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위 (3)
‘결국, 청성파가 판 함정은 사형의 안배였구나.’
백무량은 속으로 웃음을 머금었다. 이곳으로 오면서 품었던 긴장감이 물거품으로 화하는 듯했다.
사대사행으로 행하는 것 자체가 백무량에겐 기연이었고, 사형이 남긴 안배를 취하기 위한 행동이었으니까.
이제는 유연걸에게 가고 싶다고 청해야 할 판이었다.
“사대사행에 도전하지.”
“하하하!”
유연걸이 활짝 웃었다. 속이 훤히 보이는 웃음이었다.
자기가 세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다. 그렇게 착각하고 있을 터였다.
‘참기가 어렵네.’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백무량은 억지로 참았다.
유연걸은 백무량에게 일주일의 시간을 주었다.
사대사행에 도전하기 전에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뜻이었다.
물론 진의는 따로 있을 터였다.
‘요컨대 나를 제압하거나 죽일 술수를 사대사행 내에 준비하고 있다거나.’
뻔히 보이는 함정이지만, 그 안에 주백천의 안배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백무량이 마음을 다잡는 사이에 고성진이 물었다.
“정말 괜찮은 것이냐?”
“고 선배, 몇 번이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괜찮다니까요.”
“후우…….”
한숨을 내쉰 고성진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나도 참여하마.”
“선배가요?”
“왜, 너는 되고 나는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느냐?”
그곳에 사형이 남긴 안배가 있다. 이런 얘기를 해 봐야 미친놈 취급이나 당할 터였다.
백무량은 미리 생각해 두었던 변명거리를 꺼냈다.
“선배의 목숨이 위험할 겁니다. 무엇보다 곤륜의 십우도를 위해서 선배가 위험해질 이유도 없고요.”
“그게 그리도 중하더냐?”
“예.”
백무량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고성진은 다른 제안을 내놓았다.
“하면 내가 참관하는 건 어떠냐?”
“사대사행은 청성파의 성지가 아닙니까. 도전하지 않으면 들여보내 주지 않을 겁니다, 아마.”
“칫.”
고성진이 혀를 가볍게 찼다. 그동안 백무량은 의문을 품었다.
대체 주백천은 어떻게 사대사행에 안배를 해 두었단 말인가?
그보다 놀라운 점은 따로 있었다.
‘아무리 천문(天文)을 읽는다고 한들 이렇게까지 자세히 읽을 수가 있나? 내가 어릴 때면 사형도 약관 정도였을 텐데…….’
어린 시절부터 주백천의 학식이 뛰어나긴 했지만 칠십여 년 뒤를 읽을 정도는 아니었다.
백무량은 복잡한 심경을 고개를 내저어 털어 냈다.
‘사대사행에 가 보면 알겠지.’
동굴에서 주백천이 남긴 글귀로 상황을 파악했듯, 사대사행에도 무언가를 남겼을 터였다.
“그나저나 며칠 동안 무얼 할 생각이냐?”
고성진의 물음에 백무량이 대답했다.
“사대사행에 도전했던 제자와 만나 볼 생각입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
두 도사가 청성산에서 내려갔다.
청성파의 도사 모두 친절하게 대답해 주지 않을 터이니, 속가제자에게 물어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유수행부터 난관입니다.”
“저도 유수행에서 떨어졌습니다.”
“…….”
사대사행 중 일행(一行). 유수행을 통과한 도사가 없었다.
심지어 그들에게 들은 유수행의 고난은 상상을 초월했다.
“발목에 족쇄와 쇳덩이를 찬 채로 파도를 건너라는 게 말이 됩니까?”
“그것도 내공 없이요.”
백무량은 할 말을 잃었다. 왜 사대사행에서 죽는 도사가 속출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무식함을 넘어서 사지로 밀어 넣는 짓이 아닌가?’
심지어 언뜻 들은 이행(二行) 유등행(油登行)은 유수행보다도 괴악했다.
족쇄와 쇳덩이를 찬 채로 기름이 번들거리는 백 장 암벽을 오르라니.
고행으로 유명한 공동파의 제자인 고성진마저도 입을 쩍 벌릴 정도였다.
