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우 (5)
청룡대가 사천성에서 떠났다.
그 소식을 들은 백무량은 남궁진의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이상한 전서구를 보낸 것도 그렇고, 돌아오겠다던 진자충이 연락 하나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네 녀석은 꾀가 동나면 꼭 나를 찾아오더구나.”
송우현이 가볍게 혀를 찼다. 그러나 속으로는 옅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같잖은 꾀 하나만을 가지고 고집을 부리는 것보다 주변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는 게 나았다. 하물며 백무량은 오만하지도 않았다.
운산보를 멸하고, 사천당가에 빚을 지운다.
백무량이 벌인 일은 평범한 무인이었다면 평생 술안주로 삼을 만큼 대단했다.
그런데도 자신의 부족함을 안다. 송우현은 백무량의 겸손이 언젠가 무기로 자리할 것이라는 걸 예감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백무량이 히죽 웃었다.
“스승이잖습니까.”
“스승? 허.”
평소에는 까탈스럽게 구는 놈이 도움이 필요하면 아이처럼 애교를 부린다. 송우현이 한쪽 눈살을 찌푸렸다.
“네 스승에, 곤륜파의 총관에, 건물 공사까지 관리하고…… 내가 몸이 삼두육비라도 되는 줄 아느냐?”
“그럴 능력이 되시잖습니까.”
“그야, 뭐, 아니라고 하면 내가 아니지만. 능력이 된다고 모두 다 맡기는 건 무슨 심보냐?”
“심보는요. 송 노야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덕행(德行)이고 선행인데…….”
말 한번 청산유수다. 송우현의 입꼬리가 부들거렸다.
“내 말년에 자선을 하게 되는구나.”
“자선이라니요. 곤륜파가 다시 영예를 되찾는 날에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실 겁니다.”
“뭐야?”
“어느 구파일방도 상인과 친하지 않잖습니까.”
백무량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그 모습이 마치 송우현의 속내를 긁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요놈 봐라.’
송우현은 손자의 재롱을 보듯이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곤륜파의 초대 총관으로서 이름을 남기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름? 이름이라…….”
짐승은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했던가?
송우현은 턱수염을 매만졌다. 자손은 충분히 남겼고, 노년이 되면서 남은 욕망은 몇 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과거의 은혜를 갚겠다는 집착 정도. 상인이 최고로 치는 돈은 젊은 날에 질리도록 만졌다.
한데 백무량은 송우현이 생각지도 않았던 욕망을 충동질하고 있었다.
‘조금 가르쳐 놨더니 곰이 어느새 여우가 됐구먼.’
송우현은 백무량의 심계를 눈치채고는 껄껄 웃었다.
“상인이 왜 명망을 쌓겠느냐. 다 살아생전에 돈이나 실컷 만지다가 가려고 쌓는 것이지. 죽어서 총관이 되어 봐야 무슨 소용이라고 그래?”
“하지만…….”
“또, 곤륜파가 언제 또 멸문당할 줄 알고? 네가 영원불멸한 초인인 줄 아느냐?”
송우현의 질타에 백무량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뜻은 여전히 눈동자에 담겨 있었다.
조용히 은퇴하기는 글렀다.
송우현이 유쾌한 웃음을 머금었다.
“우상벽을 내가 왜 가르치겠느냐. 언젠가 나 대신 곤륜파의 재정을 담당할 놈이라 그렇지.”
“그 전까지는 송 노야께서 계속해 주실 겁니까?”
“언제는 안 그랬더냐?”
송우현은 백무량과 시선을 마주했다.
처음 만났을 때 분명 선연을 느꼈는데, 지금 보니 뼈가 진토로 돌아갈 때까지 부려 먹힐 인연이었다.
‘요놈이 과연 어디까지 나아가는지 지켜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송우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말장난은 여기까지 하고, 백무량이 물었던 것을 답해 줄 차례였다.
“청룡대가 떠난 것은, 여기서 몸이나 비비적거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
백무량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청성파가 멀쩡히 있거늘, 왜 있을 필요가 없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꾀는 많은데 아직 지혜는 갖추지 못한 것일까.
