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96화 (96/275)

연무지회 (2)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노도사의 눈주름이 찌그러졌다.

스르릉!

도사라기엔 너무나도 살기가 짖은 일초.

순식간에 검을 뽑아 든 노도사가 앞으로 짓쳐 들었다. 멀리서 백무량을 지켜보던 상인이 앗, 하고 헛숨을 삼켰다.

나이가 지긋한 도사가 저런 식으로 공격할 줄 몰랐을 터였다.

하지만 백무량은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

‘도사라고 해서 언제나 겸허하진 않은 법이지.’

칠십여 년 전에도 백무량은 상대방을 도발해서 싸우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건 노도사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카가강!

뒤늦게 뽑힌 백선신검이 노도사의 검을 빗겨 냈다.

칼날이 서로 부딪침에 불똥이 하늘을 수놓고, 뜨거운 열기가 두 검객의 뺨을 덥혔다.

백무량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후회하지 않겠나?”

노도사에겐 명명백백히 조롱처럼 보였다.

“물론!”

노도사의 검세가 물처럼 흘렀다. 삼십 년 동안 축적한 내공이 썰물처럼 흘러나오며 검기를 이뤘다. 상대를 해하기 위한 살초가 가감 없이 펼쳐졌다.

백무량이 익히 아는 검법이었다.

분광검.

그것도 곤륜파만의 분광검이 아니라, 평범한 분광검이라.

‘조롱에는 조롱으로 받아치겠다?’

백무량은 우스워서 껄껄 웃고 말았다.

고깝게 여기기엔 수준 차이가 너무 컸다.

콰르르……!

분광검과 분광검이 부딪친다. 뇌기를 띤 내공이 서로를 밀어내고 붙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교환된 초식이 이십 초.

노도사의 손목이 크게 부어올랐다.

“무슨 놈의 검력(劍力)이……!”

“삼 년 전에 도전했어도 똑같았을 테니 아쉬워하지 마라.”

“놈!”

한쪽 인상을 찡그린 도사가 다시 몸을 부딪쳐 왔다. 하지만 첫 초식의 기세는 없었다. 이십 초를 교환하면서 근육이 찢어지고 손목에 크게 무리가 갔을 터였다.

이 모두 백무량이 의도한 것이었다.

“졌다고 시인할 때까지.”

“……?”

“공격하지 않고 받아 주겠다.”

백무량의 말에 노도사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검을 마주하기 전이었다면 괜한 허세를 부리지 말라고 꾸짖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빠드득.

뼈가 부딪치는 소리가 노도사의 몸속에서 울렸다. 검을 부딪치다가 손목뼈가 어긋난 것 같았다.

힘의 방향을 자기 마음대로 흘리고 있다는 뜻이다.

이를 뒤늦게 깨달은 노도사가 뒤로 물러났다.

“허억, 헉.”

숨을 고르는 노도사에게 백무량은 물었다.

“졌다고 시인하지 그래.”

“너 따위에게…….”

“언제 공손해질지 볼까.”

백무량은 노도사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언제든 공격해 보라는 듯 상단세를 취하지도 않았다.

그걸 본 노도사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모욕당한 분노를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보였지만, 그저 우스웠다.

‘곤륜파를 무림맹의 개처럼 말한 건 생각하지도 않는군.’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구파일방의 장로들을 승복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노도사는 좋은 교보재였으니까, 시험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백무량은 노도사에게 삼 보 가까이 다가갔다.

“이래도 공격하지 않을 텐가?”

“갈!”

불시의 일격이 백무량의 가슴팍을 향했다. 아무래도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가 날린 것 같았다.

그러나 이화겸의 권장술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

속도는 물론이요, 현묘함이나 기괴망측한 느낌도 없었다.

쩌엉!

백무량은 일검에 노도사의 검을 쳐 냈다.

“크윽!”

검을 붙잡고 있던 노도사의 오른손에서 핏물이 흘렀다. 놓치지만 않았을 뿐, 더는 휘두를 수 없었다.

아예 무인이기를 포기한다면 모를까.

백무량은 무심한 눈으로 노도사를 재촉했다. 더 싸울 것이냐는 물음과 그만한 각오가 되었냐는 꾸짖음이 뒤섞였다.

“너 같은, 네놈에게…….”

