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사행 (5)
도대체 얼마나 걸었을까?
백무량은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어둠과 악취, 불영행 전체에 퍼지는 진동. 온갖 방해가 백무량의 감각을 흐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백무량에게는 중심이 있었다.
불영행을 돌파하여 청성파의 개파조사가 남겼을 가르침을 취한다는 중심.
오로지 그것만을 떠올리며 앞으로 걸어가던 그때.
“뭐야?”
백무량이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조금도 상정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꾸우웅…….
무릎까지 오는 무언가가 자신의 바짓단을 잡아당기는 것이 아닌가!
‘소리만 들어선 짐승 같은데.’
백무량은 쪼그려 앉아서 짐승의 털을 매만졌다. 불영행이 만든 환상 같은 게 아니었다.
‘살아 있어.’
짐승이 실재한다.
그 말인즉…….
‘불영행의 끝이 코앞이라는 건가?’
백무량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가, 허탈한 웃음을 머금었다.
당장 눈앞에 광명이 펼쳐져 있다고 한들 맹인이 된 상태였다.
‘하물며 짐승의 정체를 모르는 마당에 무슨.’
백무량이 자조적인 표정을 짓는 동안 짐승은 백무량의 손가락을 핥고 있었다.
마치 당과를 탐하는 아이처럼.
백무량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기를 어깨로 집중시켰다.
그러자 짐승이 백무량에게 완전히 달라붙어서는 어깨에 침을 마구잡이로 발라 놓았다.
‘이제야 윤곽이 느껴지네.’
짐승이 기댄 무게로는 새끼.
어깨를 물지 않는 걸 보아 사냥의 경험은 없는 듯했다.
백무량은 짐승을 더듬어서 정체를 알아차렸다.
‘곰이네.’
산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놈이었다.
단지 사대사행에서 마주한 것이 신기했다.
‘유수행에서는 송사리 하나 없었는데, 불영행에 곰이 있다니.’
이토록 험난한 곳에서 자생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어쩌면 불영행에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을 마친 백무량은 선기의 방향을 조금씩 위로 올리기 시작했다.
‘어깨에서 목, 목에서 턱, 턱에서 인중으로…….’
선기를 옮길수록 새끼 곰이 버둥거렸다. 쪼그려 앉은 백무량의 무릎을 밟으려고 낑낑대는 기척이 느껴졌다.
백무량은 그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한 그루의 나무처럼 가만히 새끼 곰의 행동을 기다렸다.
꾸웅.
그 마음이 통했는지 새끼 곰은 경계하는 기색 없이 백무량의 무릎을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할짝.
새끼 곰의 혀가 백무량의 눈꺼풀을 핥았다.
냄새가 좋지는 않았지만, 혓바닥에서 느껴지는 미미한 선기가 있었다.
백무량은 새끼 곰이 당황하지 않게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눈을 떴다.
‘보인다.’
짐승은 상처 입은 곳을 핥는다고 했던가?
과거에 주백천에게 들었던 잡학이 도움이 된 셈이다.
백무량은 새끼 곰을 밀어내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꾸우웅!
당황한 새끼 곰이 도망친 곳.
불영행의 끝에서 한줄기 빛이 비추고 있었다.
***
“죽은 건가?”
이화겸은 불영행에서 며칠째 나오지 않는 백무량을 의아하게 여겼다.
보통 저 정도로 오래 있으면 정신이 미치거나 적목을 씻어 내기 위해 나오기 마련이었다.
자신이 그러했고, 불영행에 도전한 다른 도사도 마찬가지였다.
“네놈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
“이런, 그러니까 적당히 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이화겸은 빈사 상태에 빠진 고성진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내심 대단하다고 여기기는 했다.
‘구파일방일지라도 결국은 후기지수. 꺾어 놓으면 수긍할 줄 알았건만…… 끈기가 대단한 놈이로다.’
조금만 체력을 회복하면 달려드는 통에 직접 불영행으로 가 볼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고성진을 죽이기에는 공동파의 장문인을 끌어낼 재료가 될 수 없었다.
‘시체에 모욕을 줘 봐야 살아 있는 것만 못하니, 쯧.’
이화겸이 물바가지를 고성진에게 뿌렸다.
섭낭행에서 떠온 물은 적목뿐만 아니라 부족한 원기와 체력을 보충하는 데 효험이 있었다.
