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위 (5)
‘가장 먼저 정(静).’
고요히 서서 칼끝을 바라본다.
구름은 언뜻 보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면 저만치 물러가 있게 마련이다.
곤륜의 무공도 그러하다.
한참을 서서 의지를 다스린 백무량이 천천히 한 발을 떼었다.
구름의 운행은 태산처럼 무거우나 동시에 깃털처럼 가볍다.
‘그리고 동(動).’
차분히 가라앉은 진기가 느리고 완만하게 일어난다.
급하게 진기를 일으켰다가는 반드시 탈이 난다.
절대 급하지 않게, 서두르는 일 없이, 구름처럼…….
백무량은 진기를 갈무리한 채 세 걸음을 걸었다.
쌓고[疊], 휘돌며[廻], 몰아치는[激] 바람이 발아래에서 맥동했다.
곤륜파 무공의 투로(鬪路), 삼보(三步).
걸음이 대지를 내디딜 때마다 바람이 거세졌다. 태청신단을 완전히 소화한 이래로, 태청신공의 내공은 전보다 더욱 강건해진 상태였다.
그것은 곧 유형(有形)의 상태로 우화하여…….
청운(靑雲).
백무량은 청운을 검극에 실었다. 삼 년 동안 늘 수련해 왔던 것처럼 가벼운 힘을 담아 휘둘렀다.
콰콰쾅!
주변 다섯 장 거리의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이 시야를 누렇게 물들인다.
청운의 검은, 세속에서 검기 혹은 검강이라 칭하는 경지와는 달랐다.
호사가들이 본다면 곤륜의 무공이 선도(仙道)의 방향에 치우쳐 실전성을 잃었다고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외형일 뿐.
백무량은 청운이 세속의 경지에서 자유롭다는 걸 내심 확신하고 있었다.
‘유운검(流雲劍).’
일 초인 비룡승운에서 이어지는 이 초, 삼 초.
한번 유형화한 청운은 힘을 잃지 않은 채 백선신검의 검로에 따라 휘둘러졌다. 본래 검초였던 유운검은 청운이 더해지며 검경(劍經)의 단계에 달했다.
백무량은 미소를 지었다.
‘뒤이어지는 분광검(分光劍).’
구름은 뇌전을 담는다고 하였던가.
파지직!
청운이 분광검의 초식에 도달하는 순간 뇌기가 번쩍였다.
그 기세에 멀리서 차향을 즐기던 고성진이 움찔할 정도였다. 패도적인 뇌기가 모든 것을 품는 청운에 뒤섞였다.
그 뇌운이 앞으로 뻗어지는 순간.
콰쾅!
시야를 누렇게 물들였던 낙엽이 뇌기에 불태워진다.
뇌기에 불탄 낙엽 가루가 백무량의 발치에 수북하게 쌓이니 도가의 무공이라고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곤륜파가 본래 가지고 있던 무공이었다.
분광뇌운결(分光雷雲訣).
백무량은 검해에서 실전된 무공의 이름을 얻었다.
분광검은 분광뇌운결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이었다.
“후우…….”
백무량은 다시 숨을 고르고는 눈을 번뜩였다.
검의(劍意)를 집중시킨 일 검. 구천화우검의 초식이 허공을 수놓았다.
‘곤륜산맥이 담고 있는 구천(九天)을 검에 담아, 화려한 빗줄기를 수놓으니[花雨劍].’
곤륜파의 개파조사께서 명명한 이름을 내면에서 곱씹으면서, 일 초.
백무량의 우수(右手)에서 균천관일이 펼쳐진다.
그러나 이번의 출수에는 숨겨진 일보가 있었으니.
‘운중용형보의 공타식(空打式).’
삼 년 전에는 영약을 모두 소화하지 못해서 검초와 동시에 펼칠 수가 없었다. 백무량은 그것이 늘 애석했다.
그 단계에 이른다면 칠십여 년 전 구천검의 발끝에 맞닿는 셈이니까.
백무량의 경쟁자는 늘 과거의 자신이었다.
스가각!
넓었던 시야가 단숨에 좁아진다. 운종용형보를 펼친 왼발이 허공을 때리며 앞으로 솟구친 까닭이었다.
그와 동시에 균천관일을 품은 백선신검이 허공을 꿰뚫었다.
콰아앙!
먼 거리에 있던 나무가 꿰뚫렸다. 검의와 청운, 공타식이 합일된 균천관일은 어마어마한 힘을 품고 있었다.
