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무지회 (4)
저벅, 저벅, 뚝.
연무장 중앙에 선 백무량이 장로들과 시선을 마주했다.
여러 감정이 담긴 복잡한 눈빛.
그것과 마주한 독검군과 무영개가 내력을 거뒀다. 백무량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
하지만 백무량은 입술을 달싹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검을 잡는다.
검무로 보여 주겠다는 것처럼.
“뭐지?”
“곤륜도는 구파일방의 장로에게 인사 하나 없는가?”
처음부터 트집을 잡으려던 두 장로가 백무량을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다른 장로들 또한 백무량에게 의아해하고 있었다.
으레 하는 인사나 겸양이 없었으니까.
단지 삼 년 전에 백무량과 교류가 있었던 척준환만이 어렴풋이.
‘화? 아니, 짜증인가?’
백무량의 저의를 알아차렸다. 그러나 확실하지는 않았기에 척준환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에 기다렸다는 듯이 독검군이 백무량의 태도를 까 댔다.
“저것 보십시오. 긴장했다고 하기엔 너무 예의가 없지 않습니까?”
“……으음.”
백무량에게 선입견 없던 장로들이 독검군의 세 치 혀에 넘어갈 판이다.
척준환이 상황을 초조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후웅.
백무량이 정검세(正劍勢)를 취했다.
백선신검을 두 손으로 잡고, 턱을 당기고, 칼끝을 적의 목으로 향하는 형태.
허공을 매처럼 쏘아보는데, 척준환이 어렴풋이 느꼈던 짜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오스스 소름이 돋아난다.
“허어…….”
“저건.”
차갑고 고요하게, 깊고 어둡게.
백무량의 눈이 심상에 젖어들었다. 연무장이나 장로들을 바라보던 눈동자가 현계를 넘어선 무언가를 향하고 있었다.
백무량을 욕하던 독검군도 입을 꾹 닫았다. 의도치 않은 행동이다. 그저 자연스럽게, 압도되었을 뿐이다.
‘저런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던가?’
척준환은 자신의 석년을 떠올리며 감탄했다.
겨우 열여섯. 성년이긴 하나 어른이라고 할 수 없는 나이에 저런 존재감을 키우다니.
예의범절보다는 개인의 무위를 따지는 장로가 크게 반응했다.
“이곳에 구파의 기재(器才)가 아니었던 자가 없는 걸로 아오만, 저 나이에 저렇게 심유한 눈을 했던 적이 있소?”
무당의 무의진인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심상은 적어도 약관부터 발을 들이기 마련이니까.
어린 나이의 심상 수련은 백치가 될 위험이 크다. 그렇게 배워 온 장로들에게 있어 백무량은 전인미답의 존재였다.
“십 대에 심상을 저렇게까지 구축했을 줄이야.”
목허도장의 감탄에 모두가 동의하는 눈치였다. 척준환은 속으로 웃었다. 자신이 칭찬 받은 것보다 기분이 좋았다.
그때 백무량이 움직였다.
후웅!
살기가 담긴 일검에 여덟 장로가 입을 꾹 다물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전개다.
검무라고 하면 보통 순청한 검로를 이어가며 본신의 무공을 선보이는 자리다. 하지만 백무량의 첫 일검은 살기로 가득했다.
저도 모르게 반응할 정도로…….
파격에 가까운 일검을 선보였던 백무량은 허공을 노려보았다.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오직 그 한 가지만을 위해서.
백무량의 검무에는 무공을 선보이고자 하는 공명심이나 노력이 없었다. 무언가를 반추하는 것 같은 아련함이 있었다.
백련교의 난.
강호는 칠십여 년 전의 일을 잊었으나, 백무량에게는 겨우 삼사 년 전이었다.
그 간극 때문에 한때는 자신을 방랑자로 여기기도 했다.
백무량의 인연.
‘가족과 친우, 얻고자 했고 살고자 했던 모든 것이 칠십여 년 전에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아쉽고 그리웠지만 구천검 백무량과 곤륜신성 백무량의 인생은 달랐다. 간극을 인정하고 새로운 삶을 가꾸어야 도사다운 일생이었다.
그렇지만, 잊어서는 안 된다.
백무량은 검무를 이어 가면서 표정을 바꿨다.
변검을 하듯이 웃고, 울고, 분노하고, 또다시 웃고, 운다.
한 사람의 일생(一生). 백무량은 자신의 지난 생을 검무로 증명하고 있었다.
부모 잃은 고아에서 어린 곤륜도로, 곤륜의 말썽꾸러기에서 강호행을 택한 반항아로, 명성을 얻은 반항아는 곤륜으로 돌아와…….
