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사행 (4)
청성산이 이화겸에 의해 도탄으로 물든 가운데.
선상인 조윤은 그답지 않게 조급한 표정으로 책상을 두드리고 있었다.
‘연락이 오지 않아.’
조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백무량이 사대사행에 도전하는 동안, 고성진은 조윤에게 매일 오시(午時)에 전서구를 보내기로 하지 않았던가.
첫날을 제외하고 이틀.
고성진에게서 전서구가 오지 않은 나날이었다.
그렇다고 조윤이 가만히 앉아 있던 것도 아니었다.
“보냈던 자는?”
조윤의 말에 옆에 있던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청성산을 자주 왕래하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청성파의 속가제자 출신을 수소문해서 보냈었습니다.”
“으음.”
예삿일이 아니다.
조윤은 남자를 흘낏 바라보았다.
삼 년 전, 백무량이 사천당가와 친교를 맺는 데 성공한 이후 만금상단에서 보낸 무인이었다.
한데 그의 이름만 알 뿐, 살아온 내력을 알아낼 수 없었다.
만금상단주의 시험 혹은 장난이리라.
조윤은 내심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 차분히 대화해야겠다 싶었지만, 그게 지금이 될 줄이야.’
조윤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그것을 본 남자가 가볍게 웃었다.
“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밥값을 하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조윤의 어투가 공손하게 바뀌자 남자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상대를 가늠하려는 눈빛.
상인을 시작한 이래로 매일, 매번 마주한 시선이기에 조윤의 내심은 밝고 맑았다.
“지금까지 편히 노시지 않았습니까. 상단주님께서 보낸 호위이자 감시역인 척, 가끔 의미심장한 말씀도 하셨고요.”
사실, 조윤은 무인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단순한 저울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자기 가치를 자기 입으로 말하게끔.’
조윤은 집요한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남자가 턱을 매만졌다.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척이라니요?”
“상단주님께서는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지요. 대협께서 여기 오신 까닭도 거기 있지 않습니까?”
“…….”
남자가 침묵했다.
조윤은 속으로 쾌재의 미소를 지었다.
“옆에서 삼 년을 보셨으니 아실 겁니다. 곤륜도 백무량이 없어지면 제가 어떻게 강서 무림에서 좌판을 깔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없는 능력이 생기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상단주님께 반품하는 수밖에 없지요.”
어디 한번 해보자는 듯, 조윤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걸 본 남자가 헛웃음을 머금었다. 방금 지었던 웃음보다는 더욱더 짙었고, 전에 보이지 않던 감정이 보였다.
가소로움 혹은 분노인가.
조윤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적어도 나를 가늠해 보려는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나.’
무인은 결국 무인.
상인에게 심리전에서 이길 순 없는 법이다.
과거에 감우상인 송우현이 호광성의 명문 무가들의 목줄을 휘어잡았듯이.
조윤 또한 그러할 능력이 있었다. 하물며 무가가 아니라 일개 개인이라면 더더욱 쉬웠다.
“때를 놓치면 삼 년 동안 개척한 상로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갈 겁니다, 대협. 상단주님께선 아마 저를 지키라고 하셨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닙니다.”
“…….”
남자가 말없이 자기 머리를 매만졌다.
일이 자기 마음대로 풀리지 않아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는 게 아이의 투정처럼 보였다.
그러고 나서야 남자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적당히 엉덩이만 뭉개고 있으면 안 되나?”
지금까지 이지적으로 보였던 남자와는 다른 모습.
조윤의 표정이 순간 경직되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어차피 강서 무림이라고 해 봐야 작은 시장이잖나. 사천당가와의 우호만 잘 유지하면 되지.”
“그 우호를 누가 가져왔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곤륜파의 대사형이자 곤륜신성 백무량.
그가 없으면 지금의 성세는 유지할 수 없다.
조윤이 강하게 주장하자 남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가 고수였다면 설명할 필요가 없을 텐데.”
“……?”
“하늘을 봐라.”
