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우 (1)
청운과 청운이 교차한다. 억지로 기워 넣은 듯 어색한 움직임이나 그 중심에는 완연한 형을 갖춘 조화가 있다.
백무량의 심의가 더욱 깊은 곳으로 향한다. 요안의 남자에게 펼쳤던 무명식(無名式)과는 달랐다.
검해가 인도하는 길이 아니라, 백무량이 가고자 하는 길.
그 길을 걷기 위해 백무량은 검을 쥐었다. 수없이 교차했던 청운은 곧 운해가 되었다.
“……!”
예기치 않은 기운을 느낀 석두가 땅을 박찼다. 그는 순식간에 백무량의 눈앞까지 다다랐다. 이치를 벗어난 속도에 백무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당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담담했다.
이제는 석두가 두렵지 않았기에.
백무량이 운해를 움직였다.
콰쾅!
석두의 주먹이 운해를 때렸다. 벽을 부수고 강철을 찢는 일권이었으나, 운해를 뚫지는 못했다.
그저 거대한 소음이 지하를 뒤흔들 뿐이다.
백무량은 득의의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나, 사형의 안배는 백선신검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동굴 안쪽에 고여 있던 돌풍. 한때 자신을 가로막았던 벽이 이제는 백무량의 무기가 되었다.
백선신검이 검이라면, 돌풍은 방패. 공방일체의 조화가 백무량의 손아귀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석두는 의지를 꺾지 않은 채, 다시 한번.
꽈과광!
정권이 운해를 강타했다. 전보다 두세 배는 강한 힘으로 운해를 찢어발기겠다는 듯이.
“철혈공은 무적이다!”
석두의 외침에서 백무량은 광기를 느꼈다. 시뻘게진 피부에서 붉은색 증기가 피어올랐다.
그렇게 삼격(三擊)째.
쩌억!
시뻘건 광망을 흘린 석두가 운해를 꿰뚫었다. 석두의 얼굴에 미소가 진득해진다. 자기 몸을 스스로 망치는 것도 모르는 채, 석두의 걸음이 앞으로 향했다.
백무량은 본격적으로 구천화우검을 펼쳤다.
균천관일. 태양을 꿰뚫는 일검이 석두의 미간을 향해 쏘아졌다. 태청신공으로 이루어진 운해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이에 석두는 진각을 밟았다.
쾅!
석두의 발이 땅을 강타하자 천장에서 돌가루가 후두둑 떨어졌다. 금방이라도 건물이 무너질 듯 위태했으나, 석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운해를 꿰뚫었던 주먹질을 무식하게 행할 뿐.
주먹과 균천관일이 부딪쳤다. 그것만으로 백무량은 양발이 사라진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
‘이게, 무슨 힘이……!’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괴력.
백무량의 발이 땅 안으로 푹 꺼졌다. 손목도 한순간 꺾였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소환단을 취하지 않았다면 손쓸 새도 없이 당했을 터였다.
백무량은 자기도 모르게 옅은 신음을 내뱉었다.
“큭!”
미처 막아 내지 못한 충격이 온몸을 휩쓴 탓인가.
아릿한 통증이 전신을 휘돈다. 비릿한 향이 입안과 코를 훑었다.
토혈을 억지로 되삼킨 백무량이 석두를 노려보았다.
‘저놈, 설마…….’
조금 전부터 흘리고 있는 붉은색 증기가 피란 말인가.
백무량은 석두의 광기에 치를 떨었다. 이빨을 앙다무니 턱에 주름이 졌다.
“기세등등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느냐!”
석두가 충혈된 눈으로 백무량을 노려보았다. 시간이 얼마 없다는 예감이 그를 충동질하고 있었다.
요안의 남자를 되살린 뒤 제대로 쉬지 않은 채 금제를 풀고, 한계를 넘었다.
빨리 끝내지 않으면 청노가 일찍이 경고한 대로 전신이 터져서 죽고 만다. 그런 석두의 조급함이 행동에서 드러났다.
“죽어라!”
죽음을 도외시한 일격이 백무량의 기해혈을 향했다. 석두에게 있어 확률이 높은 도박이었다.
백무량은 자신을 일격에 죽일 살초를 갖추지 못했으니까.
어디가 잘리더라도 서둘러 수습하면 될 일이다. 석두의 판단은 일견 옳은 것처럼 보였다.
