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우 (2)
“아예 빚을 갚으라고 하지 그러냐?”
“그게 싫으면 친우가 되면 되지요.”
백무량은 팔짱을 낀 채 배짱을 부렸다.
당문천에게 두 가지 선택을 요구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위태로웠던 사천당가를 구한 공적을 계산해 주든가, 곤륜파의 공적인 친우가 되거나.
천치에게 물어도 전자가 더 낫다고 말할 것이다.
적당한 보상을 주고 깔끔하게 끝내는 게 약소 문파의 친우가 되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당문천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문천이 지켜본 백무량은 미련할지언정 멍청하진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백무량이 피식 웃었다.
“물론 친우가 되면 이득이 있지요.”
“역시나.”
당문천이 백무량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묘한 웃음을 보였다.
“그래.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러느냐?”
“곤륜파는 후일 청성파를 칠 겁니다. 그때 도와주신다면 공을 나눠 드리겠습니다.”
백무량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문천에겐 과장하거나 호들갑을 떠는 것보다 사실부터 거론하는 게 나았다.
그 판단이 옳았는지, 당문천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남은 것은 사천당가의 장로다운 냉정함이라.
“무슨 말을 꺼내나 했더니, 네 몽상이었느냐?”
당문천이 백무량에게 극도의 실망을 드러냈다. 석두를 쓰러트린 일로 생긴 기대를 완전히 잃은 눈빛이었다.
거목 한둘을 베었다고 산을 무너뜨리겠다는 소리처럼 들렸을 터였다. 백무량은 당문천의 내심을 꿰뚫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뻔뻔하게 웃었다.
“당가의 장로나 되시는 분이 귀가 그리 어두우실 줄은 몰랐습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게냐?”
“청성을 몰락시킬 수 있는 무기가 저희에게 있습니다.”
“……헛소리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당문천의 얼굴에는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참으로 연기를 못 하는 노인네다. 백무량은 피식 웃었다.
“최근 성도에 청성의 도인이 많이 오지 않았습니까?”
“무기가 뭔지 말해야 내가 믿든 말든 할 것 아니냐.”
“말하면 빼앗을 방도부터 생각하시겠지요.”
“클클.”
당문천은 부정하지 않았다. 청성파를 몰락시킬 수 있는 무기라면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곤륜파가 가지고 있냐는 것이다.
당문천이 입술을 달싹였다.
“단서 정도는 줄 만하지 않느냐?”
“운산보가 청성파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허어. 어찌 구파일방의 도문이 그럴 수 있느냐?”
당문천이 깜짝 놀라자 백무량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몰래 알아보려고 하셔도 이미 늦었습니다. 청룡대와 증거를 공유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백무량의 말에 당문천이 눈웃음 지었다. 어린아이에게 속내를 들켰다는 게 웃겼고, 가슴 한구석이 서늘했다.
철저하게 사전 교육시킨 당문영을 자기편으로 만든 것으로 모자라 당문천의 내심을 꿰뚫어 보는 도사라.
저잣거리의 민담(民譚)인 ‘지나가는 도사’나 다를 바 없다. 백무량의 존재는 당가 제일 고수인 당문천이 봐도 이질적이었다.
“그래. 밥상은 다 차려 놓았으니 껴들지 말고 콩고물이나 챙기란 거냐?”
“오해십니다. 청성의 덩치가 워낙 크니 같이 나눠 먹자는 겁니다.”
당문천이 껄껄 웃었다.
“듣기 좋은 말을 하기엔 너무 늦지 않았더냐?”
“말학이 한 장로님께 뒤늦게 예를 표했을 뿐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당문천의 눈이 백무량을 훑었다.
뚜렷한 태양혈과 명문의 가르침에 따라 단련된 근골.
겉만 보면 평범한 후기지수처럼 보이는데, 석두를 이긴 걸 보면 성강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 합당했다.
생각에 잠겨있던 당문천이 백무량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약혼자가 있느냐?”
“……예?”
백무량은 눈을 끔뻑였다.
그 모습을 본 당문천이 피식 웃었다.