‘무슨 변명을 하려고…….’
속으로 구시렁거린 조윤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평소처럼 청명할 뿐.
다른 기류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의 시선에는 다른 하늘이었다.
“내 팔자에 역마살이 끼어 천하를 돌아다녔지만, 내 평생 저런 건 처음 본단 말이다.”
남자, 적성검(赤星劍)은 살갗이 짓무를 정도로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암운.
청성산을 중심으로 어두운 기류가 휘돌았다.
그러나 조윤의 의지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게 뭐 어떻다는 겁니까?”
설령 적성검과 같은 시야를 보았다고 한들 달라지지 않을 정신이었다.
조윤은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떠올렸다.
“사천당가와 곤륜파, 무림맹에 청성산의 침묵을 알린 다음…….”
“다음?”
“우리가 직접 갑시다.”
“……!”
적성검이 고개를 강하게 내저었다. 미쳤다고 사지에 발을 들이냐는 감정이 절실하게 묻어 나왔다.
그러나 조윤에게도 간절함이 있었다.
“백무량이 우리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계시지요?”
“그게 뭐?”
“이번 기회에 마음을 삽시다.”
조윤은 곧바로 청성산 지도를 꺼냈다.
“싼 가격으로.”
“나, 나는 못 가.”
적성검의 대답을 조윤은 가볍게 무시했다.
***
“음.”
백무량은 눈을 떴다.
오랫동안 좌선을 취하고 나니 몸이 찌뿌둥했다. 시간이 몇 시진이나 지난 건지 하늘이 어둡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백무량의 얼굴에는 성취감으로 가득했다.
“이제 들어가 볼까.”
불영행은 백무량에게 있어 이제는 고행이 아니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니까.
사형 주백천이 그린 십우도에는 불영행을 돌파할 순서가 있었다.
백무량은 그것을 신뢰했다. 그렇기에 당당히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저벅, 쿵!
굉음이 전신을 내달린다. 조금 전에 겪었던 그대로, 불영행의 어둠은 불가사의한 공포를 자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백무량은 그것을 이겨 낼 방법을 알고 있었다.
“……후우우.”
호흡을 가다듬은 백무량은 티끌만큼의 선기를 손가락에 집중시켰다.
마인과 시선을 마주할 때, 섭낭행이 불어 넣어 준 기운.
그때는 그저 백무량을 돕기 위해서 사대사행이라는 성지가 도와준 것으로 이해했다.
‘그게 아니었던 거야.’
백무량은 십우도의 아홉 번째 그림을 떠올렸다.
꽃이 핀 산.
아이가 모든 집착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은유.
그 속에서 백무량은 자신과 주백천만이 아는 신호를 떠올렸다.
수선화.
늦겨울에 싹을 틔우고, 봄이 돌아올 때쯤에야 꽃봉오리를 피우는 꽃.
그게 십우도의 아홉 번째 그림에 그려져 있었다.
청해성에서는 흔히 볼 수 없었다. 특히 곤륜산맥에서는 더더욱 보기 어려웠다.
유일하게 볼 수 있었던 곳은 바로 그곳.
‘청류강 변두리. 백선신검이 있었던 동굴 근처.’
백무량은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사형이 남긴 그림에는 과거의 기억이 매번 담겨 있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추억.
사형과 자신이 물장구를 치며 웃고 떠들던 어린 시절.
백무량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그때 나는 사부에게 매일 꾸지람을 받고 있었지.’
주자령이 말하길, 태청신공은 물이라고 하였다.
곤륜산맥의 운해처럼 어떠한 흐름에도 흔들리지 않고 도도히 나아가야 한다고.
지금 생각하면 사부에겐 선견지명이 있었던 셈이다.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면, 청운의 형태를 취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을 거야.’
백무량은 피식 웃었다.
그땐 그것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저 남들처럼 검에 내공을 실어서 휘두르고 싶었던 어린 시절이니까.
