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위 (4)
백무량의 처소로 찾아간 제성진인은 곧바로 용무를 밝혔다.
“사대사행에 이상이 생겼네.”
“…….”
“그걸 명분으로 삼아서 곤륜파로 돌아가게.”
백무량은 그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주변을 경계하는 제성진인의 눈, 긴장에 젖어서 떨리는 목소리.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갑자기 찾아온 무례를 꾸짖는다면 소스라치게 놀라거나 되레 성을 낼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모습이 진실해 보였다.
백무량은 제성진인에게 물었다.
“왜 권하시는 겁니까? 청성파는 제가 곤륜파로 돌아가길 원하지 않을 텐데요.”
“바르지 않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제성진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가 가장 무서워할 유연걸이 눈앞에 있더라도 그리 말할 것처럼 보였다.
백무량은 제성진인에게 약간의 호감을 품었다.
백련교 앞에서도 의연했던 주백천을 보는 듯했다. 큰 힘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정신이 제성진인에게 있었다.
그러나 백무량은 제성진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저는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어째서인가!”
제성진인이 피를 토할 듯이 큰 목소리로 꾸짖었다. 필사의 의지로 왔음에도 따르지 않는 후배가 미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백무량에겐 물러나면 안 될 이유가 있었다.
“제가 여기서 내려간다면 청성파의 장문인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아!”
제성진인이 탄식했다. 그가 아는 유연걸이라면 백무량이 곤륜파로 돌아가기 전에 반드시 붙잡을 터였다.
죽자고 달려든다면 반드시 피를 보기 마련이다.
백무량은 물론, 곤륜파에 칼날을 들이밀지도 몰랐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현 청성파에선 사대사행을 통과한 사람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을 제가 통과한다면 승복할 수밖에 없겠지요.”
백무량은 제성진인에게 한 가지를 숨겼다.
주백천이 그린 십우도에 담긴 안배.
그것을 알아내는 게 중요했다.
칠십여 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와 백무량이 이렇게 된 까닭이 담겨 있을 테니까. 그곳에 주백천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 적혀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운산보에 대해 아는 이상,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들 제성진인도 적이나 마찬가지. 말할 필요는 없어.’
백무량은 바른 자세로 제성진인에게 말했다.
“돌아가십시오. 선배의 마음은 충분히 받았습니다.”
“……잠깐.”
짧은 시간 고뇌했던 걸까.
제성진인이 한순간 몇 년은 늙어 버린 듯한 표정으로 백무량에게 말했다.
“내가 아는 사대사행에 대해 말해 주겠네.”
“……!”
백무량에게 있어 제성진인은 뜻밖의 조력자였다.
일행(一行) 유수행(流水行).
이행(二行) 유등행(油登行).
삼행(三行) 섭낭행(涉浪行).
사행(四行) 불영행(不影行).
백무량은 제성진인에게 사대사행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감탄했다.
‘만일 내가 이걸 모르고 갔다면 어땠을까?’
유수행을 넘지 못한 수많은 도사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아예 모르고 간다면 당연히 탈락할 터였다.
‘사대사행은 사람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뜻하는 거였어.’
시각에 집착하지 말며, 힘에 집착하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라.
백무량은 삼행까지 돌파할 단서를 되새겼다. 하지만 사행, 불영행만은 알지 못했다.
“그곳은 도사가 관리하는 게 아니라, 자연이 돌보는 곳이라. 나도 가 본 적이 없다네.”
제성진인이 진실을 토로했다.
“섭낭행을 통과한 고행자만이 갈 수 있다고 들었네.”
“실력으로 돌파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그래서 돌아가길 바란 거네. 장문인이 삼 년 동안 도전했음에도 돌파하지 못한 것이니까.”
‘삼 년이라…….’
백무량의 눈이 번쩍 뜨였다. 청성파가 그토록 고요했던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인 듯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의문이 치솟았다.
“일문의 장문인이 삼 년 동안 도전할 만큼 사대사행 돌파가 대단한 겁니까?”
“청성파의 개파조사께서 남긴 글귀가 있다고 하니 말이야.”
