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위 (1)
삼 년.
아이가 청년으로 거듭나는 시간이다.
열세 살에 불과했던 백무량은 어느덧 열여섯 살이 되어 아이라고 불리지 못할 만큼 장성했다.
장대해진 기골, 뚜렷한 태양혈.
무공을 익히지 못한 범부는 백무량의 형형한 눈빛을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할 정도였다.
어디 그것뿐이랴.
“후우우…….”
백무량은 태청신공의 수련을 멈추었다.
태청신단을 비롯한 많은 영약이 백무량의 대맥과 일천 세맥에 자리 잡았다. 웬만한 내가고수보다 더욱 순청하고 많은 양의 내공이었다.
“고생하셨어요.”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현종휘가 삼베를 건넸다. 뺨에 남아 있던 젖살이 쫙 빠진 현종휘의 모습은 사뭇 건장해 보였다.
삼베로 땀을 닦은 백무량이 피식 웃었다.
“뭐야, 아무 이유 없이 가져다준 건 아닐 테고?”
“곤륜파의 대사형이시잖아요.”
대사형.
곤륜파에 제자가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백무량은 대사형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잡음이 있긴 했지만, 백무량이 이룬 업적이 워낙 뛰어난지라 문제 삼는 제자는 아무도 없었다.
구천화우검을 익혔다는 정통성 또한 한몫했다.
곤륜파를 다시 구파일방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여론이 강호에 일어날 정도였다.
물론, 백무량이 의도한 바였지만…….
“철 사제한테는 언제 말할 거예요?”
“그게, 철유한테 말한다는 게 계속 때가 어긋나니…….”
백무량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는 말해야겠다 싶었는데, 곤륜산을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지다 보니 진실을 털어놓기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미루다 어느새 삼 년.
이젠 말을 꺼내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지금 밝히면 기절초풍하겠지?”
“철 사제가 원망할지도 모르죠.”
“그럼 네가 말하면 되잖느냐?”
“제가 어찌 대사형의 비밀을 떠들고 다닌단 말이에요?”
현종휘가 악동과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본 백무량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저 선량하기만 하던 애가 조금씩 성장하며 변화하고 있었다.
‘삼 년 전에 낌새를 보였을 때 휘어잡았어야 했나?’
성도에서 보였던 임기응변이 삼 년이라는 시간을 머금으니 상대를 골려 먹는 수단으로 자리했다.
현종휘가 백무량을 닮아 간다고 볼 수 있었으나, 정작 장본인인 백무량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그래. 네 말이 맞다.”
아무렇게나 대꾸한 백무량이 다른 곳으로 걸어가려던 그때였다.
“제자에게 가르침을 주시지요, 대사형.”
현종휘의 말에 백무량이 한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역시 삼베를 준 이유가 있었잖냐. 땀을 닦아 봐야 소용이 없었네.”
“헤헤…….”
“어디, 얼마나 늘었는지 볼까?”
백무량은 목검을 쥐었다. 이에 현종휘가 침을 꿀꺽 삼켰다.
먼저 비무를 청했으되 저렇게 긴장하는 모습이라니.
백무량의 눈에는 여전히 현종휘가 어린 사제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기고 싶다.’
백무량의 무공을 처음 목도했을 때.
현종휘는 벽을 마주했다. 할아버지인 현노윤에게 배우지 못한 실전적인 검법을 백무량에게서 보았고, 자웅을 겨룬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순수한 존경심이었다.
백무량의 등 뒤를 좇는 것으로 족했다. 현종휘는 현사조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만족했었다.
그것이 틀렸다는 걸 삼 년 전에 깨닫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할 테냐?”
백무량의 말에 현종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서서, 스스로 물었다.
‘이기고 싶나? 정말로?’
애매한 기분이었다. 존경심을 여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등한 위치에 서고 싶다니. 백무량을 이기지 못할지언정 어린 사제 취급은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은 간절했다.
최소한 백무량의 전력을 끌어내고 싶다.
현종휘가 고개를 들었다.
‘보여 주고 싶다.’
삼 년 전과 비교해서 얼마나 달라졌는지.
현종휘는 목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어떠한 전조 없이 펼쳐진 일 초에 백무량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구천화우검의 일 초, 균천관일을 창식(槍式)처럼 펼쳤다. 현종휘의 선공은 백무량을 꺾기 위한 답이었다.