‘백련교.’
불타오르는 곤륜산과 도덕천존의 상.
비명을 내지르는 동문.
혼란과 공포, 울부짖음이 비산하던 그 자리, 그때.
백무량의 검이 섬뜩한 기광을 발한다. 백련교를 베기 위해 전력 이상을 내던 순간을 검무로 승화한다. 태청신공의 내공이 백선신검에 스미며 검기를 흩뿌린다.
백무량의 발치에 시산혈해가 있을 것 같은 기세.
여덟 장로는 침을 삼키는 것조차 잊은 채 몰두했다. 심지어 꼬투리를 잡으려던 독검군조차도 입술을 가늘게 벌리고 있었다.
저기서 어떻게 실수를 꼬집는단 말인가.
독검군은 저도 모르게 후기지수를 시기할 뻔했다. 백무량의 검무에서 느껴지는 완성도는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다.
‘이곳에 있는 장로들도 저만큼 완성도 있는 검무를 펼치기 어려울 터인데.’
무공과 검무는 별개.
하지만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백무량의 무공은 상궤를 넘었다. 후기지수가 지니고 있을 만한 검이 아니었다.
적어도 백 이상을 베었거나 전장을 겪은 검.
백무량의 검무는 그야말로 처절하고, 참혹했다. 도대체 어떤 인생사를 거쳤기에 저런 검무를 취할 수 있는지 중간에 묻고 싶어질 정도였다.
그것은 다른 장로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과거 철나한이라 불렸던 소림의 공저대사가 주먹을 꽉 쥐고 있을 정도다.
연무장에 있는 모두가 감탄하고 있는 와중에도 백무량은 검무를 멈추지 않았다.
아니, 유일하게 검무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겪었던 감정을 표현하기엔 아직 무공이 부족해.’
운룡대팔식을 완성했다면 보보에 감정이 실렸을 것이고, 구천화우검을 검해로 덧댔다면 검로의 간결함이 더욱 섬뜩했을 것이다.
백무량은 아쉬움을 속으로 짓씹었다. 검무를 취하면서 많은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저녁놀이 드리워지던 곤륜의 하늘.
강호를 주유하는 자신을 걱정하던 사부와 사형.
가끔씩 마주칠 때마다 재밌는 이야기를 나누었던 동문들.
그때의 기억이 백무량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그리움이 없다고 할 순 없었다.
그것을 검무로 모두 승화하지 못해서 너무 아쉽지만.
쿵!
한 걸음. 백무량이 그만큼을 내딛고는 검무를 멈췄다.
이에 척준환이 검무가 끝났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정말로 대단…….”
쿵!
또다시 한 걸음. 척준환이 입을 다물었다. 백무량의 검무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뒤이어서…….
쿵! 쿵!
백무량의 걸음이 연무장에 흔적을 남긴다.
돌을 형편없이 부서뜨리고 나아가는 걸음. 끝을 알 수 없는 강함.
백무량이 회상하는 백련교주의 표상(表象)이다.
“……!”
백무량은 입을 벌리고는 소리 없이 고함을 내질렀다.
여태껏 검무에서 볼 수 없었던 감정적인 동요. 극한의 상황에 내몰린 인간의 모습.
백련교주와 싸우던 순간순간을 떠올리며 백선신검을 부여잡았다.
‘그때는 구천화우검의 진의를 모르고 싸웠지만, 나중에, 언젠가 마주한다면.’
그 일념을 검무에 담아서.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휘둘렀다. 태청신공의 내공이 뇌운으로 분화하며 뇌화가 꽃피운다. 파지직거리는 소리가 연무장을 울렸다.
그럼에도 상대, 백련교주는 꺾이지 않으니.
백무량의 눈이 붉어진다. 어떠한 공격에도 굴하지 않는 대적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이 또한 부족하다.
백련교주와 실제로 마주했던 때 느꼈던 벽은 이보다 더욱 높았다.
백무량의 표정이 끝내 무표정해진다.
죽음.
백무량의 지난 생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스윽, 탁.
검무를 끝낸 백무량이 백선신검을 칼집에 꽂을 때까지,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멀리서 검무를 지켜보던 현노윤은 말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백무량이 살아온 생을 알기에 흘리는 눈물이었다. 백련교의 난은 모르지만 그 힘겨움만큼은 공감할 수 있었다.
현종휘 또한 검무를 보고 마음이 격동한 눈치였다.
그제야 장로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통천옹이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목이 멘 목소리가 연무장을 울렸다.
한동안 침이 입 안을 적시지 못할 만큼 압도적인 검무였다.