석두가 다시 나타나더라도 일 초에 피갑을 부술 수 있으리라.
‘그때와 비교하면 적어도 두세 개의 벽은 뚫은 셈이지만…… 그래도, 아직 전생보다는 부족해.’
백무량은 순간 깜짝 놀랐다.
어느새 구천검과 현재의 자신을 구분하고 있는 자신에게,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에 이립의 구천검에게 다다르고 있다는 사실에.
고무되기 시작한 심의(心意)가 더욱더 큰 향상심을 불러왔다.
백무량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꽃피웠다.
뒤이은 구천화우검의 이 초, 창천명월이 백선신검에서 펼쳐지니.
쐐애액!
심상을 그대로 본뜬 검기가 청성산의 봉우리를 향해 휘둘러졌다.
***
“우리에게 항의라도 하는 건가?”
목원장의 말에 집법당주 사군성과 유연걸이 껄껄 웃었다.
어린놈의 무공이 대단키는 하나 사대사행을 돌파하지 못하리란 확신이 담긴 조소였다.
“무공으로만 돌파할 수 있는 고행이라면 어찌 사대사행이라고 불렸으랴.”
유연걸의 비웃음에는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
사대사행 도중에는 내공을 운용할 수 없을뿐더러, 감각을 예리하게 달굴 수 없는 상황이 잦았다.
오히려 어린 나이에 높은 경지를 이룰수록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이 보는 곤륜신성 백무량은 오만하고, 요란했다.
무게감이라곤 조금도 없는 애송이가 사대사행을 돌파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곤륜신성 백무량이 가진 내력(來歷)이 얼마나 깊은지.
그리고 봉우리에서 펼치고 있는 무공은 단순한 수련에 불과하다는 것을.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덧 닷새.
사대사행에 도전하는 날까지 이틀을 남겨 두고 백무량은 청성산을 내려갔다.
한데 백무량의 모습이 무척 기이했다.
“……후우.”
곤륜파의 도복이 해어지다 못해 거적때기만도 못했다.
특히 오른팔의 소매는 흔적도 없었다.
누가 보면 청성산에서 수많은 도사와 싸우고 내려온 것처럼.
“이게 무슨 일입니까?”
조윤이 깜짝 놀라서 물으니, 백무량은 웃음과 함께 답했다.
“얻은 게 있었습니다.”
“청성산에는 적밖에 없을 텐데요.”
“하하.”
백무량은 그저 웃었다. 조윤에게 닷새 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 그가 아니라 송우현이 있었다고 한들 마찬가지였다.
“공동파와 교류가 있었다고 해 두지요.”
“교류라면…… 유운검룡과 말입니까?”
“예.”
고성진을 떠올리니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솔직하게 말해서, 고성진에겐 조금 미안한 마음이었다.
백무량이 얻어 간 것에 비해서 그는 무공을 정돈한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고성진은 그것으로 만족하는 눈치였다.
“어차피 사대사행에 도전하는 건 너잖아. 네가 더 얻어 가는 편이 낫지.”
전에 현천신공을 제대로 알려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둥, 고성진은 무인이라기엔 너무 성격이 둥글었다.
‘나도 언젠가는 고 선배한테 베풀어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던 백무량이 피식 웃었다.
곤륜파가 구파일방으로 거듭나는 그날. 고성진에게 자신이 구천검 백무량임을 밝힌다면 반응이 어떨까?
보나 마나 기절초풍하거나 선배에게 삿된 거짓말을 한다며 손가락질을 할 터였다.
‘얼마 남지 않았어.’
곤륜파가 곤륜파로서 자강(自强)하는 날.
그날은 청성파의 부정이 낱낱이 밝혀지는 날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천하에 밝히리라. 나, 구천검이 돌아왔노라고.’
마음을 정돈한 백무량이 조윤에게 손을 내밀었다.
“송 노야께서 보낸 물건을 받으려고 왔습니다.”
“아, 그것이라면…….”
조윤이 품에서 작은 함을 꺼냈다.
함의 틈새에서 신묘한 기운이 새어 나왔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범부일지라도 탐을 낼 만한 물건이었다.
백무량의 시선이 조윤에게 향했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이번 일이 끝나면 저에게 알려 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조윤은 작은 희망 사항을 입에 담았다.
“저도 믿어 주실 때가 되기도 했고요.”
