강자존.
무공이 만들어진 이래로 늘 유지되던 법식을, 무림맹은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다. 구파일방의 항렬도 무림맹에 있어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무공의 고하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 법칙을 지키기 위해서 오대세가를 중용한 거겠지.’
역사가 깊은 무공을 가진 구파일방과 무림맹을 중심으로 모인 오대세가.
그들의 알력 싸움이 눈에 들어오는 듯해서, 백무량은 주먹을 꽉 쥐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를 견제할 동안 백련교를 멸절시켰다면 이화겸 같은 자가 나타나지 않았을 터인데.
백무량의 속내에 불길이 일었다.
세간에서는 칠십여 년 전의 일이라지만, 백무량에게는 불과 삼사 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 간극이 모순을 만들었다.
모든 이들이 옛일로 치부하는 백련교가, 백무량에게 있어서는 같은 하늘 아래에 있어선 안 될 원수였다.
‘연무지회 따위는 제쳐두고 이화겸의 행적을 추적하는 게 먼저 아닌가?’
만일 그러했다면, 백무량은 기꺼이 따랐을 것이다.
곤륜파가 구파일방으로 돌아가는 데 십 년이 걸릴지언정 백련교를 쳐부수는 게 먼저니까.
그러나 무림맹과 구파일방은 청성파와 곤륜파의 처분을 우선했다.
그깟 권위, 권력을 위해서.
‘이화겸 같은 마인이 나타나더라도 자기 문파는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겠지.’
근본 없는 자신감에 희생된 게 청성파가 아니던가?
하물며 곤륜파는 어떠한가. 구파일방에게 있어 사문의 역사는 변방의 도문에 불과했던 걸까?
백무량이 품은 불길이 위로 치솟았다. 이까짓 연무지회, 내키는 대로 깽판을 쳐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연무장 입구에 가까워지던 그때.
세 명의 남자가 백무량에게 다가왔다.
“백가야!”
“……송 노야?”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송우현이 이곳에 올 것 같긴 했지만, 옆에 있는 두 남자가 다소 의외였다.
현노윤과 현종휘.
곤륜산에서 있어야 할 두 도사가 긴장감 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백무량은 현노윤에게 물었다.
“장문인, 여기까지는 웬일이십니까?”
“웬이일?”
송우현이 기가 찬다는 듯 백무량의 말꼬리를 붙잡았다.
“너는 곤륜파가 구파일방으로 돌아가는 역사적인 자리에 장문인과 사제를 부르지 않는단 말이냐!”
“……아!”
송우현의 핀잔에 백무량이 깊은 숨을 내뱉었다.
독선이었다. 백무량 자신이야 구파일방의 자리쯤 백련교보다 중요치 않다고 여겼지만, 현씨 조손에게는 아니었다.
수십여 년간의 고독과 굴욕.
그 세월을 보상 받을 자리요, 기회가 바로 연무지회였다.
그곳에 두 조손을 초대하지는 못할망정 연무지회에서 깽판을 부릴 생각을 하다니, 백무량의 낯이 붉어졌다.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백무량은 진심으로 송우현과 현노윤에게 사죄했다. 연무지회 전에 그들과 마주하지 않았다면, 말 못 할 고통을 안겨 줄 뻔했다.
“뭘 그렇게까지 말하냐, 그냥 다음부터 그러지 않으면 되지.”
송우현은 백무량의 어깨를 두드렸다.
여기서 괜히 기를 죽였다가 연무지회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다 문득, 송우현과 백무량이 현노윤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무림맹이구나.”
감회가 어린 얼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듯한 시선.
평생 청해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현노윤에게 있어 무림맹이란, 마음을 아주 복잡하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왜.”
현노윤의 외마디가 백무량의 가슴을 두드렸다.
왜.
대체 왜였을까.
백무량은 입술을 다물었다. 무림맹에 대한 한탄이나, 구파일방의 부정을 떠들기엔 장소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말할 기회는 있었다.
“종휘야.”
“예, 예?”
현노윤의 등을 바라보고 있던 현종휘가 말을 더듬었다. 무언가 말을 꺼낼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탓이다.
하지만 백무량은 이때야말로 현종휘에게 가르침을 내릴 자리라고 생각했다.
“구파일방의 장로들은 어떻더냐?”
“……그야 강했죠. 나이도 많고, 위엄도 상당하고. 옷차림을 보니 잘사는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현종휘의 솔직한 대답에 백무량은 연무장 안쪽을 쳐다보았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것이냐는 듯, 강맹한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평소라면 짓궂은 장난으로 치부할 수 있었다. 아니, 그랬을 터였다.
후배를 골리는 것이야말로 할 일 없는 장로의 소일거리였으니까.
그것을 여러 번 경험해 본 백무량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씨 조손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 손을 끌어 줄 선배가 없었고, 번듯한 도관에서 도경을 외워 보지도 못했다.
‘곤륜파의 잘못이 그리 컸던가?’
백무량은 자문하고, 조소했다. 잘못이 있기는 했다.
무림에서 마교와 먼저 싸워서 멸문했다는 잘못.
문파를 재건해 줄 부자를 친우로 두지 않은 잘못.
‘청해성에서 그럴 부자가 있었다면 말이지.’
