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사행 (3)
“저놈인가.”
백무량은 어두운 시선을 느꼈다.
최소 백 장이 넘는 거리였지만, 섭낭행의 선기를 머금은 손등의 운룡이 은은한 빛을 발했다.
섭낭행의 도전자이자 도사인 백무량을 도운 것이다.
그 덕분에 시선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인.
그것도 사천당가에서 마주한 요안의 남자보다 훨씬 고강한 마인이라.
‘청성파의 도사들도 저놈한테 당했겠지.’
백무량은 조금씩 각오를 다졌다.
사대사행을 돌파하는 것뿐만 아니라 마인과도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청성산 암자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고성진도 마인에게 붙잡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하나둘씩 머릿속에 기입하면서 마인과의 싸움을 대비했다.
‘어떤 상황에 닥치더라도 당황하지 않기 위해서.’
백무량은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지금은 적이 존재한다는 정보를 알아낸 것으로 충분했다.
앞으로 향해야 할 길은 사형의 안배와 불영행에 있을 가르침.
그것을 동시에 취한다면 마인과 싸울 때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철퍽.
섭낭행 너머에 도착한 백무량이 앞을 바라보았다.
“곤륜산맥에서도 저런 지형은 처음 보는군.”
바위산 정중앙에 위치한 골짜기, 불영행.
안쪽으로 향하는 길은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았다. 무엇보다 볕이 들질 않아, 안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 무엇이 있을지 감이 오지 않는다.
전에 지나온 사대사행이 그랬듯.
불영행 또한 무언가 비밀을 품고 있을 거란 사실이 경계심을 불렀다.
‘제성진인이 말했었지. 불영행은 자연이 관리한다고…….’
저 험난한 섭낭행을 관리하는 제성진인마저도 불영행은 방치한다는 뜻이다.
백무량의 표정에 긴장감이 도드라졌다.
현세대의 청성파는 아무도 통과하지 못한 성지이자 금지. 불영행이 눈앞에서 시커먼 입구를 드러내고 있었다.
불영행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보는 전무.
‘몸으로 직접 부딪쳐서 경험하는 수밖에 없나.’
백무량은 제자리에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섭낭행을 돌파하는 동안 쥐어짰던 근육을 풀어 줄 시간도 필요했다.
그렇게 만전의 상태가 돼서야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누구도 돌파하지 못한 사대사행의 마지막 사행.
“불영행이라…….”
백무량은 어둠 속을 향해 걸어갔다.
어둠 속에서 처음 백무량을 맞이한 것은 퀴퀴한 냄새였다.
시체가 부패하거나 물이 썩은 냄새. 어느 쪽이든 좋은 것은 아니었다.
냄새를 뒤이어 백무량을 괴롭히러 온 감각은 소리.
저벅, 쿵!
걸음에 무게를 싣지 않았음에도 작약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온 천지에 울렸다.
정확하게는 불영행 내부에서만 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설마…….’
무언가 위화감을 알아차린 백무량이 손뼉을 강하게 쳤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살이 부딪친 통각만이 남을 뿐.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땅이 울리는 소음은 사라졌느냐.
그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앞으로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그렇게 열 걸음이었을까?
쿵!
반보를 나아가니 전신이 울렸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음이 백무량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크윽……!”
백무량에게 있어 이러한 고통은 무척 생경한 것이었다.
차라리 고강한 고수와의 싸움이라면 마땅히 감내할 수 있었다.
실체가 있고, 꺾어야 할 목표가 선명하니까.
그러나 불영행이 주는 고난은 달랐다.
‘맞는 방향이 어딘지 알 수가 없어졌어.’
시야가 어두운데 귀는 마비되고, 코가 악취에 짓눌렸다.
백무량은 본능적으로 팔을 한쪽으로 뻗었다.
‘일단은 벽을 만지면서 이동하면 한쪽 방향으로 이동할 수 있을 거야.’
이대로 방향감각을 잃은 채 헤매는 것보다 낫다.
생각을 마친 백무량이 벽을 더듬으려던 순간.
가벼운 통증이 손끝을 스쳤다. 몸에 남아 있는 선기가 벽에 있는 무언가와 상충하는 듯했다.