고성진이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도 이것 때문이었다.
“불영행에 가서 독연을 뿌리면 확실해지겠지.”
“끄윽, 안 된다…… 이놈.”
“시끄럽다.”
고성진의 머리통을 짓누른 이화겸은 섭낭행을 걷던 백무량을 떠올렸다.
내공이 텅 비어 존재감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한순간 마주했을 때 받은 충격은 후기지수 그 이상.
가히 구파일방의 장문인과 동수일 정도였다.
‘그 나이에 그만한 성취를 이루었는데, 섭낭행을 그런 식으로 돌파할 줄이야.’
백련교주의 좌호법인 이화겸조차도 섭낭행에선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한데 백무량은 섭낭행의 수면을 당당하게 걸어가지 않았던가.
‘내가 이곳에 유폐된 것에 이유가 있다면, 청성파를 멸하는 게 아니라 저놈일지도 모른다.’
이화겸은 고성진을 나무에 묶어 두고는 독과 화섭자를 챙겼다.
마침 바람의 방향도 좋았다.
이대로 불영행에 가서 불을 피운다면 골짜기 안쪽으로 흘러갈 터다.
결정을 내린 이화겸이 불영행으로 나아가려는데.
“저건……!”
이화겸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청성산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청성산에 불을 지르는 놈이 있었다니.”
청성파가 있는 청성산 중턱.
이미 그곳은 화마(火魔)가 뒤덮고 있었다.
“싸우면 반드시 진다고 했지요?”
“그, 그렇다고 불을 지르면 어떡하나!”
적성검은 크게 당황하여 조윤을 다그쳤다.
하지만 조윤의 얼굴에는 침착함으로 가득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무슨 생각! 청성산이 다 타게 생겼는데!”
“우리가 보낸 사람 말입니다. 경고하고자 한다면 시체를 산 밖으로 내놓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
확실히 맞는 말이다.
적성검이 경청하는 자세를 취하자 조윤이 하려던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적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청성산에는 전서구 하나 없고, 고 대협 또한 연락이 없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바깥에 알리고 싶지 않다?”
“멍청한 놈이지요.”
조윤이 조소를 머금었다.
“자기 약점이 뭔지 스스로 보여 주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싸우지 않아도 됩니다. 약점을 파헤쳐서, 천하에 보여 주면 그만입니다. 게다가…….”
청성파는 구파일방에 속한 명문 거파.
이상이 생기면 가까운 시일 내에 무림맹이 찾아온다. 그렇게 되면 이곳에 어떤 고수가 있든 정체가 밝혀질 것이다.
조윤이 그렇게 말하려고 하던 때였다.
“너희가 지른 불이렷다?”
반라의 노인, 이화겸이 부리부리한 시선으로 조윤과 적성검을 노려보았다.
적성검은 침을 꿀꺽 삼켰다.
누가 보더라도 절대 검을 마주해선 안 될 고수였다.
그것을 조윤이 모를 리가 없을 터인데…….
“장작이 이렇게 많이 쌓여 있는데, 한 번쯤 불을 대는 게 남자 아니겠습니까?”
조윤이 천연덕스럽게 말을 받았다.
적성검은 뜨악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어딘가 독특한 면이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저만큼 대범할 줄이야.
적성검이 걱정했던 대로 이화겸의 눈이 가늘어졌다.
“농을 듣자고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
“저는 그저 사람을 찾고자 왔을 뿐입니다.”
“흥!”
콧방귀를 뀐 이화겸이 입술을 비틀었다.
언제든 상대를 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눈동자에 깃들어 있었다.
“누구를 찾고자 하느냐?”
“공동파의 도사, 고성진을 데리고 계십니까?”
“네가 그걸 알아서 무얼 하겠느냐?”
적성검은 두 남자의 대화를 떨리는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이화겸의 심기가 어그러지면 언제든 조윤의 목이 날아갈지 몰랐다.
그것을 막아야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왜 저런 마인한테 입을 놀리는 거냐!’
적성검이 노심초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건지, 조윤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당연하지만 그 행동은 이화겸에게도 읽혔다.
“무슨 짓이냐!”
“신호를 주었습니다.”
조윤의 말에 적성검은 애써 무표정한 낯을 유지하면서 전음을 보냈다.
[무슨 신호? 난 그런 것 따위…….]
툭.
조윤이 적성검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제야 적성검은 조윤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마인한테 입을 놀려 보겠다?’