커흠, 흠, 헛기침을 한 통천옹이 백무량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떤 무인에게 수학했는가?”
“저곳에 계십니다.”
백무량이 가리킨 곳에는 현씨 조손과 송우현이 있었다.
여덟 장로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곤륜파 장문인의 얼굴을 아직 익히지 못한 데다, 고수라고 할 무인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현노윤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내가 바로 곤륜파 장문인 현노윤이오.”
“공동파 장문인 척준환이 현 장문인께 인사드리오!”
척준환을 시작으로 다른 장로들이 현노윤에게 예를 표했다.
학도사를 경시하는 눈빛은 전혀 없었다.
백무량을 길러 낸 사부일뿐더러 학도사라고 무시했다가는 도가나 불가라고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난 뒤, 독검군이 백무량에게 물었다.
“한데…… 도가의 무인이 펼치는 검무에 그리 살기가 실려서야 되겠나? 특히 중간에 느껴진 처절함과 마지막은 도저히 검무라고 볼 수 없었네.”
처음에는 비아냥거림만 가득했던 독검군도 다소 누그러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의문은 의문이었다.
무공을 보이는 것보단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백무량이 펼친 뇌화 또한 독검군의 의문이었다.
“곤륜파의 무공이 그리 절륜할 줄도 몰랐고 말이지.”
“맞습니다. 장로님 말대로, 저는 한 가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그게 무엇인가?”
백무량은 담담한 표정으로 자기 뜻을 밝혔다.
“내 머리를 짓누르고 허리를 굽히게 만들려는 시간에 백련교를 일소해야 한단 뜻입니다.”
“……!”
“어허, 말이 너무 과하도다!”
이곳에 현노윤이 없었다면 보다 심한 말을 했겠지.
백무량은 현노윤과 시선을 교환했다.
이에 현노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흉심에 남은 말이 있거든 마음껏 하라는 것 같았다.
백무량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을 믿어 주는 사람이 이리도 많았다.
그렇기에, 백무량은 구파일방의 여덟 명에게 말했다.
“이곳에 있는 문파 중에 누가 두 번째 청성파가 될 줄 어떻게 안단 말입니까?”
“허어……!”
“이제 막 발아한 문파가 망발이 심하다!”
“어린 나이에 이룬 성취가 오만함을 부른 건가?”
고성이 일제히 터진다. 검무에 압도되었던 감정보다 백무량이 던진 도발이 불러온 분노가 더욱 큰 듯했다.
백무량은 까닭 없이 웃었다. 진심을 다해서 충고한 건데, 저들은 백련교의 무서움을 알지 못했다.
그때 현노윤이 입을 열었다.
“곤륜파는 수십 년에 걸쳐 백련교와 싸웠던 경험이 있는 문파요. 하물며 이번에는 청성파에 침입한 좌호법과 싸웠지. 그 아이가 하는 이야기를 덮어 놓고 무시할 생각이오?”
“…….”
현노윤의 침착한 물음에 일곱 장로와 한 장문인이 침묵했다.
내심, 자기 문파가 청성파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그건 해남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실이었다.
‘하지만…… 피해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 자문에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침음성과 고요가 흘렀다.
백무량은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그들을 동요시켰다.
“곤륜파는 백련교도와 싸움에 있어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혼자서만 싸우진 않을 겁니다. 힘이 그때보다 쇠했으니까요.”
“……흥.”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 독검군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곤륜파를 밀어낼 명분은 없었다.
앞으로 닥칠 백련교.
그들과 싸움에 있어 곤륜파의 존재는 든든한 대들보이자 조언자였다. 역대 마교와 싸우면서 축적된 경험은 구파일방의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그때 종남의 목허도장이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반대요.”
“왜입니까?”
백무량의 되물음에 목허도장이 한쪽 눈살을 찌푸렸다.
“현 곤륜파의 상태를 보시오. 그들을 구파일방으로 다시 받아들인다면 여러 호사가가 입을 모아 비웃을 거요. 구파일방끼리 논다고 쑥덕거릴 가능성도 크겠지.”
‘……이놈 봐라?’
일부러 곤륜파를 구파일방에서 밀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렇게 말하는 목허도장의 진의가 의심스럽다. 백무량이 입술을 연 그때, 해남의 통천옹이 먼저 말했다.
“이보게.”
멸문한 곤륜파를 대신하여 구파일방에 입성한 해남파.
그곳의 전대 장문인인 통천옹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백무량과 현노윤이 긴장한 사이에 통천옹이 목허도장에게 말했다.
“억지 부리지 말게.”
통천옹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목허도장을 주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