백무량은 고개를 내저었다. 하릴없는 잡념이다. 너무 오래전에 지나가서 색이 바래 버린 과거이기도 했다.
이제 와서 칠십여 년 전을 그들에게 따져 봐야 망령에 씐 후기지수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니까.
백무량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내가 그들에게 무엇을 보여 주는가, 그걸 잘 보아라.”
“무공을요?”
“아니, 전체를.”
그 말을 끝으로 백무량은 세 남자를 지나쳤다.
청명한 하늘, 가까워진 정오, 가슴에 들끓은 정념(情念).
지금이라면 정말로 전념을 다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종남의 목허도장(木虛道長).
개방의 무영개(無影丐).
화산의 낙매신검(落梅神劍).
점창의 독검군(獨劍君).
공동의 현천신검.
무당의 무의진인(無疑眞人).
소림의 공저대사(空貯大士).
곤륜의 빈자리를 꿰찼던 황산파의 통천옹(通天翁).
무려 여덟 고수가 무림맹의 연무장에 자리하고 있었다.
특히 현천신검 척준환은 강호십대고수이자 공동파의 현 장문인이고, 통천옹은 황산파의 전대 장문인이다.
이에 통천옹이 척준환이 물었다.
“허허, 이 사람아, 아끼는 후배 하나 보겠다고 공무를 팽개치고 여기까지 온 겐가?”
“아끼는 후배라니요. 반쯤 제자나 마찬가지지요.”
“그게 무슨 말인가?”
“의도치 않았지만, 제 무공 중 하나를 배웠으니 제자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백무량이 고성진에게 배운 현천신장.
몇 초식에 불과하지만 백무량은 공동파의 절학을 가진 셈이다.
척준환의 웃음을 본 독검군이 인상을 한가득 찌푸렸다.
“곤륜파는 좋겠소. 자기편을 들어 줄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있는 셈이니.”
독검군의 가시 돋친 말에 척준환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보나 마나 예전에 패배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분을 삭이고 있을 터였다.
‘비아냥거리면 무량이한테 화풀이하겠지?’
척준환이 침묵하자 독검군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현천신검께서 입을 꾹 다무는 걸 보아, 곤륜파를 우방으로 삼은 모양이오?”
“우방이라니, 같은 강서의 도문이거늘.”
척준환의 대답에 독검군이 입술을 비틀었다.
“우방은 아니겠군. 삼 년 전부터 잘 꼬드겼을 테니까.”
“뭐라?”
척준환이 인상을 찌푸렸다.
독검군의 말은 곤륜파를 하수로 보는 것과 동시에 공동파의 명예를 깎아내리는 수작이었다.
하지만 다른 장로도 독검군에게 일정 공감하는 것 같았다.
개방의 무영개가 그러했다.
“틀린 말은 아니잖냐. 구파일방이었다고는 하나 겨우 셋에 불과했던 문파가 삼 년 만에 금의환향했으니, 공동파의 입김이 없다곤 할 수 없지.”
킁킁, 무영개가 코를 벌름거리며 척준환을 곁눈질했다.
그 시선에 척준환은 무영개의 말투를 지적했다.
“공적인 자리에서 왜 반말이오?”
“나이를 더 먹고 찾아오든가. 그땐 관에 있을 테니까, 겸사겸사 제사도 치러 주고.”
“그깟 신법이 몸을 지켜 줄…….”
척준환의 목소리에 열기가 더해지던 그때, 화산파의 장로인 낙매신검이 입을 열었다.
“그만, 그만하시오. 두 사람 다 선을 넘지 마시오.”
“……흥!”
무영개가 아쉽다는 듯 콧김을 씩씩거렸다.
척준환은 그제야 무영개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내가 장문인이니까 일부러 무례하게 굴어서 나중에 문제로 삼겠다, 이건가?’
무영개가 개방의 장로이긴 하나, 개방파의 공무에는 완전히 멀어진 지 오래.
어딜 봐도 현재 장문인인 척준환이 손해였다.
척준환이 혀를 차는 사이, 무당의 무의진인과 공저대사가 대화했다.
“그나저나 무림맹에 도착했다는 그 후배는 언제 오는 거요?”
“기다립시다. 긴장되지 않겠습니까?”
그 대화를 들은 독검군이 인상을 찌푸렸다.
“언제까지 기다릴 순 없소! 그놈도 꽤나 고수라니 기세를 흩뿌리면 빨리 오겠지!”
“그거 좋군.”
독검군의 말에 찬성한 무영개가 먼저 취팔선공을 운용했다.
이에 독검군 또한 태을심법의 내력을 바깥으로 끌어 올렸다. 점창파 특유의 날카로운 기세가 연무장 곳곳을 누볐다.
척준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후배에게 너무하는군.”
“흥, 이것마저 못 이겨 낸다면 연무지회는 취소해야지.”
무영개의 대꾸에 척준환이 눈을 크게 떴다.
만일 이로 인해 백무량이 다친다면 곧바로 멱살부터 잡을 생각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음?”
두 장로가 내뿜은 기세에도 아무렇지 않게 복도를 유유자적 가로지르는 그림자가 있었다.
곤륜신성 백무량.
근래 소문이 자자한 후기지수의 등장에 여덟 고수가 시선을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