“그거라면 청성도라면 누구나 도전하겠군요.”
고개를 끄덕인 백무량이 제성진인에게 한 가지를 물었다.
“한데 선배께선 아미파가 문을 봉한 이유를 아십니까?”
삼 년 전에 아미복호검을 얻은 뒤, 백무량은 아미파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옛 비급을 찾았다고 해도 답 하나 없었다.
그것이 벌써 삼 년째였다.
‘당가는 모른다고 했었지.’
하면 같은 지역의 도문인 청성파는 알고 있지 않을까?
백무량의 물음에 제성진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잘 모르네. 아미파에서 봉문 소식을 바깥에 알리지도 않고 문을 잠가서, 그저 추측만 할 뿐이지.”
“그거라도 알려 주십시오.”
“괴성(怪星)이라는 자가 아미파에 들어갔다고 하더군.”
“괴성?”
처음 듣는 별호에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것을 본 제성진인이 하려던 말을 이었다.
“아미파는 종남파가 더 잘 알 거네.”
“왜입니까? 종남보다는 청성이 더 가깝지 않습니까?”
“종남파가 십우도를 청성에 판 이유가 같은 도문이기도 하지만, 아미파와 비슷하네.”
“……설마 괴성이라는 놈이 종남파도 공격했단 겁니까?”
“내부를 정돈할 시간과 금전이 필요하다고 하더군.”
백무량은 제성진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괴성이라는 놈이 대체 누구이기에 아미파와 종남파를 공격하고도 소문 하나 흘리지 않았단 말인가?
하물며 공격받은 문파가 침묵하고 있는 까닭도 불가사의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나도 자세한 건 모르니…….”
제성진인의 말에 백무량은 표정을 풀었다.
지금 당장은 아미파를 신경 쓸 게 아니라 사대사행을 돌파할 궁리가 필요했다.
그 점에 있어서 제성진인은 엄청난 조력자였다.
‘남은 건 내 의지와 실력인가.’
백무량은 제성진인에게 두 손을 모아 올렸다.
“덕분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네. 단지…… 나에게 보여 주게. 강호에 정의가 살아 있다는 것을.”
“설령 사문이 망하더라도 말입니까?”
“그것은 각오했네.”
제성진인의 눈빛에 완고함이 가득했다.
그것은 백무량에게 하여금 옛일을 떠올리게 하는 시선이었다.
‘이곳에도 도사는 있었구나.’
청성파에는 악한만이 가득할 줄 알았건만, 뜻을 가지고 행동하는 도사가 있었다.
백무량은 제성진인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
괴성은 길게 하품했다.
아미파와 종남파. 두 문파 모두 괴성을 충족시키지 못한 까닭이었다.
‘청노는 어딜 가서 뭘 하는지도 모르겠고…….’
석두의 원수를 갚겠다는 말은 까마득히 잊은 지 오래.
괴성은 그저 심심함을 달래고 싶었다.
‘청성파에나 갈까? 아니, 거기는 조금 그런데.’
괴성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벌써 이 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아미파 다음에는 본래 청성파를 봉문시킬 예정이었건만, ‘그곳’에 있는 놈이 괴성을 방해했다.
위험한 것으로 따지자면 가히 백련교주.
괴력난신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천하의 상궤에서 동떨어진 놈이었다.
‘굳이 건드릴 필요는 없지.’
괴성은 피식 웃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석두의 원수라고 의심되는 놈이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곤륜신성 백무량.
곤륜파의 대사형이 사대사행에서 그놈과 마주친다면 최상이었다.
“설마 그놈을 꺾는다면…… 에이, 설마.”
괴성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백무량이 신검합일을 이룬 강호십대고수가 아니고서야 그럴 일은 없었다.
저벅저벅.
괴성의 발걸음이 먼 곳에 있는 보타암으로 향했다.
***
유연걸이 준 일주일.
백무량은 가장 먼저 선상인 조윤을 찾아갔다.
“아미파와 종남파에 있었던 일이 무엇인지 조사해 주십시오.”
“그게 전부입니까?”