‘좋지 않아.’
백무량은 뒤로 물러섰다.
단전이라는 그릇 안에 있던 내공을 비움으로써 더욱 날카로워진 오감.
그것이 벽에 닿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상하다.’
그 한 단어가 백무량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골짜기라면 축축해야 당연한 것이 아닌가? 물이 빠져나갈 곳이 없으니까.’
습기는커녕 피부가 말라붙을 정도로 건조하다.
기이한 사실을 깨달은 백무량은 오른발로 벽을 걷어찼다. 그러자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고, 땅바닥에 뒹굴었다.
‘귀가 마비된 것이 아니었던가?’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까지 거쳐 온 사대사행에는 일관성과 답이 있었다.
요컨대 유수행은 파도가 몰아치는 수면 아래에 일정한 흐름이 있었고, 유등행은 기름 때문에 올라가는 게 불가능해 보였지만 인내와 불굴의 정신으로 이겨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불영행은 달랐다.
바깥과는 완전히 단절된 공간일 뿐만 아니라 법식 또한 자기 멋대로였다.
‘일단은 하나씩 시도해 보자.’
백무량의 시선이 땅바닥으로 향했다.
‘방금은 걷어찼으니, 이번에는 짓이겨 보면 되겠지.’
백무량은 왼발로 벽을 강하게 짓이겼다. 습기를 머금은 것보다는 퍼석퍼석한 질감이 느껴졌다.
파스슥…….
백무량은 반사적으로 코와 입술을 가렸다. 짓이겨진 무언가가 공기를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 예상은 옳았다.
스슥.
숨구멍을 침범하려던 가루가 젖은 도복에 달라붙었다.
백무량이 한곳에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가루?’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감촉은 돌가루에 가까웠다. 하지만 단정할 수는 없었다.
이곳은 사대사행이요, 현세대엔 누구도 돌파하지 못한 불영행이니까.
‘일단은 이것의 정체를 알아야겠어.’
불영행에서 나가서 햇빛에 비춰 본다면 정체를 알 수 있으리라.
백무량은 한 걸음씩 뒤로 걸으며 신중을 기했다.
그렇게 입구까지 도착했을 때.
“이건……!”
백무량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
“그놈은 불영행을 돌파하지 못할 거다.”
이화겸이 고성진의 기대를 한마디로 짓밟았다.
백무량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직접 불영행을 체험해 봤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적목(赤目)이라고 아느냐?”
“……모른다.”
고성진은 짧게 대답하며 이화겸의 눈치를 살폈다.
‘왜 죽이지 않는 거냐?’
이화겸에게 세 번을 연거푸 패했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대주천복마검의 심의를 펼쳤음에도 이화겸의 마공을 뚫지 못했다.
척준환이 이곳에 있었더라도 이화겸을 쉽게 이기지 못했으리란 판단까지 들 정도.
‘그런 고수가 아직까지 살려 두고 있다면…….’
필시 흉험한 의도가 있다는 뜻이다.
고성진이 마른 입술을 핥자, 이화겸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저 모습을 보니 확실해졌다.
자신을 벼랑 끝에 몰고서 즐기고 있다는 것을.
‘즐기는 것으로 끝나지도 않겠지.’
그 속내를 읽기라도 한 걸까?
고성진의 표정을 본 이화겸이 입술을 달싹였다.
다행히도, 아까 했던 이야기의 연장선이었다.
“적목이란 불영행 내부에 있는 이끼를 만지면 겪는 현상이다.”
“현상?”
“질병이라고 할 순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이화겸의 표정이 한순간 굳었다.
고성진은 그 모습이 사뭇 의외였다.
강호십대고수와 자웅을 겨룰 만한 고수가 두려워하는 현상이라니?
불영행에 도전하고 있는 백무량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눈이 어둠에 먹힌다.”
“……!”
“가장 먼저 눈이 붉게 물들고, 시력이 쇠하지.”
겨우 일다경이면 고수의 눈이 멀어 버린다.
이화겸은 충격적인 이야기를 무덤덤하게 주절거리면서 고성진의 반응을 살폈다.
유일한 아군인 백무량이 맹인이 된다는 소릴 들으면 당연히 절망할 테니까.