궁리(窮理).
자신보다 현격한 경지에 도달한 강자를 꺾기 위한 궁리가 현종휘의 손아귀 안에 담겨 있었다.
“좋다, 좋구나!”
흥에 취한 백무량이 균천관일을 비스듬히 쳐 냈다.
이에 현종휘는 당황하거나 움츠러들지 않았다.
예상하지 않았던가. 이 정도로는 백무량의 일초반식도 잡아 둘 수 없을 것이라고.
‘잡아 두는 게 아니라, 부순다는 마음으로.’
반격을 허하지 않는 무자비한 일격뿐이다.
현종휘의 검이 또 다른 검로를 그렸다.
분광검의 기수식인 일점분식에서 이어지는 검뢰벽천. 좌에서 우로, 흐름을 자르는 일검이 백무량의 목검을 노렸다.
그것을 본 백무량이 인상을 찡그렸다가, 웃었다.
“너…….”
백무량의 칼끝이 흔들렸다.
현종휘는 그것을 허초로 판단했다. 검뢰벽천을 흘려내고 앞으로 파고드는 것이 백무량의 장기였다.
그러나 백무량은 피하지 않았다.
쩌억!
두 목검이 부딪치며 충격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현종휘의 눈살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
내공 하나 없이, 순수한 근력으로만 이런 힘이라니?
현종휘는 입 밖으로 반칙이라는 단어가 나올 뻔한 것을 꾹 참았다. 지금은 칭얼거릴 때가 아니었다.
발을 질질 끌면서 멈추지 않고 전진했다. 백무량의 목검을 아래로 비껴 내면서 또 다른 궁리를 손안에서 펼쳤다.
분광검 유일의 팔(八)자결. 검뢰벽천과 일섬운월을 잇는 분광검결이 백무량의 혈도를 점했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얕아.”
백무량의 목검이 분광검결을 밀어냈다.
카드드득!
목검의 옻이 벗겨지며 가시가 돋았다. 현종휘의 오른팔이 부르르 떨린다. 백무량의 목검을 억지로 비껴 낸 영향이 근육에 남은 탓이다.
거기서 현종휘는 두 걸음을 더 걸었다. 구천화우검의 창천명월과 분광검의 일섬운월.
그리고 회풍(廻風). 곤륜파의 세 무공이 주변을 장악했다. 내공이 담겼다면 필살의 절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로 대견하다.
백무량은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삼 년의 시간은 아이를 무인으로 만들었다. 현종휘의 발전은 눈부시다 못해 눈이 멀 정도였다.
단지 상대가 곤륜 제일 고수일 뿐이다.
백무량이 목검의 중앙을 노렸다.
쩌저적!
힘을 이기지 못한 현종휘의 목검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허억, 허억.”
현종휘는 가쁜 숨을 내뱉었다. 백무량을 이기기 위해 더욱더 빠르게, 많이 움직인 탓이었다.
그 모습을 본 백무량이 현종휘의 어깨를 두드렸다.
“차분히 쉬어라.”
“허어…….”
“옛날처럼 정강이를 맞고 싶으냐?”
“…….”
현종휘가 입술을 삐쭉거렸다. 굳이 그때 이야기를 다시 꺼내야겠냐는 시선이었다.
백무량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이제야 좀 침착해지는구나.”
“이번에도 졌네요.”
“지는 게 그리 싫으냐?”
“저도 한 번쯤은 이기고 싶었거든요.”
“아직은 어림도 없지.”
“예, 그리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현사조님한테 저는 항상 애죠, 애.”
“……녀석.”
백무량은 하려던 말을 참았다.
동년배 중에 너를 뒤따를 자는 없다.
그 말을 해 봐야 현종휘는 자신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어쭙잖은 위안은 기만처럼 느낄 터였다.
‘너무 자기를 가혹하게 몰아붙이는 건 아니더냐.’
언젠가 저러다가 터지지는 않을까.
백무량은 현종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가, 재빠르게 표정을 고쳤다.
“네가 왜 졌는지 복기해 주랴?”
“그러면 감사하죠!”
현종휘가 반색하며 기뻐하자 백무량은 껄껄 웃었다.
지금은 이대로가 좋았다.
***
“이제 장부를 교차하여 확인하면 끝이군요.”