“뭘 그리 당황하느냐? 내가 아는 곤륜파는 혼약을 금지할 정도로 계율이 엄하지 않다고 들었는데.”
“그렇다고 어린 시절부터 혼처를 내정하진 않지요.”
“문영이가 싫으냐?”
“어리다고 말씀드렸었지요.”
백무량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당문천이 아쉽다는 눈빛을 보냈다.
“네가 그렇게 질색을 하니, 쩝.”
“문영이랑 억지로 잇지 않아도 충분히 나눠 드릴 겁니다.”
“내가 그렇게 속물처럼 보이느냐?”
“예.”
당문천이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한낱 후기지수에 불과한 놈이 대화의 주도권을 꽉 쥐고는 놓지를 않았다.
백무량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는 하려던 말을 이었다.
“잘 도와주십시오. 곤륜이 아무리 챙긴다고 해도 바로 옆에 있는 사천당가가 훨씬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잖습니까.”
“곤륜은 잃었던 구파일방의 지위를 되찾고?”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속으로 셈을 마친 당문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이 정리되면 강서 무림에 널리 알리마. 사천당가는 곤륜파의 친우로 자리하겠다고.”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백무량은 당문천에게 두 손을 모아 올렸다.
그러고는 아미파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대호채에서 얻었던 아미복호검.
그 비급의 정체가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이대로 홀연히 떠날 수도 없는 법이지.’
백무량은 가장 먼저 향할 곳이 어딘지 알고 있었다.
***
“정말 해냈다고?”
진자충의 물음에 백무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련교도가 당가의 지하에 있었던 것도 확인했습니다.”
“확실하게 죽였느냐?”
“예.”
그 말에 진자충이 잠깐 주변을 둘러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보기에 사천당가가 그것을 알고도 침묵한 것 같았느냐?”
“…….”
백무량은 고민하는 척하며 단어를 골랐다. 여기서 무작정 두둔했다가는 나중에 어찌 될 줄 몰랐다. 하지만 한번 연을 맺기 시작한 당가를 내치기도 애매했다.
고민의 시간은 짧았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함께 싸운 구환신수 선배께서 무척 놀란 눈치였습니다.”
“으음.”
진자충이 신음을 흘렸다. 구환신수라면 당가 제일 고수이자 현 당가주의 스승. 증거 없이 건드리기엔 너무 거물이었다.
그 모습을 지그시 쳐다보던 백무량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대주님 덕택에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
백무량의 손가락 사이에 맺힌 청운. 그것들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휘돌다가, 교차하고, 하나로 뭉쳤다.
진자충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후기지수가 이룰 깨달음이 아니라는 것 또한.
“허어……!”
감탄과 경악, 그리고 무인으로서의 호승심. 복잡하게 뒤얽힌 감정이 진자충의 목소리에서 배어 나왔다.
“내 밑천이 털린 기분인데, 막상 나쁘지만은 않구나.”
그 말에 주변에 있던 청룡대 무인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게 그렇게 대단한가?”
“청명한 기운이긴 한데…….”
그들의 반응에 진자충과 백무량은 껄껄 웃고 말았다.
진자충의 풍회뇌동, 백무량의 청운. 두 무학의 외견은 서로 판이하게 다르되 동류의 깨달음을 기저에 두고 있었다.
그 깨달음은 곧 성강의 경지 너머로 향하는 길이니.
그것을 아는 두 무인은 서로를 바라보며 호승심을 불태웠다.
가능하다면 비무를 통해 누가 더 높은 곳에 다다라 있는지, 우열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비무를 할 상황이 아니었다.
“백련교도가 실재한다고 밝혀진 이상, 무림맹주님께 찾아가 봐야겠구나.”
경지를 확인하고 심신을 단련하는 건 무인으로서 당연한 일이나, 진자충은 청룡대주로서 맡은 임무에 충실해야 했다.
이를 아는 백무량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에도 기회는 있겠지요.”
“다른 무인들은 남겨 둘 터이니…….”
“대주님도 아시잖습니까.”
이제 진자충 말고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백무량이 의도적으로 흘린 말을 이해한 진자충이 껄껄 웃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마.”