신음과 같은 웅얼거림이 노도사의 입가에서 줄줄이 샜다.

의도는 뻔했다.

‘내가 화라도 내길 바라는 거냐?’

곤륜신성이 무력화된 노도사를 벤다.

그 사실이 강호에 알려진다면 연무지회가 물거품이 되고, 곤륜파의 명예도 떨어질 터였다.

노도사의 방식에 질린 백무량은 진심으로 한탄했다.

“그렇게까지 밑바닥이었나?”

“…….”

나이 어린 도사의 일침이 노도사를 충격에 빠트린 걸까.

한참 동안 침묵한 노도사가 아랫입술을 씹었다. 메마른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내가 졌다.”

노도사의 건조한 목소리에서 짙은 패배감이 느껴졌다.

어딘가 텅 빈 눈동자가 백무량에게 향했다.

“이제 만족하느냐?”

“곤륜도를 사칭하고, 먼저 다가와서 욕을 하고, 이제는 나를 나쁜 놈으로 만드는군.”

“…….”

“도의를 배운 사람이라면 저열한 짓은 이제 그만하시오, 방금은 정말 구역질이 나올 뻔했으니까.”

노도사에게 혀를 내두른 백무량은 자신을 지켜보는 상인에게 걸어갔다.

그렇게 십 보쯤 되었을까.

백무량의 귓전에 낮은 목소리가 닿았다.

“다시는…… 다시는 눈에 띄지 않겠네. 추한 모습을 보여서 미안하네.”

‘저게 끝이란 말인가.’

백무량은 진정으로 피곤해졌다.

강호 변방의 노도사가 저러할진대, 구파일방의 장로들은 대체 어떨 것인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연무지회가 왠지 모르게 두려워졌다.

***

아미복호검을 받아든 백무량은 곧장 아미산으로 향했다.

노도사와의 일전으로 몹시 피곤할뿐더러, 일몰이 다가오고 있었다.

해가 지고 나서 도착한다면 공격해 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봉문한 걸까?’

백련교도가 침입한 것이라 내심 확신하고 있었지만, 억지로 들어갈 순 없었다.

얻어맞을 짓을 했던 청성파와는 다르게 아미파는 아직 인연이 없다시피 했으니까.

백무량의 시선이 품 안에 있는 아미복호검으로 향했다.

‘이게 인연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몰려오는 긴장감을 뿌리친 백무량이 아미파 정문을 향해 외쳤다.

“나는 곤륜도 백무량이라고 하오! 봉문 중인 것은 알고 있으나, 아미복호검이라는 옛 비급을 발견하여 돌려주고자 하오!”

백무량의 외침에 아미파 안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렸다.

비급과 기록을 살펴보라는 명령 혹은 열어도 되냐는 물음.

정상은 아니었다.

사문의 비급을 돌려받는데, 진위를 가리거나 사람을 경계할 필요가 없었다.

하물며 자신은 곤륜도임을 밝히지 않았나.

일다경을 기다린 백무량이 다시금 외쳤다.

“출신이 의심스럽거든 무림맹에 전서구를 보내 보시오! 이틀 동안 성도에서 지내고 있을 터이니.”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낭랑한 목소리가 문 안쪽에서 들려왔다.

백무량의 인상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

“아미복호검이 필요 없다는 거요?”

“아니요. 본 파의 비급이 맞아요.”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백무량의 숨이 순간 턱 막혔다.

“하면 왜…….”

“반갑게 맞이하고 싶지만, 지금은 열어 드릴 수가 없네요.”

“백련교도가 공격했소?”

“……그건 밝힐 수 없어요.”

잠시 침묵한 뒤,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청성파에 조의를 표한다고 전해 주세요. 장문인께서 부탁하신 거예요.”

“연무지회는 어떻게 하시겠소?”

“저희가 보지도 않고 어떻게 대협의 무공을 판단하겠어요? 편을 들어 주길 바라시는 건가요?”

그 말과 동시에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문 아래로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그녀 말고도 다른 도사들이 있는 듯했다.

백무량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어졌다.

무언가 변명을 하려던 그때 그녀가 하려던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럴게요.”

“……예?”

“청성파에서 있었던 불의를 해결하신 게 대협이시잖아요. 사대사행을 돌파했으니 청성파의 개파조사가 남긴 의지를 수습하기도 한 셈이지요.”