송우현이 혀를 가볍게 찼다.
“사천당가가 우방이 되었는데, 바로 옆인 청성파가 움직이면 동태를 바로 알 수 있지 않겠느냐? 하물며, 당가는 무림맹이 주둔하는 걸 좋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곤륜파가 두 집단 사이에서 눈치나 보는 것처럼 보이겠지.”
“……아!”
“사천당가가 곤륜파와 우방이 되고 난 뒤, 청룡대가 떠났다. 그 사실만으로도 청성파는 똥줄이 탈 것이야. 무림맹이 누구의 편이고 누굴 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보일 테니까.”
송우현이 청성파의 장문인을 떠올렸다.
화도인 유연걸이라고 했던가. 성질이 급하고 드센 놈이니 보나 마나 청성산에서 길길이 날뛰고 있을 터였다.
송우현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가만히 있어도 청성파는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운산보주가 남긴 비망록을 캐내면 되는 것이야.”
“몰래 방해하는 모습을 보이면 끝장이니까요.”
백무량의 말에 송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몇 마디를 던져 주면 알아서 깨닫는 게, 상대하는 맛이 있는 녀석이었다.
‘조금 재수 없긴 하지만.’
어리면 실수하거나 어리숙한 모습을 보일 만도 한데 백무량은 좀체 그런 면이 없었다.
송우현은 피식 웃고 말았다. 정말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밥이나 먹고 가라.”
“감사합니다, 노야.”
백무량이 두 손을 모아 올렸다.
***
“이대로 앉은 채로 칼날을 기다릴 작정이더냐?”
느긋한 어조 안에 담긴 칼날.
청성파 장로인 목원장의 말에 유연걸은 울컥하는 마음을 다스렸다. 하지만 목소리에 드러난 노기는 지울 수 없었다.
“하면…… 어쩌란 말입니까?”
“네가 왜 장로들에게 장문인으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줄 아느냐?”
“……?”
“무공 말고는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유연걸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지금 말 다 하셨습니까?”
“네 꼬락서니를 봐라. 따르는 사람이 있을 턱이 없지. 하지만 누가 너를 장문인으로 만들었느냐?”
“그건…….”
유연걸은 대답을 주저했다.
당당하게 자신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눈앞에 목원장을 두고서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그 사실은 목원장도 알고 있었다.
“그래. 나와 사 장로 덕분이지.”
“…….”
“아니지, 사 년 전에 급사한 연선하 때문인가?”
그 말에 유연걸이 고개를 쳐들었다. 아무리 자신이 못났다고 한들 전대 장문인을 목원장이 거론해선 안 될 일이었다.
이 시점에서 둘은 서로를 오해하고 있었다.
‘연선하를 죽이고, 나한테 장문인이 되라고 충동질시킨 놈이…….’
‘아무리 사문이 혼란해진다고 한들, 저런 인면수심을 장문인으로 세워선 안 되었거늘!’
상대가 연선하를 죽였다, 그렇게 여긴 유연걸과 목원장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한다면 언제든 풀 수 있는 오해였다.
하지만 둘은 그러지 않았다.
어찌 됐건 장문인이 된 유연걸과, 그를 뒤에서 조종하는 목원장.
그들은 현 상황에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묻지 않았다. 그렇게 기괴한 유착 상태를 유지한 게 오 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쯧!”
목원장이 고개를 홱 돌렸다.
“내가 개방을 통해 곤륜파를 압박할 방법을 알아 오마. 그러니 너는 그동안 사대사행(四大蛇行)을 돌파할 방도를 찾거라.”
“저보고 아예 반선이 되라고 하시지요.”
유연걸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얼굴에는 불만으로 가득했다.
사대사행이 무엇이던가.
청성파의 개파 조사가 만들어 낸 고행(苦行)이자 선기가 가득한 지형. 범부는 아예 다가갈 수조차 없는 곳이다.
그곳을 통과한다면 반선이 된다는 민담(民譚)이 있을 정도니까.