“그냥 포기하는 게 어떤가, 후배?”
“…….”
유연걸이 무슨 작업을 해 놓지 않더라도 죽을 확률이 높은 고행이었다.
당장 고성진이 도전하더라도 유수행을 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백무량은 달랐다.
‘평범한 도사라면 그렇겠지.’
나이는 어려졌다지만 근골은 칠십여 년 전 구천검과 다를 바 없었다.
신장이 커지면서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했을 뿐. 신체는 이미 완성된 상태나 마찬가지.
“포기라니요. 괜찮습니다.”
백무량은 고성진의 걱정을 밀어냈다. 하지만 불안함은 남아있었다.
‘삼행(三行)부터는 이름밖에 모르다니.’
섭낭행(涉浪行)과 불영행(不影行).
이름만 들어도 흉악함이 드러난다. 유연걸이 칼을 뽑는 것 대신 사대사행을 거론했는지 이해가 갔다.
곤륜신성이 사대사행에 도전하다가 죽었다.
그것이 무림에 알리기엔 적합할 테니까.
“가만히 앉아서 당할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백무량은 송우현에게 전서구를 보냈다.
***
“피독주를 내놓아라?”
당문천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피독주가 무엇이던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신체의 독을 해독시켜 준다는 기물이오, 사천당가의 보물이었다.
그걸 내놓으라니, 눈앞에 백무량이 있었다면 다짜고짜 암기를 날렸을 요구였다.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었다.
백무량을 돕지 않는다면 청성파에게 사로잡힐 테고, 우방을 맺은 이유가 퇴색되고 말 터였다.
하물며 청성파가 부정을 저지른 증거가 송우현에게 있지 않던가.
“내놓으라니요. 잠시 빌리고 싶다고 말한 것이지요.”
송우현의 말에 당문천은 잠시 고민했다.
백무량이 의심스러운 건 아니었다. 단지 그를 둘러싼 상황이 좋지 않았다.
“청성파에게 빼앗길 가능성이 있는 이상, 거절하고 싶소만…….”
그 말을 들은 송우현이 빙긋 웃었다.
“백무량에게 화를 내신 적이 있습니까?”
“내가 뭐 하러 그 어린놈한테…… 아, 있었소. 마인들이랑 싸우겠다고 억지를 부릴 때였지.”
“실제로 보고 나니, 억지였습니까?”
“…….”
당문천은 과거를 떠올렸다. 석두를 단신으로 베어 넘기던 백무량의 경지가 아직 눈에 선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라. 마인 둘과 살의를 품은 청성파를 비할 순 없지.’
그렇게 대답하려는 찰나에 송우현이 호흡을 가로챘다.
“도우면 억지가 아닐 수 있습니다. 제가 본 백무량은 불가능한 걸 도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신뢰하는 이유가 무어요?”
“그놈은 실패하면 잃을 게 많으니 말입니다.”
“……음.”
당문천은 침음성을 흘렸다. 송우현의 말이 옳았다.
백무량의 목숨은 곧 곤륜파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가 죽으면 곤륜파는 단순히 대사형을 잃는 게 아니라 명성의 구심점을 잃는 셈이었다.
그걸 백무량이 모를 리가 없다.
당문천의 내심이 점차 돌아서고 있을 때, 송우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불가능한 걸 항상 도전하니까 주변 사람이 화를 내고 답답해하지.’
송우현과 주겸, 당문천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백무량에게 그딴 짓 좀 하지 말라고 꾸짖었었다. 백무량 자신은 가능하다고 여겨도 남들이 보기엔 불가능한 행동에 목숨을 내던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송우현은 그저 백무량을 보기 좋게 포장했을 뿐이었다.
‘아직 실패한 적이 없으니까 가능한 포장이지만.’
그 포장이 통했던 걸까.
당문천이 입술을 달싹였다.
“보름 이전에 반납하라고 전해 주시오.”
‘됐다!’
송우현이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
평소보다 두 배 무거운 족쇄를 준비하라!
유연걸의 명에 사대사행을 관리하는 제성진인은 황급히 철장(鐵匠)을 찾았다.
그 이야기를 들은 청성파의 철장, 도철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미친 소리요?”