그래서 수련을 조금씩 피하기 시작했다. 사형인 주백천에게 놀아 달라 칭얼대고 영웅담을 들려 달라 졸라 댔다.
그것이 하루 이틀에서 열흘이 되니, 주백천이 꾀를 냈다.
“자, 무량아, 이걸 봐라.”
이제 막 싹을 틔우기 시작한 수선화.
백무량은 사형이 왜 저걸 보여 주나 싶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주백천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영웅이 되고 싶다고 말했지?”
“예.”
“이 꽃이야말로 영웅이란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꽃이 영웅이라뇨.”
“자, 무량아, 잘 들어 보아라.”
주백천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꽃은 수선(水仙)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꽃이 왜 신선…… 음. 잘 모르겠어요.”
“물을 많이 필요로 하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겨울의 엄동설한을 버티며 싹을 틔워 내지.”
“우와.”
이때는 알지 못했다.
주백천이 일부러 수선화의 설화를 자기식대로 바꿨다는 것을.
어린 백무량은 진실을 알지 못한 채 물었다.
“그러면 왜 영웅인데요?”
“미물일지언정 어려움을 인내하여 개화하니 영웅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너도 마찬가지다. 수련이 고되다고 해서 피했다가는 피지 못한 수선화가 될 것이야.”
“…….”
백무량은 수선화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수선화가 머금은 물은 제가 익히고 있는 태청신공과 다를 바 없겠네요.”
“비단 내공만 그러겠느냐. 경험과 배운 것들, 무학 또한 네 양분이 될 터인데.”
주백천이 그렇게 이야기를 마친 이후로, 백무량은 청류강에 핀 수선화를 볼 때마다 한 번씩 고민하게 되었다.
이대로 사부를 피해 다니면 개화하지 못한다.
그 고민이 결국 백무량을 주자령에게 돌아가게 했다.
주백천이 꾸며 낸 설화가 백무량에게 정확하게 먹힌 셈이었다.
그리고 지금.
‘사형이 십우도에 수선화를 그려 놓은 의미가 있을 거야.’
백무량은 선기를 메마른 이끼에 가져갔다.
수선화가 많은 물이 있어야 하듯, 메마른 이끼도 무언가가 필요하리란 직감이었다.
‘이게 아니면 물을 퍼 오면 되겠지.’
어떻게 보면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지만, 확신이 있었다.
언제나 옳은 방향으로 인도해 주던 사형 주백천에 대한 신뢰.
그것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스으윽.
선기를 머금은 이끼가 보기 좋게 부풀었다.
‘아까는 분명 손끝에 통증이 있었는데?’
몸에 남아 있는 선기가 이끼와 상충하는 줄 알았건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
백무량은 선기로 부푼 이끼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다가 특이한 점을 알아차렸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
걸음을 걸으면 전각이 무너지는 굉음이 났고, 아까 벽을 발로 찼을 때도 소음은 여전했다.
하지만 부푼 이끼는 무언가 달랐다.
‘한번 해 보자.’
눈을 꾹 감은 백무량이 주먹으로 이끼를 강하게 내리쳤다.
기혈이 터질 각오까지 했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고요하다.
‘이거라면…….’
백무량이 이끼를 떼어 내어 한쪽 귀를 막았다.
그리고는 한 걸음.
쿵!
굉음은 한쪽 귓전을 때릴 뿐.
이끼로 막은 귀는 멀쩡했다.
백무량의 얼굴에 희소가 맺혔다.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불영행을 돌파할 가능성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바로 그때.
“……!”
백무량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가뜩이나 어둡던 불영행이 완전히 깜깜해져, 천지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이화겸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적목.
백무량은 눈에 적목이 들었음에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섭낭행에서 마인과 마주했을 때처럼,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백무량이 수없이 예상한 상황 중 하나일 뿐이다.
‘이런 걸론 내 걸음을 멈출 수 없어.’
이끼로 두 귀를 막은 백무량은 앞으로 척척 걸어갔다.
현세대의 그 누구도 통과하지 못한 불영행 너머를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