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우 (3)
백무량의 몸이 비틀거렸다. 마음 한구석에 고여 있던 불안이 갑자기 녹아내렸다.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영웅담에 관한 이야기는 사형이 아니면 모르는 일이었다. 몇 안 되는 추억이기에 어떤 친우일지라도 말하지 않았다.
백무량의 눈이 반쯤 감겼다. 어린 시절, 자신의 귓가에 영웅담을 속삭이던 주백천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본 당문영과 현종휘가 크게 당황했다.
“무슨 일이세요?”
“피곤하신 걸 거야.”
“아니야, 괜찮아.”
백무량은 몸을 곧추세웠다. 웃음이 까닭 없이 터졌다.
어딘가에서 주백천이 살아 있을 것 같아서, 어려진 백무량을 지켜보고 있을 것 같아서.
그에게 묻고 싶었다.
어째서 몰락한 곤륜파를 그대로 두었는지.
곤륜신성 백무량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존재를 드러내지 않은 까닭이 무엇인지.
신기한 점도 있었다.
“그보다 문영아, 그 도사가 삼 년 전에 찾아왔다고 했지?”
“네. 확실해요.”
“그 이후론 찾아오지도 않았고?”
“네……. 그게 이상한가요?”
당문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백무량은 당문영을 안심시키기 위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수련실엔 자주 갔었고?”
“그렇죠.”
곤륜파로 향하는 전날까지도 자기는 수련을 하고 있었노라고, 당문영이 그렇게 말을 덧붙였다.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내가 특별한 행동을 했던가?’
이곳저곳을 뒤지긴 했지만, 삼 년 동안 살다시피 한 당문영만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백무량에겐 여유가 없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손이 가는 대로 뒤졌을 뿐이다.
그 말인즉…….
백무량이 수련실에 도착할 때까지 당문영은 소환단의 존재조차 몰랐다는 뜻이다.
‘천명이 아니고서야.’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백무량의 복잡한 심경과는 다르게 하늘을 눈부시게 밝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 선선하게 부는 바람. 가을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며칠 쉬다 가자, 날이 좋으니.”
백무량의 말에 현종휘가 화색을 머금었다.
아무래도 사천의 음식이 입에 맞은 듯했다.
“일은 잘 마무리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중년인의 말에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솔직하게 말해서 당황스러웠다.
사천당가에서 청룡대. 청룡대에서 이곳, 객잔까지.
시간으로 치면 겨우 두 시진밖에 걸리지 않았다. 사천당가에 있었던 일은 당문천이 은밀하게 처리하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중년인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나를 떠보려는 건가?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텐데.’
백무량이 침묵하자 중년인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나갔을 때와 옷이 다르지 않습니까. 일이 끝났겠거니 생각한 것이지요.”
“……으음.”
“제가 실언을 한 모양입니다. 사죄드리지요.”
중년인이 두 손을 모았다. 백무량은 그 모습이 조금 의심스러웠다.
고개가 빳빳하던 중년인이 지금은 스스로 숙이고 있었으니까.
백무량은 그를 시험하기 위해 한 가지 질문을 떠올렸다.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
중년인의 눈이 한순간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올랐다.
그 변화는 백무량처럼 오감이 뛰어난 무인이 아니면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선상인(船商人) 조윤입니다.”
“주로 배를 거래하십니까?”
“사고팔 수 있는 거라면 뭐든 가리지 않지요.”
조윤이 싱글벙글 웃었다. 백무량은 무의식적으로 송우현을 떠올렸다.
속내에 무언가를 항상 숨기고 있는 모습이 송우현을 닮아 있었다.
‘그래도 송 노야에 비하면 어수룩해.’
백무량의 얼굴에 조소가 떠올랐다.
“며칠 전에는 당가와 청성을 거스르지 않는 방향으로만 돕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상인의 말이란 항상 허무한 법이지요.”
조윤이 천연덕스럽게 넘어가려는 모습에 백무량은 아무런 대답도 남기지 않았다.
“종휘야, 따라오너라.”
“예? 예.”
저벅저벅.
백무량이 현종휘와 함께 이 층으로 올라가자 조윤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물쩍 넘어가게 두진 않겠다는 건가?”