“이번에 곤륜신성이라는 후기지수가 찾아왔는데, 억지로 죽이려는 것 같습니다.”
“허. 기어이 그 유씨 놈이 일을 벌이는군.”
제성진인은 말없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학도사에 불과한 그로서는 유연걸을 제지할 힘이 없었다.
‘일은 예전부터 벌였습니다.’
도철영에게 진실을 이야기할 권리조차도 제성진인에게는 없었다.
제성진인이 거듭 한숨을 내쉬자 도철영이 한 가지를 제안했다.
“두 개를 만드는 건 어떻소? 외견은 같지만, 훨씬 가벼운 것으로 하나 더 만드는 거요.”
“장문인이 확인할 겁니다.”
“하하.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진인께서 들고 가는 게 아니니까.”
“그게 무슨 소립니까?”
도철영은 대답하는 대신, 탁자에 있던 족쇄를 자기 팔에 채웠다. 그러고는 접어 둔 소매를 폈다.
“자, 어떻소.”
“내가 차고 가서 후기지수한테 전달하란 겁니까?”
“유씨 놈이 틀리고, 이번에 온다는 후기지수가 옳은 거라면 도와야 하지 않겠소?”
도철영의 목소리가 몹시 진지했다. 제성진인은 침을 꿀꺽 삼키는 자신이 몹시 실망스러웠다.
‘반항할 생각보다는 내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구나.’
제성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도철영이 히죽 웃었다.
“역시 유씨 놈과는 다르게 진인은 배운 사람이라 좋소.”
“아무리 그래도 장문인이시오.”
“무공만 뛰어난 개차반을?”
도철영의 비아냥거림에 제성진인은 헛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개차반.’
유연걸이 장문인이 아니었다면 도철영의 말에 동조했으리라.
제성진인의 표정을 본 도철영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이제 시작하지.”
까앙! 깡!
도철영이 작업을 시작하고, 제성진인이 그것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진인, 큰일입니다!”
대장간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성진인은 도철영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갔다.
“무슨 일이오?”
자신과 함께 사대사행을 관리하는 도사였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유수행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펴, 평소에는 없는 것이…….”
“일단 가 보자꾸나.”
제성진인이 황급히 유수행으로 향했다.
그곳은 이미 많은 도사가 몰려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장문인께서 저렇게 만든 건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설마 후기지수 하나 때문에 사대사행을 어지럽혔겠나!”
도사들 사이에 당황과 두려움이 번져 있었다. 제성진인은 그들 사이를 지나치고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만 물러가시오! 여긴 내가 진정시킬 터이니!”
“장문인께서 이러신 거요?”
“그건 아니오.”
제성진인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도사들은 석연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떠났다.
‘확실히 현 장문인의 인망이 없다시피 하구나.’
제성진인의 마음이 가라앉았다. 지금이라면 양심에 찔릴 일 없이 도철영과 함께 유연걸을 속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도사가 모두 떠나자, 제성진인은 유수행으로 다가갔다.
“작년 겨울부터 이상하더니만, 결국 사달이 났구나.”
“너무나도 불길하지 않습니까.”
제성진인을 데려온 도사가 두려움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유수행 한가운데에 거품이 들끓고 있었다.
그 위로 파도가 몰아치니 전보다 더욱더 큰 물보라가 일었다.
‘저길 족쇄를 찬 채로 내공 없이 건너야 한다니…….’
제성진인은 백무량이 어떤 도사인지 알지 못했다.
단지 유연걸을 비롯한 도사들에게 폭언했단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목숨을 잃을 만한 잘못은 아니었다.
‘하물며 잘못은 청성이 먼저 했거늘.’
얼굴도 모르는 후기지수를 이대로 사지에 몰아넣어야 하는가.
제성진인이 눈을 꾹 감았다.
“백무량이라는 아이가 어디 있는지 아느냐?”
“예?”
“적어도 사대사행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려 줘야 하지 않겠느냐.”
“하나…… 장문인께서 좋게 보지 않을 겁니다.”
제성진인은 정색했다.
“너는 도학에서 무엇을 배웠느냐?”
“…….”
도사는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하다가, 제성진인에게 백무량의 처소 위치를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