백무량이 하나의 벽을 넘지 않았다면…….
콰콰쾅!
운해가 석두의 주먹을 막아섰다. 백무량의 발악이라고 생각한 석두가 비웃음을 머금었다.
또다시 꿰뚫리리라.
그 오만함은 일거에 깨졌다.
비류폭(飛流瀑). 호천풍연에서 파생한 초식이 백무량의 검 끝에서 펼쳐졌다.
“……!”
운해 안에 첩첩이 쌓인 청운이 하나둘씩 용솟음쳤다. 수백 개의 검기를 품은 구슬이 쪼개어지는 듯한 광경이었다.
카가각!
수십의 칼날이 석두의 전신을 할퀴자 붉은색 증기가 더욱더 강하게 피어올랐다. 한계에 달한 철혈공이 출혈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몸을 파괴하고 있었다.
“놈!”
그러나 석두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떤 무림 고수일지라도 자신의 일격을 버티지 못했으니, 백무량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고통은 잠시일 뿐이다. 철혈공을 수련하던 때에 비하면 별것 아니다.
석두의 얼굴에 아집이 맺혔다.
이에 백무량은 살초를 연속해서 펼쳤다.
광풍첩(狂風疊). 비류폭으로 용솟음친 청운이 돌풍으로 화한다. 수백 개의 검기가 석두를 할퀴었다.
콰콰콰!
석두가 한쪽 무릎을 휘청거렸다.
비류폭에 당한 상처가 벌어지며 근육이 손상된 탓이다. 철혈공이 아니었다면 단번에 폐인이 되었을 터였다.
“끄으으…….”
신음을 흘린 석두가 오른손으로 돌을 쥐었다.
근접하지 못한다면 십지탄강의 묘리로 백무량을 무력화시키겠다는 판단이었다.
백무량은 미간을 찌푸렸다. 석두가 죽음을 도외시하며 자신을 죽이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단순히 백무량이 곤륜도이기에 죽인다. 그것만으로는 저 집착을 설명할 수 없었다.
“말해라.”
“무엇을 말이냐?”
“그렇게까지 나를 죽이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백무량의 물음에 석두가 어깨를 으쓱였다.
“마인이 사람을 죽이는 데 이유가 필요하더냐.”
붉게 달아올랐던 석두의 피부가 점차 새하얗게 변해 간다.
철혈공이 깨진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처량했다. 하지만 백무량은 어떠한 동정심도 품지 않았다.
“알겠다.”
운해가 일점으로 모여들었다. 겉보기에는 균천관일과 같았으나 그 속에는 청운이 교차하면서 생긴 조화가 있었다.
호천풍연을 통해 펼쳐지는 균천관일.
천간투(天干透)가 석두의 목숨을 취했다.
***
“저쪽은 싸움이 끝난 모양이군.”
“…….”
당문천의 말에 요안의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나름대로 방비를 하고 있었거늘.’
견혼수와 자오분심(子午焚心), 구환살(九幻殺).
극독을 다루는 실력과 암기술의 기예가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사실상 가주인 당호보다 더욱 뛰어난 무인이었다.
요안의 남자가 이를 앙다물었다.
“끄으윽…….”
“숨 쉬지 마라, 붙여 놓은 목숨을 스스로 버리기 싫다면.”
당문천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요안의 남자의 목을 짓밟았다.
“앞으로 나와 이야기할 게 많으니까.”
“큭, 크크…….”
“우스우냐?”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 이긴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우습게 보이지 않겠느냐?”
당문천의 눈이 가늘어졌다. 요안의 남자가 발악하고 있다기엔 그가 풍기는 기세가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정녕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게 아닌가.
당문천이 잠시 고민하는 사이에 요안의 남자가 모든 마기를 바깥으로 몰아냈다.
파스스……!
벽에 걸려 있던 횃불이 순식간에 시꺼멓게 변했다. 당문천은 황급히 제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런!”
당문천의 얼굴에 낭패가 어렸다.
“자진(自盡)할 줄이야.”
요안의 남자가 독에 완전히 중독되었다.
항상 자기 목숨이 석두보다 중하다고 말하던 놈이었기에, 독으로 제압만 해 두면 될 줄 알았거늘.
당문천은 곧바로 그의 심맥에 손가락을 대었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정보를 캐내진 못하겠군.”
당문천이 혀를 가볍게 찼다.
