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위 (2)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함정일 게 뻔한데?”
송우현의 의심은 합당했다. 한번 궁지에 몰린 청성파가 어떤 짓을 벌일지 몰랐다.
하지만 백무량 나름대로 방도는 있었다.
“공동파와 같이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친선이 목적이라면 다른 도문과 함께하면 그만입니다.”
“……으음.”
공동파라면 충분히 믿을 만하다.
송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출발할 생각이더냐?”
“장문인께 먼저 말을 해 놨습니다.”
송우현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백무량이 저렇게 말할 때면 십중팔구는 즉흥적인 판단이었다.
“너 설마…….”
“지금 바로 출발하여 공동파의 도사와 중간에 합류할 생각입니다.”
백무량의 목소리가 몹시 무덤덤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말하는 투가 송우현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불리한 곳으로 알아서 가 주겠다?”
“그것이 곤륜의…….”
백무량이 항상 하던 말을 반복했다.
‘꾸준하기가 소 힘줄 같은 놈.’
송우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라, 네 마음대로 해라. 마음대로 하는데, 제대로 된 도사와 동행해야 하지 않겠느냐?”
“고 선배에게 전서구를 보내 놨습니다.”
“고 선배라면…… 고성진 말이냐?”
유운검룡(流雲劍龍) 고성진.
운산보주와의 싸움에서 깨달음을 얻은 고성진은 최근 무림에서 신진고수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아는 송우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든든하긴 하다만, 함정일 게 뻔한 곳을 같이 가 주겠느냐? 한창 강호를 떠도느라 바쁠 터인데.”
“올 겁니다.”
백무량의 대답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
***
며칠 뒤.
중간 지점에서 만난 고성진이 백무량에게 다짜고짜 과거의 일을 따졌다.
“장문인께 현천신장을 알려 줬다고 얼마나 혼난 줄 알아?”
“그거야 내기였잖습니까.”
“네가 말렸어야지!”
고성진이 한쪽 입가를 씰룩였다.
자기 딴에는 진지한 척하지만 백무량에게는 농담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현천신장을 직접 알려 준다고 해 놓고 비급으로만 남기시지 않았습니까.”
“나는 그때 너를 구하려고 갔잖느냐.”
“제가 본 건 운산보주에게 붙잡힌 선배였지요.”
“다 옛날 일이거늘…….”
뒷머리를 긁적인 고성진이 백무량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청성파에 직접 가겠다고?”
“예. 그래서 선배와 동행하고자 합니다.”
“그들이 너를 불러내려는 모습이 빤하게 보이는데도 말이냐?”
“가야 하니까요.”
고성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운산보야 지역에서 군림하는 사파에 불과했지만, 청성파는 궤가 달랐다.
구파일방의 도문.
타락했다고 한들 수백 년 동안 청성산에서 군림해 온 문파였다. 그들이 가지고 있을 저력은 백무량이 싸웠을 적들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백무량의 표정에는 결연함이 가득했다.
“백련교보다는 약하잖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아니, 네가 백련교도와 싸워 본 적이 없잖느냐?”
“있습니다.”
“뭐?”
고성진이 깜짝 놀라서 백무량을 돌아보았다. 그가 모를 만도 했다.
사천당가에서 있었던 일은 무림맹 말고는 불문에 부쳤으니까.
백무량은 삼 년 전, 성도에서 있었던 일을 고성진에게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고성진이 눈을 끔뻑였다.
“어쩐지…… 왜 갑자기 당가가 곤륜파를 도와주나 했는데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다른 곳에 말하지 마십시오.”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냐?”
“내기라도 하시면 말하겠죠.”
“…….”
고성진의 입이 꾹 다물렸다.
그걸 본 백무량은 피식 웃었지만, 말을 고칠 생각은 없었다.
사람은 믿을 만했다. 하지만 사문의 무공을 내기로 걸었던 전적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하면, 같이 가 주시겠습니까?”
“다시는 내기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하하.”
백무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의 놀림거리를 하나 잃는 셈이지만, 청성으로 향하면서 고성진만큼 든든한 우군은 없었다.
‘강호십대고수인 현천신검 척준환의 제자니까.’
고성진과 함께 다닌다면 청성파가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터.
백무량은 고성진에게 두 손을 모아 올렸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고 선배.”