그 반응을 보면서 즐길 생각이었는데, 고성진의 태도가 묘하게 자신만만했다.
“그걸 알고 있다는 건 너도 적목에 당해 봤단 거겠지?”
“노부가 적목을 이겨 내기 위해 몇십 년을 허비한 줄 아느냐?”
“내가 아는 후배는 그렇게까지 오래 걸리지 않아. 아니, 애초에 걸리지도 않을 거야.”
고성진은 히죽 웃었다.
“그런 후배거든. 백무량이는.”
***
건조한 이끼 가루라…….
백무량은 실재할 수 없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이끼란 본래 습기를 먹고 사는 것이지, 건조한 상태로 있을 수가 없으니까.
‘오직 불영행에서만 자생할 수 있겠지.’
바깥의 바람과 닿기가 무섭게 이끼 가루가 흩어졌다.
젖은 옷에 붙어 있던 잔여물도 동시에 사라졌으니, 백무량의 판단이 옳을 터였다.
이제부터는 불영행을 돌파할 수 있는 방도를 찾을 때다.
백무량은 이곳까지 오면서 겪은 사대사행을 떠올렸다.
유수행.
유등행.
섭낭행.
하나같이 쉽게 통과할 수 없는 고행이었다.
특히 섭낭행에서는 곤륜의 호흡을 잃고서 표류할 뻔하기까지 했다.
그 고행을 돌파하면서 새긴 것은 제성진인의 조언.
‘시각에 집착하지 말며, 힘에 집착하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고 곤륜파의 무학, 운룡대팔식.
그것으로 섭낭행을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통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제성진인의 조언에 항상 귀결되었다.
‘불영행도 마찬가지일까?’
백무량은 고개를 내저었다. 제성진인이 자신에게만 조언했을 리가 없었다.
단지 조언에 의지해서 돌파할 수 있었다면 유연걸이 먼저 불영행을 통과했을 터였다.
그렇다면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백무량이 제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좌선좌공의 방식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생각을 정리할 때는 이보다 좋은 방식은 없었다.
‘제성진인의 조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체험했던 것에서 답을 찾아보는 거야.’
백무량의 눈이 지그시 감겼다.
유수행에서 당황했다가 흐름을 느끼고 냉정을 되찾았던 일.
유등행의 모습에 압도당했다가 의지를 다졌던 순간.
‘섭낭행에선 꼼짝없이 기절하나 싶었지.’
백무량은 피식 웃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신기한 일이었다.
자신을 구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니, 해답을 찾을 수 있었으니까.
그것도 곤륜파의 방식으로.
‘유연걸이 봤으면 반드시 나를 막았을 거고.’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 가던 차에 백무량의 눈이 꿈틀거렸다.
사대사행과 전혀 연관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림.
사형, 주백천이 그린 십우도.
그것에 분명 평범한 십우도와는 다른 행간이 있었다.
‘아이가 짐승의 발자국을 절벽에서 찾고 나서, 소의 꼬리를 어디서 발견했지?’
골짜기였다.
그것도 안쪽이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골짜기.
백무량의 미간에 힘이 저절로 들어갔다.
유연걸과 함께 있던 상황상 십우도를 오래 보지 못했기에, 자세한 형상을 떠올리기가 무척 힘들었다.
아주 어렴풋이.
십우도의 배경을 조금씩 끄집어 낼 뿐이다.
‘고삐를 쥐었던 곳은…… 언덕이었지. 해를 등져서, 검게 물든 언덕. 그게 유등행이었던 거야.’
그때는 주백천이 자기 개성을 십우도에 부여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떠올리니 마인이 침입한 사대사행을 그대로 그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동굴에 있었던 소용돌이가 유수행에 있었던 것처럼.’
백무량의 손바닥이 땀으로 젖었다.
‘아이가 소의 코에 고리를 걸어서 끌고 가는 그림…… 그 배경은 무엇이었지?’
백무량은 심력을 최대한 끌어 올렸다.
사형이 그린 십우도.
그곳에 불영행을 통과할 실마리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백무량은 불영행에서 좌절했던 유연걸이나 이화겸과는 다른 방식으로 정답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