백무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천 성도에서 처음 만난 그는 삼 년 동안 수많은 능력을 보였다.
송우현보다는 원숙함이 떨어지지만, 타지에서는 조윤이 더욱 믿을 만했다.
‘아무래도 송 노야는 청해성에서만 있으니까. 타지의 물정은 조윤이 더 밝지.’
자신의 얼굴에서 신뢰를 읽어 낸 건지, 조윤이 빙긋 웃었다.
“정보는 어떻게 전달하면 되겠습니까? 일주일이면 대협께선 사대사행에 도전하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곳에 들어갈 순 없습니다.”
“종휘에게 전달해 주십시오.”
“종휘라면…… 대협의 사제 말입니까?”
“예.”
백무량의 대답에 조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저희가 전서구를 이용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건 어렵습니다. 청성산에서 감시하는 눈이 많을 테니까요.”
백무량은 슬며시 웃었다. 조윤의 표정에는 왜 현종휘에게 정보를 전달하라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생각이 가득해 보였다.
“종휘를 통해서 무림맹에 전달할 생각입니다.”
“……아. 제가 오해를 하고 있었군요.”
조윤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그 정보가 사대사행에 관련이 있는 것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괴성이 벌인 일로 인해 종남파에 있던 십우도가 청성파에 옮겨졌고, 아미복호검의 진위를 가릴 수 없게 되었으니까.
아미파와 종남파에 있었던 일을 확실하게 밝혀야 한다.
“설령 그들이 바라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
조윤의 표정이 굳어졌다.
“혹시 백련교가 연루된 겁니까?”
“아직은 모르지요.”
백무량은 평정을 유지했다. 모든 걸 밝혀도 좋은 송우현과는 다르게 조윤은 아직 신뢰가 없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조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알아내는 대로 사제분께 전달하겠습니다.”
“아, 한 가지 더.”
“……?”
“송 노야한테 심부름을 하나 시켰는데, 그걸 저한테 전달해 주십시오.”
그 말에 조윤이 헛웃음을 머금었다.
한때 감우상인이라 불렸던 송우현에게 심부름이라. 격세지감이 확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러지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조윤이 자리를 떠나자, 백무량은 생각을 정리했다.
사대사행, 아미파와 종남파, 괴성.
‘그리고 사대사행에서 일어났다는 이상이라…….’
어느 쪽이든 좌시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모든 것에 관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은 하나씩, 천천히. 백무량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적밖에 없는 이곳에서 믿을 수 있는 건 일신의 무공뿐이라.’
사대사행.
그곳에 있을 고난과 방해를 생각하면 더더욱 심신을 정돈해야 했다.
생각을 정리한 백무량은 청성산으로 올라갔다.
“이곳입니까?”
“찾느라 힘들었다.”
백무량은 고성진의 투정을 뒤로한 채 암자 주변을 살폈다.
청성파와는 비교적 거리가 멀었지만, 고지대인지라 주변을 살피기가 용이했다.
“수련하긴 제격이네요.”
“그나저나 이곳에 있으면 괜찮겠느냐? 청성파에서 수작을 부릴지 누가 알고?”
“그런 걸 걱정했으면 제가 장문인에게 반말하지 않았겠지요.”
백무량의 여유로운 모습에 고성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번 이빨을 드러냈으니 지금 처리하지 않으면 큰 후환으로 다가올 거야.”
“알고 있습니다. 아마…… 제가 사대사행을 돌파하지 못하면 죽은 목숨이겠지요.”
백무량은 유연걸이 드러낸 살기를 보고 깨달았다.
운산보주가 남긴 기록을 지우고 나면 어떻게든 곤륜파를 멸문시키리란 것을.
‘무림맹의 눈치를 볼 놈이 아니야.’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사대사행을 돌파하여 청성파의 개파조사가 남긴 글귀를 이용하여 청성파를 굴복시킨다.
그게 아니면 유연걸이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후우…….”
백무량이 호흡을 고르자 고성진이 슬며시 자리를 비켰다.
지금부터는 심신을 정돈하고, 단련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