참으로 기똥 찬 계획이다.
적성검은 조윤에게 비아냥거리고 싶은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조윤은 이화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제가 왜 불을 질렀겠습니까?”
“내가 알 바더냐?”
“고성진을 보내 주지 않으면 무림맹주가 이곳으로 올 겁니다.”
“……뭐?”
이화겸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칠십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고 한들 무림맹의 위치는 변하지 않았을 터.
호광성에 있을 무림맹주가 사천성에 있을 리가 없다.
이화겸의 살기가 조윤의 목덜미를 훑었다.
“어딜 감히! 나한테 그딴 사기를 치느냐!”
“사기라니요.”
조윤이 품에서 한 가지 물건을 꺼냈다.
그걸 본 이화겸의 시선이 흔들렸다.
청룡대에게만 지급되는 청룡편(靑龍片)!
자기 신분을 증명하거나 청룡대의 권위를 보증하고자 할 때 쓰이는 물건이었다.
적성검은 조윤이 왜 그것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때 받은 건가?’
삼 년 전, 사천성 성도에 청룡대주인 창룡비검 진자충이 머물렀을 때.
조윤과 몇 번씩 대화를 나누었다고 들었건만 청룡편까지 주었을 줄이야.
‘수완 하나는 대단한 놈이야.’
적성검은 조윤에게 대단하단 시선을 보냈다.
그 모습이 이화겸에게는 또 다른 증거처럼 보였다.
“……흥! 청룡대가 아직까지 남아 있었느냐?”
“횡액을 겪고 싶지 않다면 고성진을 내놓으시오.”
“여기서 네놈들을 죽이고 떠나도 상관없는 일 아니더냐?”
“한번 해보시오.”
조윤의 표정은 무덤덤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와 삼 년 동안 지낸 적성검에게는 보였다.
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
조윤의 가슴이 쉴 새 없이 뛰고 있을 터였다.
‘저놈이 불을 지르자마자 올 줄은 몰랐으니까…….’
적성검은 판단을 내려야했다.
조윤의 말에 힘을 실어주거나, 다른 방도를 짜내거나.
심각하게 고민하던 적성검이 별안간 이화겸에게 외쳤다.
“네놈, 설마 백련교도더냐?”
“그렇다면 어쩔 테냐.”
이화겸이 던진 비웃음에 적성검은 잠시 머뭇거렸다가 생각해 둔 말을 내던졌다.
“백련교주는 여기에 없다.”
“……뭐라?”
“여기에 없다고 말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별다른 고민이 담기지 않은 말이었다.
이화겸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할 얄팍한 거짓일 뿐.
적성검은 백련교의 난을 설화 정도로 아는 무인이었다.
그러나 이화겸의 반응은 달랐다.
“어디 있는지 안다는 말이렷다?”
이화겸의 눈에 살기가 번들거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대화가 통할 듯했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 채, 고문을 해서라도 답을 들어야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적성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내가 잘못 건드린 건가?’
겁을 집어먹은 적성검이 진실을 토하려던 그때.
조윤이 나긋한 목소리로 이화겸의 살기를 갈라 놓았다.
“그만.”
“……?”
“거기서 멈추십시오. 그리고 고성진을 데려오시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화겸의 살기에 조윤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나와 이 사람이 백련교주의 위치를 절반씩 기억하고 있고, 내 입안에 독단이 들어 있기 때문이지요.”
“……거짓말! 언제부터 무림맹이 그런 짓을 했다고 그러느냐!”
“백련교가 다시 뭉치는 꼴을 보느니 그게 더 나으니까요. 제갈세가의 방식을 백련교도가 잊었으리라곤 생각지 않습니다.”
“…….”
이화겸의 침묵에 조윤과 적성검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제대로 먹혔다!’
청성산에 난 연기를 본 무인들이 올 때까지 버티거나 고성진을 데리고 내려가면 된다.
그 생각이 두 남자의 머릿속을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
그들이 이화겸에게 끌어낸 시간.
겨우 일다경 남짓.
무척이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화겸이 불영행에 독연을 피웠다면 백무량은 이곳에 도착하지 못했을 터였다.
“역시나.”
백무량은 땅바닥에 남겨진 글씨를 바라보았다.
-나의 사제, 백무량은 보아라.
불영행 너머, 좁디좁은 분지에 주백천의 서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