조윤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백무량은 조용히 웃었다.
저 말대로 조윤에게 값을 받아 낼 생각이었다.
곤륜에게 한순간이나마 무례했던 값을.
‘한번 지켜볼까.’
그걸 받고 나서 조윤이라는 상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봐도 늦지 않았다.
***
“소환단이 주인을 찾아갔구나.”
죽립을 깊게 눌러쓴 도사가 하늘을 향해 도호를 외웠다.
그의 손 안에 책자가 하나 있었다. 책자의 표지에 하나의 글자가 적혀 있었다.
백무량이 보았다면 당장 기함했을 단 한 글자.
주(株).
백무량의 사부인 주자령과, 사형 주백천의 성씨였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꼬.”
도사는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눈을 지그시 감으니 과거에 보았던 별자리가 주르륵 떠올랐다.
요안의 남자가 좌도방문이라면, 도사는 우도방문.
천기를 거스르지 않고 순행하는 형태였다.
그렇기에 답답할 정도로 느리지만…… 반드시 정도(正道)를 향했다.
“보이는구나.”
도사가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며 한탄했다.
“홀로 걸어가는 모습이…….”
살기를 품은 적이 가득한 곳. 그곳에서 백무량은 의연한 표정을 지은 채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길에는 영광이 있었고, 백무량이 그토록 바라던 희망이 존재했다.
하지만 순탄하지는 않을 터였다.
“사행(蛇行)이라…….”
뱀이 아가리를 벌린 길 위에서 백무량은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도사는 하늘에 대고 빌었다.
백무량이 그 길을 잃지 않기를, 무사하기를,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을 찾아올 수 있기를.
도사는 간절하게 빌었다.
***
사천당가에 있었던 일은 당문천에 의해 아주 은밀하게 처리되었다.
예전부터 준비한 것처럼, 손쓸 새도 없이.
당호는 당문천이 사천당가를 자기 힘으로 규합시키는 꼴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
“당호,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없습니다.”
당가주인 만독수 당호는 고개를 떨궜다.
석두를 통해 새로운 독을 만들고, 강호십대고수로서 군림하겠다는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졌다.
‘백무량이라고 했었지.’
당호의 눈에 분노가 맺혔다. 시간만 있었다면 모든 게 자신의 뜻대로 흘러갔을 터였다.
그 흐름을 바꾼 것이 바로 곤륜신성 백무량. 청해의 후기지수라 무시했던 그놈이었다.
‘그놈만은 반드시 죽여야 속이 풀리겠어.’
그렇게 당호가 음습한 살의를 품고 있을 때였다.
쩌억!
당문천의 일권이 당호의 기해혈을 때렸다.
당호가 입을 쩍 벌렸다. 눈앞이 새하얘지는 고통과 단전에 모아 두었던 내공이 흩어지는 상실이 당호를 괴롭혔다.
“이게, 무슨…….”
당호의 신음에 당문천이 한쪽 입꼬리를 씰룩였다.
“내가 천치인 줄 아느냐? 네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대로 둘까.”
“하나, 백부께서는……!”
“그래그래. 네가 사람 구실할 때까지 잘 봐줬지. 그땐 요만한 꼬마였는데 말이야.”
실실 웃던 당문천이 돌연 정색했다.
“대가리 좀 굵어졌다고 제멋대로 행동하기 전까지는.”
“……!”
당호의 눈동자가 시뻘겋게 변했다. 백무량에게 품은 분노보다 수십 갑절의 배신감이 당호를 괴롭혔다.
“이번 일을 반드시 후회하게 해 주겠소!”
“내가 과오를 그대로 둘 사람으로 보였느냐?”
당문천이 당호의 정수리를 짓눌렀다. 필사의 의지로 저항한 당호였으나, 내공을 상실한 이상 당문천의 근력을 이길 순 없었다.
하물며 그는 구환신수로 불리는 당가 제일 고수.
원래도 이기지 못한 고수를, 내공까지 잃은 맨몸으로 이길 순 없다. 당호는 입술의 살점을 깨물었다.