“나야말로.”
고성진 또한 백무량에게 예를 표했다.
***
청성파로 향하는 길은 놀라우리만큼 고요했다.
백무량으로선 다소 의외였다.
‘왈패라도 보내서 무공이 어떤지 시험해 볼 줄 알았는데.’
“자신감이 있는 모양이군.”
고성진도 자신과 같은 생각이었는지 긴장감 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청성파라 적힌 대문.
그 앞에 문지기는커녕 낙엽을 쓸어 담는 어린 도사도 없었다.
[이거 매복은 아니겠지?]
고성진의 전음에 백무량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얕은수를 쓰려고 했다면 청성파에 도착하기 전에 했겠죠.]
[그, 그렇지. 우리가 여기로 오는 걸 많은 사람이 봤으니까.]
침을 꿀꺽 삼킨 고성진이 대문을 열어젖혔다.
그곳에는 놀라운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
백무량의 눈이 커다래졌다. 언제부터 대기하고 있었는지 백이 넘는 도사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일류. 최소한 검기상인의 경지에 다다라 있는 무인들이었다.
‘나를 압박하려는 생각이었나?’
살기가 아닐 뿐이지 그들이 보내는 시선에는 무언의 압력이 있었다.
구파일방에 속한 도문에게 도전하지 말라는 시선.
백무량은 그들을 훑어보고는 어깨를 폈다. 청성파의 권위를 오연하게 받아쳤다.
그러고는 청성파의 장문인인 유연걸을 향해 대답했다.
“청성은 동도를 대접하는 방식이 이렇습니까?”
“…….”
유연걸의 눈은 일견 무심했지만, 그 안에는 백무량을 향한 적의가 가득했다.
바늘로 툭 건드리면 터질 듯한 살기. 그럴수록 백무량의 의지는 더욱 강건해졌다.
“청성파의 장문인은 곤륜파와 공동파를 대표하여 온 도사에게 예의를 표하시오!”
“감히!”
“청성파의 장문인에게 무슨 말버릇이냐!”
기다렸다는 듯이 청성파의 도사들이 백무량에게 험담을 던졌다. 당장이라도 칼을 뽑겠다는 듯 허리에 손을 가져가는 이도 있었다.
고성진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저들이 덤비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강호공적이 되고 싶다면야, 어디 한번 뽑아 보시오!”
백무량은 내공을 담아 힘껏 외쳤다. 그 소리가 마치 소림의 사자후를 방불케 했다.
“큭.”
“커억!”
내력이 약한 도사 몇몇이 스스로 무너졌다. 백무량의 눈에 신광이 맺혔다.
“구파일방의 도문이라는 곳이 후기지수 둘을 상대로 이딴 짓이나 벌이다니, 천하가 비웃을 일이오!”
백무량의 일갈에 유연걸이 입술을 씰룩였다.
“이딴 짓이라니. 나는 그저 곤륜의 손님에게 청성파의 저력을 보여 주고 싶었을 뿐이라네.”
“기를 죽이려고 한 거겠지요.”
백무량은 아슬아슬한 선에 걸친 채 유연걸에게 험담을 내뱉었다.
“어차피 적이나 마찬가지니, 제가 칼을 뽑았다면 그걸 구실로 근맥을 끊었을 테고요.”
“다 알면서도 존댓말이 나오는가?”
“그러면 편하게 말할까?”
“……어린놈이 무서운 게 없는 모양이구나.”
백무량은 코웃음을 쳤다.
애초에 백무량은 칠십여 년 전의 무인이었다. 청성파의 전대 장문인이 와도 도문의 항렬로는 한참 아래였다.
한데 유연걸 정도면 얼마나 가소롭겠는가.
“하찮은 도발은 여기서 그만두어라. 네가 한 말이 사실인지 확인이나 해야겠다.”
“그림을 보여 달라……?”
“그래.”
백무량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걸음이 얼마나 과감한지 유연걸과 목원장이 당황할 정도였다.
“어차피 죽이지도 못할 거라면, 짖지도 말고.”
“이놈……!”
유연걸이 눈을 부릅뜨자, 목원장이 유연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만해라. 저놈 말대로 여기서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잖느냐.”
“…….”
유연걸의 인상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지금쯤이면 후회하고 있을 터였다.