문 너머에서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백무량은 자연스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인이라면 호흡이 부족할 리가 없으니까.

그 의문을 이어 가려던 찰나에 그녀가 아미파의 뜻을 밝혔다.

“아미파는 곤륜파가 구파일방으로 복귀하길 바라요. 봉문 중인 본 파를 대신하여 청성파를 도와주기도 바라고요.”

“평범한 제자가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혹시 장문인이십니까?”

“…….”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백무량은 속으로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아까는 장문인께서 부탁했다고 말하더니만, 장문인이 아니고서야 말할 수 없는 걸 말하면 어떡하란 거지?’

아미파는 곤륜파의 편을 들겠다.

그런 이야기를 제자가 할 리가 없었다. 장로 또한 문파 전체의 뜻을 대신할 수 없었다.

답은 오직 하나.

그녀가 아미파의 장문인인 정혜신니(淨慧神尼)란 뜻이다.

“…….”

“…….”

계속된 침묵을 깬 건 백무량이었다.

“오늘 일은 잊겠습니다.”

“……호의는 감사히 받아들이겠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정혜신니가 창피해서 울 리가 없으니, 아미파의 도사들이 웃음을 참는 것 같았다.

“일이 정리되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동안 아미복호검은 잘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곤륜신성이라고 했나?”

“예.”

“……잊지 않겠네.”

‘대체 무엇을?’

백무량은 턱까지 차오른 되물음을 짓눌렀다.

‘칠십여 년 전에는 여걸(女傑)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강호에서 말하기를, 구천검 백무량과 아미파의 도사는 건드리지 말라고 했었다.

그때의 아미파 도사들의 성격이 백무량만큼 걸걸했다는 뜻이다.

한데 지금 아미파의 반응을 보자니 예전과는 상당히 달라진 모양이었다.

‘그래도 곤륜파 아래에 있는 도문이니 신경은 써야겠지.’

생각을 정리한 백무량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 가 보겠습니다.”

“무림맹에는 전서구를 보내겠네. 그동안 침묵하게 된 연유도 연무지회에서 들을 수 있을 것이야.”

“감사합니다.”

백무량은 정혜신니를 향해 두 손을 모아 올렸다.

정혜신니가 보지 못한다고 한들, 예의는 갖추어야 한다. 오래전에 주백천이 누누이 강조하던 가르침이었다.

그러고는 등을 돌려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백무량이 아미파에서 한참 멀어진 그때.

“소문과는 다르게 예의가 바른 후배로고.”

정혜신니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십삼 일 뒤.

백무량은 제갈후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내일 어디로 가면 됩니까?”

“정오에 무림맹 연무장으로 나오게. 봉문 중인 아미파를 제외한 일곱 문파의 장로들이 나올 걸세.”

청성파는 외유 중인 장로조차 없었다며, 제갈후가 말을 덧붙였다.

이에 대해선 백무량도 들은 바가 있었다.

“청성파의 속가제자끼리 싸움이 붙었다고 들었습니다.”

“……호랑이가 죽으니 여우들이 다투는 꼴이지. 이번 연무지회가 끝나면 무림맹에서 대처할 터이니 걱정하지 말게.”

그렇게 말하는 제갈후의 표정이 몹시 진중했다.

하기야, 이런 일을 중재하기 위해 무림맹이 존재하지 않던가.

쌓아 둔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선 행동이 바빠지는 법이다.

백무량은 사천성에서 봤던 도사들을 떠올렸다.

하나같이 시기와 질투에 찌든 족속들이었다.

‘그들끼리 싸운다 이거지?’

뭐니 뭐니 해도 하수끼리의 싸움이 제일 재밌거늘.

연무지회로 인해 보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쉬웠다.

백무량은 제갈후에게 은근슬쩍 자기 뜻을 밝혔다.

“자기들끼리 싸워 봐야 제 발언이 제일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속가제자는 운산보의 일에 대해서 모르니, 자네의 말을 무엇이든 신뢰하겠지.”

제갈후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사실상 백무량의 발언으로 끝나는 싸움이었다.

청성파의 장문인이 유언을 남겼다. 다음 대의 장문인은 누구다, 이렇게만 말하면 끝이었다.

백무량은 한차례 껄껄 웃고는 검을 매만졌다.

‘연무지회라…….’

구파일방의 장로들과 마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