우상벽의 말에 송우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당연한 소릴 자랑스럽게 말하지 마라.”
“예…….”
“그렇다고 풀이 죽어서야 되겠느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송우현은 속으로 흡족해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답이 서지 않을 만큼 멍청했는데 지금은 주판 정도는 되었다.
그때 우상벽이 송우현에게 물었다.
“한데 청성이 조용한 것이 심상치 않지 않습니까?”
“자포자기한 것이겠지.”
“자포자기라…….”
우상벽이 턱을 매만졌다. 확실히. 송우현과 함께한 삼 년은 기상천외한 시간이었다.
청성파의 부정을 밝히기 위한 조사는 어떤 상인도 해 보지 못한 일일 테니까.
목숨을 내놓고 벌인 일이라고 보는 게 옳았다. 그렇기에 청성파가 운산보와 연관이 있었음을 알아낼 수 있었다.
“불안하지 않습니까. 청성파의 장문인이라면 지금쯤 만금상단주의 멱살이라도 잡았을 텐데요.”
“확실히 유연걸 그놈이 지랄 같기는 하지.”
송우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제 강호에 공표하면 끝이라는 걸 청성파도 알 터인데, 접촉해 오지 않는 까닭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다음 날 밝혀졌다.
***
유연걸은 갈림길에 서 있었다.
‘정말 이걸로 곤륜을 멈추게 만들 수 있을까?’
종남파 내당에 걸려있는 십우도(十牛圖).
이름 모를 도사가 그린 그림으로, 송우현이 속한 만금상단이 주기적으로 찾아온다는 말이 있었다.
그것도 매번 더 비싼 가격으로 구매하겠다던가.
종남파는 상인에게 도학이 담긴 그림을 팔 수 없다고 거절하는 상태였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유연걸의 질문에 목원장이 십우도를 들여다보았다.
“무명인 도사가 그릴 만한 그림이 아니다. 틀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으니 말이다.”
십우도에 그려진 소는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듯이 생동감이 넘쳤고, 소년의 모습은 여러 길로 해석할 수 있었다.
특히 소 발자국의 위치가 평범한 십우도와는 달랐다.
한눈에 봐도 도학(道學)을 지극히 공부한 도사가 그린 것이다.
목원장은 십우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고 엄청난 돈을 주고 살 그림은 아니지. 무명의 도사가 그린 것이니 말이다.”
“하면…….”
“곤륜파와 연이 깊은 게 아니고서야.”
“……!”
유연걸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남아 있었다.
“곤륜파와 연이 깊은데 왜 만금상단이 대신 사는 겁니까? 곤륜파의 도사가 왔으면 팔았을 텐데요.”
“이것을 갈구한다는 사실을 누구한테도 알리고 싶지 않았겠지. 어쩌면 비밀이 담겨 있을지도 모르고.”
“비밀이라…….”
유연걸은 목원장이 그랬듯이 십우도를 들여다보았다.
유연걸의 눈에는 그저 비범하게만 느껴질 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목원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놈들이 운산보주의 비망록을 추적하느라 보인 틈이다. 어쩌겠느냐?”
“사야지요.”
유연걸은 결연한 각오를 다졌다.
“이것으로 곤륜의 입을 틀어막고, 곤륜신성 그놈을 청성에 불러와야겠습니다.”
“전자는 그렇다 치고, 후자는 왜?”
“친선(親善)의 목적으로 사대사행을 견식시켜 준다고 하면 거절할 방도가 없지 않겠습니까?”
목원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유연걸답지 않은 흉계(凶計)였다.
“거기서 처리하겠다는 게냐?”
“처리라니요? 어찌 같은 동도끼리 그러겠습니까.”
다만 불상사가 생길 뿐이다.
유연걸과 목원장이 눈빛을 교환했다.
***
“공표를 미뤄 주십시오.”
백무량이 여느 때보다도 진지한 표정으로 송우현을 찾아왔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이제 청성파를 몰락시킬 일만 남았는데.”
“오늘 아침에 청성에서 전서구가 왔습니다.”
백무량이 건넨 서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종남파의 십우도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
-곤륜파와 친선을 도모하고자 하니, 나흘 뒤 청성산에서 만나기를 바란다.
“지금 공표한다면 십우도를 태워 버릴지도 모릅니다.”
“……망할.”
송우현이 벌레를 짓씹은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