목원장의 미간이 뒤틀렸다.
“무공만 뛰어난 놈이니 더 단련하란 뜻이었다. 그것이 그리 불쾌하더냐?”
“흥!”
유연걸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목원장의 판단을 내심 인정하고 있었다.
만일 자신이 사대사행을 돌파한다면 강호십대고수라는 단어가 사라질 테니까.
천하제일고수.
그 칭호에 유연걸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곤륜이 실전된 무공을 되찾았는데, 청성파가 불가능할쏘냐.’
유연걸의 시선이 어느새 사대사행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한 남자가 설산을 오르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 해지다 못해 삭아 버린 옷.
폐인과 같은 몰골이었으나 눈빛에 담긴 강렬한 생명력은 강호에 어떤 인물보다도 뛰어났다.
백무량이 그의 얼굴을 보았다면 기절초풍했으리라.
백련교주.
괴력난신이라 불렸던 그가 조금도 노쇠하지 않은 채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하물며 그는…….
“석두가 죽었다고 합니다.”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청노는 수옥(水玉)에서 눈을 뗐다.
백련교의 난 이후로 행방이 묘연하다 알려진 백련교주.
그는 모종의 봉인술을 당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이를 아는 것은 오로지 청노를 비롯한 백련교의 중추뿐이며, 오로지 수옥으로만 백련교주의 용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청노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와 함께 있어야 할 주완(呪玩)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가.”
청노는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슬프지는 않았다. 석두가 아주 희귀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유일한 가치를 지닌 건 아니었다.
“거점을 옮긴다.”
“예!”
청노의 한마디에 건물이 흔들렸다. 석두처럼 청노에게 실험을 받은 수십 명의 무인이 뼛속까지 힘을 짜낸 까닭이었다.
석두처럼 철혈공을 대성한 자는 없었지만 충분한 전력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청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도는 그놈이 제일 뛰어났는데…… 양산품만 남겨서야 어찌 대업을 이루겠나?”
청노는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접근한 남자, 괴성(怪星)이 무인 하나의 뒤통수를 툭툭 때리고 있었다.
“듣는 귀가 있음을 모르는가.”
“들으면 뭐 어때. 나한테 개기기라도 하게?”
괴성이 무인의 귓가에 조잘거렸다.
도발 그 자체인 행동이었지만 무인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철혈공을 대성한 석두조차도 괴성을 이기지 못했으니까, 그보다 못한 무인으로선 덤벼 봐야 개죽음이었다.
그 모습을 본 괴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석두는 질 걸 알면서도 덤벼들었는데, 이놈들은 너무 주제 파악이 빨라서 문제야. 이래서야 어찌 한 무공의 끝을 보겠어?”
“자네는 너무 가벼워서 문제지.”
“나이가 많으면 걱정이 많아져서 문제고?”
괴성이 히죽거리자 청노가 고개를 돌렸다.
행실부터 시작하여 언행까지 모두가 가벼운 남자. 사람을 죽일 때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는 놈이었다.
‘힘만 센 어린애 같으니.’
청노가 묵묵히 짐을 챙기는 동안 괴성이 별안간 떠오른 생각을 내뱉었다.
“석두 그놈, 누가 죽였는지 알아볼까?”
“…….”
복수라고 하면 절대 허락해 주지 않으니 알아본다고 말한 것일 터.
‘보나 마나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고 중간에 싫증을 내거나 누구 해코지나 하겠지.’
청노는 괴성에게 한 가지 당부만을 남겼다.
“대의는 누구에게도 밝히지 마라.”
“알지.”
그 한마디를 남긴 괴성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괴성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청노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이 시끄러워지겠군…….”
백련교는 이제 밝혀져도 상관없다.
단지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가.
그것만 비밀로 유지할 수 있다면, 껍데기는 언젠가 버려도 된다.
청노는 지도를 꺼내 섬서성의 위치를 확인했다.
“친우나 만나러 갈까.”
그곳에서 다른 백련교도와 합류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