쿵, 당호가 두 무릎을 꿇자, 당문천은 당호의 안섶을 뒤졌다.
“어디 보자.”
“그, 그건 안 돼!”
당호가 몸을 비틀어 봐야 발버둥에 불과하다. 당호의 안섶에서 호리병을 꺼낸 당문천이 피식 웃었다.
“연구에 성과가 있으니 당가주에선 내쫓지 않으마. 다만 거기서 만족해라. 잘 먹이고, 재워 줄 테니까. 그것으로 끝내라.”
그 이상은 주지도 않을 터이니.
당문천의 살기에 당호가 허물어졌다. 기해혈을 강타당한 충격과 배신감을 이기지 못한 까닭이었다.
당문천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문영이가 자리를 이어받을 때까지 죽은 듯이 지내.”
“…….”
당호의 얼굴엔 짙은 절망만이 가득했다.
***
-저놈들의 시체는 뒷산에서 한번 태운 뒤 묻어라!
당문천의 밀명에 사천당가의 무인은 석두와 요안의 남자를 둘러업고는 뒷산으로 향했다.
나뭇잎으로 시체를 덮고 횃불을 던진다. 단지 그것이면 끝나는 일이었다.
한데 무인의 귓가에 한 줄기 소음이 들렸다.
부스럭.
나뭇잎 안쪽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듯했다. 무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갑작스레 든 오한에 손끝이 저렸다.
마기였다, 그것도 아주 짙은 마기.
“크으윽…….”
고통으로 신음하는 소리가 지맥을 타고 흘렀다. 석두는 아니었다. 그라면 곧바로 몸을 일으켰을 터였다.
‘눈이 이상한 그놈인가.’
무인은 떨리는 손으로 독침을 꺼냈다. 요안의 남자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에 사혈을 노릴 작정이었다.
그때 나뭇잎 안쪽에서 주술이 행해졌다.
“그만.”
“……!”
“그만이라고 하였다.”
좌도방문. 천기를 흩뜨리고 인세를 어지럽히는 사특한 술수가 요안의 남자에게서 발해졌다.
독침을 매만지던 무인이 갑자기 멈춘다. 그것을 기감으로 확인한 요안의 남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큰일 날 뻔했군.”
요안의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당문천의 독을 이겨 낼 수단이 없었다면 그대로 죽었을 터였다.
“미리 받아 놓기를 잘했어.”
석두의 피.
백무량에게 심장을 꿰뚫렸다가 되살아난 이후로 요안의 남자는 석두에게 부탁했다.
독에 당할 가능성이 크니 손가락 한 마디 정도만 피를 받아 가겠다고.
그 판단은 주효했다. 당문천의 독에 당한 순간 삼키고 이 각. 멈춰 버린 심장이 다시 뛰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서걱!
사천당가의 무인의 목을 벤 요안의 남자는 곤륜파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다른 교인들에게 알려야겠어.”
곤륜신성 백무량이라고 했던가.
그가 천명을 깨닫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죽여야 한다. 요안의 남자가 살기를 흘리던 그때였다.
“가길 어딜 가나.”
“……!”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요안의 남자가 마기를 흩뿌렸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콰콰쾅!
흑마의 일격에 마기가 단숨에 꿰뚫렸다. 그야말로 권경(拳經). 태산의 기세가 요안의 남자를 향해 내질러졌다.
“네 이놈!”
요안의 남자가 내지른 노호는 단말마에 불과했다.
털썩.
요안의 남자가 단숨에 절명했지만 흑마는 신중을 기했다.
“뿌려라.”
“…….”
흑마의 말에 백귀가 요안의 남자에게 화골산을 뿌렸다.
거품이 끓다가 가라앉으니 시체마저 남지 않았다.
“……허.”
공허했던 백귀의 눈동자에 총기가 돌아오자, 흑마가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냐?”
“형, 형님이잖아.”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흑마는 백귀의 머리를 때리며 생각했다.
언젠가 백무량에게 이 빚은 갚겠노라고.
또한…….
“백련교, 아니, 마교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하느냐?”
원한은 반드시 갚는다.
흑마가 백귀의 어깨를 붙잡았다.