단지 그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
“어떻게 된 겁니까?”
“이렇게 된 거지.”
백무량은 당문천의 당당한 표정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문천이야 그냥 아쉬운 것으로 끝이지만, 백무량은 그렇지 못했다.
“물어볼 게 많았습니다.”
“먼저 나한테 말하지 그랬냐?”
“…….”
백무량이 가만히 쳐다보자, 당문천이 되레 성을 냈다.
“나라고 죽게 두고 싶어서 뒀겠느냐! 독으로 제압만 해 뒀더니 알아서 죽겠다고 지랄을 하는데!”
“……후우.”
한숨을 내쉰 백무량은 석두의 시신을 질질 끌어서 요안의 남자 옆에 두었다.
피가 모두 빠진 상태임에도 철혈공으로 단련된 그의 근골은 평범한 범인보다 두 배는 무거웠다.
그들을 가만히 보던 백무량이 당문천에게 물었다.
“혹시 이놈들이 청해성에 갔다거나 전서구를 부린 적이 있습니까?”
“지하에서 나간 적은 없고, 전서구를 자주 쓰긴 했지.”
“그거라도 알아봐 주시면…….”
“그거야 당연하지.”
당문천이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후기지수든, 곤륜파가 약소 문파든, 당가는 은원을 확실히 지킨다.”
“그나저나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진지한 얘기 하는데, 요놈이.”
인상을 찡그린 당문천이 백무량에게 미리 생각해 둔 계획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마인을 두둔하던 당가주를 축출하고, 소가주가 장성할 때까지 당문천은 대리인으로서 군림한다.
백무량은 당문천의 머릿속이 훤히 보였다.
“소가주는 문영입니까?”
“똘똘한 애가 그놈밖에 없으니까 그러지. 아, 네가 당가로 오겠다면…….”
“그럴 일은 없습니다.”
백무량이 단호하게 대답하자 당문천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문영이를 봤으니까 알겠지만, 걔가 은근히 싹싹하고 예의가…….”
“애잖습니까.”
“허 참, 너는 애가 아니고?”
당문천은 백무량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게 전혀 없긴 하지만, 이놈은 정말로 자길 어른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백무량이 곧바로 말을 돌렸다.
“앞으로 곤륜파의 우방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당연하지. 내가 도움을 받았는데 어찌 모르쇠 하겠느냐?”
“장로님 개인이 아니라, 당가가 곤륜과 친우가 되길 바랍니다.”
“……!”
백무량의 말에 당문천의 눈빛이 달라졌다.
흥미롭긴 하지만, 위험하다. 속내를 숨긴 당문천이 피식 웃었다.
“칼질 한 번에 당가를 친우로 맞먹으려고 그래?”
“문영이에게 들었습니다. 본래는 곤륜파를 통해 청룡대에게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고, 사천당가가 그만큼 위태롭다고요.”
백무량은 당문천과 시선을 마주했다.
“무림맹의 중재나 도움을 받아야 했을 상황을 저 혼자 해결했습니다. 그런데도 친우가 되면 안 됩니까?”
당문천의 눈썹이 들썩였다.
어린아이답지 않은 통찰이 당문천을 당황케 했다.
“……말은 청산유수구나. 하지만 말이다. 당가의 뿌리는 본래 정파보다는 사파에 가까운데, 곤륜파가 우릴 친우로 삼아도 되겠냐?”
“그건…….”
백무량은 잠시 숙고했다.
확실히, 사천당가는 우방으로 삼기엔 위험했다.
당장 당문영을 보라.
어린 나이에 가면을 쓴 채 곤륜파를 속이기 위해 왔고, 당문천의 암기술은 어렵지 않게 요안의 남자를 죽일 정도였다.
‘나한테 석두를 맡긴 것도 사실은…… 그에게 도움을 받던 당가 무인의 원한을 나한테 돌리려고 한 걸지도 모르지.’
백무량은 사천당가가 가진 음험함을 알고 있었다.
상황이 불리해지면 자기 눈과 귀를 막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고선 나중에 말할 것이다.
가문 내의 일이 바빠서 도우지 못했다고. 사천당가는 그러고도 남을 곳이었다.
그러나 백무량은 사천당가를 친우로 삼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
“제가 한 칼질, 딱 그만큼만 갚으십시오.”
그 말을 들은 당문천이 크게 웃어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