‘내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면 사천의 오지로 불러냈겠지.’
기껏해야 후기지수이니 방금처럼 강하게 다그치면 겁을 집어먹을 거란 생각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를 어쩌나.
백무량은 유연걸이 아니라 무림맹주가 와도 물러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안내해.”
“말버릇을 당장……!”
“여기서 있었던 일을 말하면 누가 더 지탄받을지 알고 있겠지.”
유연걸은 더욱더 분노했고, 목원장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백무량은 누가 주동자인지 알아차렸다.
‘백운각주라고 했던가.’
유연걸의 사숙이자 청성파의 장로.
심계가 음험하여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백무량은 목원장을 곁눈질하고는 얼어붙은 고성진을 이끌었다.
“빨리 안 오고 뭐 하십니까.”
“아니, 그게…….”
[여기서 기세가 밀리면 더욱 흉악한 짓을 할지도 모릅니다.]
백무량이 보낸 전음에 고성진이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겉보기엔 무척 어색했지만, 겁을 집어먹었던 모습보단 한결 나았다.
그렇게 일다경인가.
청성파의 백운각에 십우도가 걸려 있었다.
‘……이건.’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확실한 진품이었다.
주백천이 즐겨 쓰는 필압이 눈에 띄었고, 소의 눈을 표현하는 방식이 같았다.
그러다 문득, 사형이 남긴 행간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백무량이 깜짝 놀라던 그때 유연걸이 입을 달싹였다.
“돌려받고 싶다면 사대사행에 도전하거라.”
“그것이 전부인가?”
“그동안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아야겠지.”
유연걸이 조소를 머금었다. 자기가 반드시 승리하리란 감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하지만 백무량의 생각은 달랐다.
‘사형의 안배가 청성파의 머리 위에 있었구나.’
자신을 사대사행에서 제압하고, 곤륜파와 송우현을 협박한다. 그것이 청성파가 세운 계획이었을 터였다.
한데 그 위에 주백천의 안배가 있었다.
‘사대사행에 안배를 남겨 뒀을 줄이야.’
백무량은 옛 기억을 떠올렸다.
***
“발자국의 위치가 이상한데요?”
어린 시절, 백무량은 주백천에게 물었다.
소년이 소를 찾아다니다가 짐승의 발자국을 발견하는 곳은 보통 산이기 마련인데, 주백천은 폭포수가 떨어지는 절벽을 그려 놓은 것이다.
이에 주백천이 빙긋 웃었다.
“견적(見跡)이 어찌 산에서만 이루어지겠느냐.”
“하지만 대부분은…….”
“사대사행이라는 말을 들어 보았느냐?”
백무량은 곧바로 청성파를 떠올렸다.
“물론이죠!”
“사대사행의 첫 고행은 협천곡(狹川谷)이 자리한 유수행(流水行)이라고 한단다. 나도 말로만 들어 보았지, 실제로 본 적은 없거든.”
백무량이 실망하려는 찰나에 주백천이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나름대로 상상은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상상요?”
“유수행이 왜 고행인지, 도사에게 무슨 깨달음을 주려는지 말이다.”
유속이 빠른 옥색 파도를 건너는 유수행.
내공을 쓰지 않고 건너야 하기에 많은 도사가 물벼락을 맞고 병에 걸리거나, 최악의 경우엔 파도에 휩쓸려서 죽기도 했다.
주백천이 그 고행의 의의가 무엇인지 추측하기로.
“휩쓸리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다.”
“……예?”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미혹이나 두려움을 직시하되, 거기에 빠져들지 않는 것.”
주백천은 절벽에 찍힌 발자국을 가리켰다.
“발자국이 산에 있든, 강에 있든, 절벽에 있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느냐. 중요한 것은 소를 찾으려는 마음일진대.”
“너무 어려워요.”
백무량이 입술을 삐쭉거리자 주백천이 부드럽게 웃었다.
“잊지만 말아라. 내가 그곳에 발자국을 남겨 놓을 터이니.”
***
그리고 지금.
백무량은 십우도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주백천이 그렸던 것처럼, 소의 발자국이 폭포가 내리치는 절벽에 그려져 있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안배를 준비하셨구나.’
두 번째 안배를 발견하면 마냥 기쁠 줄 알았는데, 백무량의 내심이 그리움으로 먹먹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