“…….”
백무량은 침묵한 채 조윤을 바라보았다.
그가 의심스러운 건 아니었다. 다만, 백련교의 난을 겪고서 생긴 불신이 있었다.
‘곤륜이 위기에 처했을 때 도우러 올 자만 들이고 싶다.’
과거 곤륜파에 그런 자가 많았다면 현씨 조손이 고생할 필요 없이 번성했을 테니까.
백무량은 강호의 무정함이 싫었다.
그런 점에서 조윤은 만금상단의 상인이었지, 곤륜파의 상인은 아니었다.
그 시선을 알아채기라도 한 걸까?
조윤이 먼저 두 손을 들었다.
“알겠습니다. 성급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무어 있겠습니까. 다 제가 속이 좁아서 그렇지요.”
조윤이 민망한 웃음을 머금었다. 백무량은 그것을 상인으로서의 가면이라 생각했다.
진실하다기엔 조윤의 능력이 범상치 않았다.
“…….”
“…….”
짧은 시간 동안 침묵이 휘돌고 난 뒤, 조윤이 백무량에게 물었다.
“혹시 더 필요한 물건이 있으십니까?”
“사문과 송 노야에게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아, 혹시 곤륜파의 도복이 있는지요?”
백무량은 해진 도복을 가리켰다. 사대사행을 도전하는 자리에 거적때기 차림으로 갈 순 없었다.
이에 조윤이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미리 준비했지요!”
스윽.
조윤이 꺼낸 도복은 조금 전에 만들어 낸 것처럼 깔끔했다.
그것을 받아 든 백무량은 아무런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다음에 뵙지요.”
“예, 대협.”
그 뒷모습을 보는 조윤의 얼굴에 수심이 내려앉았다.
***
“지금 비무하고, 하루 쉬었다가 도전하는 건 어떤가?”
고성진의 말에 백무량은 도복을 대놓고 내려놓았다.
무언의 항의였다.
새 도복을 가져왔는데, 비무를 하면 거적때기가 되고 말 거란 항의.
그것을 알아차린 고성진이 짙게 웃었다.
“그 차림으로 하면 되지 않겠나?”
“이제 막 왔습니다.”
“검을 든 도사가 눈앞에 있는데, 후배는 가만히 있을 텐가?”
고성진의 칼끝이 흔들렸다. 어떠한 내공도 담기지 않은 검로였으나, 수십 갈래로 퍼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백무량은 저 검로가 궁금했다.
자신에게 수없이 낭패를 당하면서도 끝끝내 보여 주지 않는 공동파의 절학이 무엇일지가.
백무량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보여 주실 겁니까?”
“무엇을 말이냐?”
“선배께서 계속 숨기는 검법 말입니다.”
그 말에 고성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거라면…… 장문인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장문인께 허락을 받을 선배였다면 현천신장을 비급으로 기록하지 않으셨겠지요.”
“하하하!”
고성진이 시원하게 웃어젖혔다. 백무량의 말이 옳았다.
고성진은 다른 사람의 말을 지지리도 듣지 않았다. 그렇기에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었지만, 반골의 성향은 더욱더 굳어졌다.
곤륜신성 백무량 앞에서 대주천복마검을 펼친다.
그 상상만으로 고성진의 부동심은 깨어진 지 오래였다.
“하면 후배도 보여 주지 않겠나? 그, 구천화우검이라는 검을 말이야.”
“받아 내실 수 있겠습니까?”
백무량의 어조는 부드러우나, 그 안에 날카로운 가시를 품고 있었다.
운산보주를 이기지 못했던 선배께서 구천화우검을 받아 낼 수 있겠냐는 가시.
고성진은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둥글었던 인상이 날아가며 무인으로서의 호승심이 빈자리를 채웠다.
“삼 년 전과는 내가 많이 달라져서 말이야.”
“저도 마찬가지지요. 며칠 전부터 보시지 않았습니까?”
백무량이 한 봉우리를 가리켰다.
그 봉우리는 창천명월로 인해 나무가 많이 베어져, 민머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저 무공이 사람에게 향한다면 비무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백무량의 경고는 고성진에게 있어 향료나 다름없었다.
“하면 볼까! 구천의 검을!”
고성진의 검이 일도회천(一道回天)했다.
과거 운산보주에게 패배하였던 대주천복마검.
공동파의 검기가 백무량을 향해 폭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