그 말을 끝으로 진자충이 백무량에게 등을 돌렸다. 말은 여유롭게 했지만, 최대한 빨리 무림맹에 다녀올 작정이었다.
백련교도가 실재하는 이상 백련교의 난은 아직 끝나지 않은 셈이니까.
진자충이 서둘러 마구간으로 향하는 동안, 백무량은 현종휘와 당문영을 찾아갔다.
“일은 잘 마무리된 건가요?”
현종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백무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옷이 지저분해지긴 했지만, 그게 다야.”
“정말요?”
“믿으래도.”
현종휘가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내자 백무량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석두의 공격을 받아치면서 생긴 타박상과 늘어난 근육. 앞으로 꽤 긴 시간 동안 정양하지 않으면 크게 다칠 위험이 컸다.
도복에 비친 피멍을 본 당문영이 눈을 끔뻑였지만, 백무량의 눈치를 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본 백무량이 당문영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네가 지도에 표시한 수련실 말이다.”
“아, 거기로 가셨어요? 그럼 한 장로님과 만나셨겠네요.”
“그분이랑 함께 싸워서 쉽게 이길 수 있었지.”
“뭐라 하시진 않았나요? 장로님께서 워낙, 그게…….”
“괴팍하다고?”
당문영이 침묵으로 답했다. 백무량은 피식 웃고는 하려고 했던 말을 꺼냈다.
“하여튼, 수련실에 있던 소환단 말이야.”
“……?”
당문영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무슨 농담을 하냐는 듯, 백무량을 빤히 쳐다보면서. 약재의 냄새를 맡으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백무량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면서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제 수련실에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 먹어 치웠죠.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킁킁.
백무량의 체취에서 약향을 느낀 당문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제 수련실에 소환단이 있었다고요?”
“네가 가져다 둔 게 아니라고?”
“제가 말했죠. 그런 게 있었으면 먹었을 거라고.”
당문영이 정색하자 백무량은 어안이 벙벙했다.
‘하면 소환단을 누가 가져다놓았단 말인가?’
당문천일 수는 없다. 그는 외인(外人)에게 소환단처럼 귀중한 영약을 베풀 사람은 아니었다.
‘차라리 나한테 달라고 했으면 했지…….’
백무량은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혹시 그놈 말고 다른 사람이 당가에 방문한 적이 있어?”
“……음.”
당문영이 턱을 매만졌다. 꽤나 고심하는 듯, 점차 미간을 찌푸렸다.
‘구환신수한테 물어봤어야 했나?’
어린 나이인 당문영이 모든 방문객을 숙지할 리가 없다. 백무량이 기대를 접던 그때였다.
“한 삼 년 전에 늙은 도사가 왔었어요. 어떤 용무로 왔는지 기억나진 않고요. 이름도 몰라요.”
“도사? 확실해?”
백무량이 평정심을 잃고 큰 목소리를 내자 당문영이 깜짝 놀랐다.
“그, 그게…… 하얀 옷을 입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붓과 종이를 항상 가지고 다녔고…… 그래서 도사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용무로 왔고, 누구의 손님인지도 모른다. 당문영의 말엔 답을 내릴 만한 근거가 없었다.
하지만 백무량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고 있었다.
‘사형이 남긴 안배가 아닐까?’
사형이 직접 찾아왔을 것 같지는 않았다.
묘비와 시서화에 쓰여 있던 날인이 사라지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현노윤과 송우현이 주백천이라는 이름을 잊었으니까.
당문영이 사형을 직접 보았다면 그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터였다.
백무량은 들끓는 마음을 정돈하고는 당문영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말해 줄 수 있어?”
“으음.”
아랫입술을 짓씹은 당문영이 눈을 감았다. 인상을 한가득 쓴 채로 옛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백무량은 현종휘와 담소를 나누며 당문영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렇게 일다경인가.
눈을 슬며시 뜬 당문영이 백무량에게 용서를 구했다.
“죄송해요. 지금 떠오른 건데…… 그분은 도사가 아니에요.”
“왜?”
“글을 쓰신다고 했거든요.”
당문영이 뒤이은 말에 백무량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도사가 주인공인 영웅담(英雄譚)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도사라고 생각했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